34. 병장이야?
-김민준 님께서 차원 이동을 하신 뒤, 성녀가 저희에게 가장 먼저 찾아오긴 했습니다.
“그래? 너희들한테 해코지한 것은 아니고?”
만약 그렇다면, 다시 이스가르드로 돌아가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했다.
흑마법사는 기본적으로 천대받는 직업군에 성능조차 좋지 않다.
다른 직업군들을 휴식을 취하면 소모된 힘이 회복되지만, 흑마법사들은 마기를 새롭게 얻어야 했다.
흑마법사는 스킬을 사용하면 마기가 소모되는데, 다른 직업들과 달리 회복되지는 않았으니까.
정점에 달한 자신이라 할지라도, 그 부분은 예외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으름장을 놨는데, 역시 말뿐이라 그런가.’
김민준은 지구로 귀환하기 전, 흑마법사들의 처우와 인식 개선을 요구했었다.
국왕은 꼭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했었고.
-오오. 김민준 님. 지구에 와서도 저희들을 걱정해 주시고 계셨던 겁니까!
이봉구는 자신의 표정을 확인하고, 감동에 겨운 듯 울어 댔다.
“까아악!”
“시끄럽고, 그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나 말해.”
-아, 죄송합니다. 이 녀석과 동화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성녀는 우리 신도들이 차원 이동을 해, 김민준 님을 다시 데려오셨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했습니다.
겉으로는 깔끔하게 포기한다고 해 놓고, 역시 뒤로는 수작질이었다 이건가.
“계속해 봐.”
-당연히 차원 이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희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했더니….
이봉구는 분노에 찬 듯 부리를 덜덜 떨었다.
-세리아 님의 조각상을! 사납게 던져 버리더군요! 어찌 성녀란 자가 그런 잔혹한 짓을 하는지!
“큰 조각상? 아니면 작은 조각상?”
-작은 쪽이었습니다.
“그래? 목숨은 건졌네.”
큰 조각상은 신도들이 열심히 조각했던 것이고, 작은 것은 자신이 대충 만든 조잡한 조각상이었다.
퀄리티는 큰 쪽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아. 다른 신도들은 멀쩡합니다. 김민준 님이 무서우신지, 직접적으로 건드리지는 않더군요.
“그러냐? 뭐 다른 건 없고?”
-예. 제가 아는 건 전부 말씀드렸습니다.
김민준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성녀가 나를 다시 데려오려고 했다라….’
차원 이동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 텐데.
‘그런 큰 페널티를 감수하고서라도, 내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전쟁이 아니고서야, 딱히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별 상관없겠지. 이스가르드에서 차원 이동을 시전할 수 있는 놈들은 없다.’
성녀는 예외적으로 차원 이동을 사용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 같은 이세계인을 대상으로한 경우만 가능했다.
‘이세계인 소환도 페널티가 많다고 했지. 내 이후로 소환하려면, 적어도 100년은 걸린다고 말했고.’
거기다 차원을 이동할 방법을 마련한다 해도, 지구의 좌표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울 터.
‘이봉구 저놈은 정상이 아니니까 예외겠지만.’
이봉구에게 다시 이세계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저 녀석은 죽음을 감수하고 돌아갈 것이다.
그만큼 신도들은 자신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랐다.
“너도 알다시피, 난 마기가 많이 부족한 상태다. 그러니까 넌 던전 같은 곳을 우선적으로 잘 뒤져 봐. 일단 너에 대해서는, 내 계급이 높아지면 생각해 보기로 할 테니.”
-예! 맡겨만 주십시오!
이봉구는 그 말을 끝으로, 공중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야. 너 쟤 감시 잘해라. 헛짓거리하면 바로 말리고.”
스스스스-
나이트 워커는 맡겨 달라고 대답한 뒤, 땅속으로 숨어들었다.
“1박 2일은 레알 1.2초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복귀잖아.”
짜장면이나 실컷 먹고 가야지.
**
제104사단.
헌터 기동 훈련이 끝나고, 사단장과 각 대대 대대장들이 모여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장교진들은 대대장의 눈짓이나 손짓에 맞춰, 빔프로젝터에 비치는 PPT를 한 장씩 넘겼다.
그들의 회의 주제는 이번 훈련 강도가 어땠는지, 사단의 전투력은 어느 정도인지, 앞으로의 훈련 방침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이었다.
“이번 헌터 기동 훈련은 지난번에 비해 강도가 높아진 건 맞는데… 이병이나 일병들 80% 가까이가 중도 탈락이다.”
사단장은 보고서를 눈으로 슥 훑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대대장들은 긴장한 채로 사단장의 말을 경청했다.
“이렇게 해서야 훈련이 되겠나? 훈련을 제대로 완수하지도 못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나? 이래서 던전 클리어나 할 수 있겠어?”
사단장이 보고서를 들어 사납게 던졌다.
“대대장들… 일 이따위로 할 거야? 상병이나 병장들이야 그렇다고 치는데, 이병하고 일병들의 전투력은 왜 이렇게 개판이야?”
“죄송합니다!”
“너희들이 잘해야 밑에 병사들도 잘할 거 아니냐고! 내 말이 틀렸나?”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해라.”
“예!”
결론부터 말하자면, 헌터 부대들 중에서도 104사단의 훈련 성적이 미흡하다는 말이었다.
최전방에 있는 병사들의 전투력이 낮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
사단장은 임시로 추가될 훈련을 위해, 뒤에 있는 훈련을 더 앞당기라고 지시했다.
병사들에게 있어, 헬 게이트는 이미 확정인 셈이었다.
“아. 그리고 저번에 말한 김민준 상병. 훈련 때 어땠다고 그랬지?”
회의 주제가 김민준으로 넘어가자, 사단장의 분위기가 살짝 누그러들었다.
“예! 소대 감점 요소를 제외하면 전부 만점입니다! 감독관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소대장이 맡은 역할까지 동시에 수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간부터는 손은서 상병까지 업은 채로 훈련을 완료했고?”
“그렇습니다! 거기에 마지막 지점에서 푼 검은 갈퀴는 그가 혼자 처리했다고 합니다!”
2대대 대대장의 보고에, 사단장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 안 그래도 자기 딸내미가 다쳤다고 저쪽에 있는 사단장님께서 나한테 전화를 막 퍼붓더라고. 김민준 상병 아니었으면 그날 잠도 못 잤을 거다.”
사단장은 아무 말 없이 보고서를 읽어 나가다가, 입을 열었다.
“괴물쥐의 서식지에서 이레귤러를 단독으로 처치. 대민 지원 때 발생한 게이트를 단독으로 처리. 그것도 휴가 중에. 이번 헌터 기동 훈련은 거의 만점. 이 녀석이 병장으로 특진하는 데에 이의 있나?”
“없습니다!”
이의가 있을 리 없다.
사단장이 저 말을 꺼냈다는 것은, 이미 김민준의 진급은 절반 이상 확정이라는 말이었기에.
“사단장님. 그런데… 김민준 상병은 이번까지 하면 2번이나 특례로 진급입니다.”
2대대장이 슬쩍 대답했다.
그의 말은, 김민준이 너무나도 눈에 띈다는 말이었다.
“나도 알아.”
사단장은 걱정 말라는 듯이 대답했다.
“부대에 배치받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2번이나 진급했지. 승급 시험은 만점으로 합격했고. 거기다 힘 스텟이 60이 넘는다며?”
“예! 그렇습니다!”
“후우. 아쉬워 죽겠구만. 김민준이가 대학만 나왔어도, 내가 어떻게든 장교로 끌어올리는 건데.”
“그렇습니다! 학벌이야 옛날에나 중요했지, 지금은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다른 대대장들이 황급히 동조하며 대답했다.
“이미 다른 부대에서는 눈치를 깠어.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예!”
사단장의 말은 김민준 상병이 부대에서 상당히 귀한 인재이니, 절대 밖으로 차출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지금 시기에 특별 진급을 시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번까지 하면 2번이나 단기간에 특별 진급을 한 셈이다. 미끼를 안 던질 놈들이 없겠지. 그러니까 병장을 달아 주는 거고.”
특히나 특전 헌터 여단이라든가, 특수 헌터 임무단 같은 특수 부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뻔했다.
“우리 부대는 안 그래도 최전방에 위치해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던전이 발생하고, 게이트가 열리는 상황이란 말이야. 우수한 헌터가 차출되는 건 우리 부대에선 큰 손실이라는 말이다.”
사단장의 시선이 2대대장에게로 향했다.
대대장은 재빨리 대답했다.
“예! 김민준 상병은 제가 특별히 주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무슨 접촉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 물론 당분간은 괜찮겠지. 그놈들도 함부로 병장을 차출하려고 하진 못할 테니.”
“예!”
회의는 밤늦게까지 진행되었다.
**
김민준이 휴가를 복귀한 다음 날.
“떴다아아아아아!”
“저놈 또 지랄 났네.”
“뜨긴 뭘 떠 미친놈아. 전투복이나 빨랑 입어라.”
헌터들이 아침 일과를 준비하는 사이, 김광식 상병은 종이를 하나 가지고 생활관으로 들어왔다.
“얘들아! 이번 분기 실적 떴다!”
“오? 그거 실적표냐? 이번에는 되게 빨리 나왔는데?”
“빨리 내놔 봐.”
실적표라는 말에 선임들이 저마다 김광식에게 몰려들었다.
실적표.
병사들의 실적을 숫자로 환상한 점수표였다.
헌터의 군생활 태도, 성실함, 던전에서의 실적, 훈련 성적 등 평가 항목은 10가지가 넘어갔다.
“아. 휴가 잘리지만 마라. 제발.”
“후. 이 정도면 안전빵이다.”
“어우, 난 아슬아슬한데.”
분대원들은 재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가며 자기 점수를 확인했다.
당연히 점수가 낮을수록 휴가 제한 같은 페널티가 걸리며, 높을수록 특별 휴가 같은 포상이 주어졌다.
“…그런데 이거 민준이 맞지?”
선임들은 김민준의 실적 점수표를 확인하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이놈 뭐든지 잘한다 싶긴 했는데, 이 정도였어?”
“몇 점이길래 그럽니까? 헉!”
“미쳤네. 이게 나올 수 있는 점순가?”
김민준의 실적 점수는 99점이었다.
병장 중에서도 실력이 좋다는 이승호가 70점 정도인 수준.
보통 헌터들의 평균 실적 점수는 50점에서 60점인 것을 감안하면, 괴물 같은 점수였다.
“야. 우리 소대가 헌터 기동 훈련 때 감점만 안 당했어도 만점이었겠는데?”
“민준이는 손은서 상병도 업고 왔는데, 가산점 1점 안 주나.”
“진짜 너 체력 하나는 타고났네. 훈련 내내 멀쩡했던 거 보면.”
선임들은 김민준의 점수표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상병 김민준. 감사합니다.”
“넌 포상 휴가 확정이겠는데? 어쨌든 네 덕분에 우리 소대가 덕을 많이 본다.”
정작 본인은 100점을 못 받은 것에 대해 살짝 아쉬워했지만.
‘1점 감점은 트랩 존에서 감점당한 거겠네. 그거 말고는 감점 요소가 없을 텐데.’
자신이 4년 주기로 시행되는 훈련까지 포함해 우수한 성적을 냈지만, 그것이 특별 진급으로 이어질지는 몰랐다.
‘특별 진급이라는 게 워낙 주관적이니까.’
확실한 건 위험한 상황이 터지고, 그것을 자신이 단독으로 막는 것.
‘아. 저번에 미들벳처럼 몬스터 떼거리로 안 나오나?’
김민준은 게이트가 팍팍 터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대장이 알린다. 2소대 2분대원들은 생활관에서 잠시 대기할 수 있도록.
헌터들이 생활관을 나서려 하는 사이, 안에서 대기하라는 김철민의 말이 울렸다.
“뭐지?”
“면담은 얼마 전에 했잖아.”
“근데 소대장님 목소리 들어 보면, 뭔가 기분 좋아 보이시는데?”
분대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단 안에서 대기했다.
달칵!
“김민준!”
“상병. 김민준.”
잠시 후, 김철민 중위가 들뜬 표정으로 안에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병장 계급장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