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자대-2
다른 일병들은 그런 상황이 익숙한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갑자기 또 뭐냐.’
수면 시간이야, 1시간만 자도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하니 별 상관은 없다만.
김민준은 순순히 상병을 따라 밖으로 향했다.
“너 오늘 막 자대 배치 받았으니까, 네가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 알려 준다.”
부대의 폐부품들을 모아 놓는 창고 안.
상병은 안에 들어가자마자,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야. 이런 건 그냥 생활관 안에서 말해 주면 안 되나?’
굳이 창고 안으로 데려올 이유가 없을 텐데.
“일단 일병까지는 생활관 안에서 지금처럼 정자세로 있으면 된다. 오락 시설 같은 경우는, 네가 다른 선임들에게 안 들킬 자신 있으면 들어가도 된다. 그리고….”
뭔가 싶었더니, 부조리에 관한 설명이었다.
‘저런 놈이 이 부대에 몇 명이나 있는 거지.’
눈앞의 상병은 앞으로의 행동에 있어, 주의해야 할 점들을 짚어 주었다.
신병에 대한 나름의 배려라고 한다.
‘이딴 게 배려야? 그냥 확 조져 버릴까?’
아니, 아니지.
저 부조리들은 예전부터 발생해, 부대 안에서 완전히 자리 잡아 버린 것들이다.
지금 자신이 저 상병을 괴롭힌다 하더라도, 부조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터.
“알겠습니다.”
“그래. 내가 말한 것들만 조심하면, 혼날 일은 거의 없을 거다.”
김민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자신은 이병이다.
‘지금은 참아 준다. 이병이니까. 병장 달고 보자고.’
이와 같은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김민준이 이스가르드에서 대부분의 힘을 소실한 채로 귀환했다는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던파라는 게임이 그의 포악한 성격을 순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고.
만약 김민준이 이스가르드에서 가졌던 스펙 그대로 귀환했다면, 일단 군부대부터 그의 손에 사라졌을 것이다.
‘와.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나 성격 되게 착해졌네.’
네오 플레이 회사가 없었으면 어떻게 될 뻔했냐, 대한민국아.
‘그런데 상병 놈아. 내가 참아 준다고는 했지, 너한테 아무 짓 안 한다고는 안 했는데?’
김민준은 밖으로 나가려는 상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침 좋은 실험 대상이 눈앞에 있다.
‘딱히 뭐라 한 건 없으니, 순한 맛으로 해 줄까.’
스스스-
그의 손에 검은 마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김민준은 상병을 대상으로 부패를 사용했다.
스스스-
희미하게 생성된 마기가 그의 복부로 스며들어 갔다.
‘마기 스텟이 낮아서 그런가, 눈에 보이지도 않네.’
현재로서는 그편이 더 나았지만.
‘이제 슬슬 반응 오겠네.’
삼. 이. 일.
“윽….”
김민준의 신호와 동시에, 상병의 얼굴이 일순간 구겨졌다.
“어우! 씁… 갑자기 배가 아프네. 너도 빨리 들어가서 자라. 나 어디 갔냐고 물어보면 화장실 갔다고 해 주고.”
“예, 알겠습니다.”
그는 두 손으로 배를 감싸며 창고 밖으로 나갔다.
“편히 주무십시오.”
넌 오늘 밤 고생 좀 할 거다.
물론 적당히 강도를 조절해, 순한 맛으로 해 줬다.
‘…그건 그렇고. 현재 위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스킬들이 약해진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약하니/얼마나 약해졌는지를 몸소 체감하고 나니/ 뭔가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전성기 시절의 부패는, 말 그대로 부패였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뭐든 썩어들어 가게 하는 엄청난 위력!
“지금은 배탈이 끝이네.”
김민준은 희미하게 일렁이는 마기를 집어넣고, 창고 밖으로 나섰다.
‘이제 시작이다. 실적이란 실적을 전부 씹어 먹고, 미친 듯한 진급 속도를 보여 주지.’
**
“뭐냐. 이놈은 어디 갔냐?”
생활관으로 돌아오자, 이승호는 자다가 중간에 깼는지 상병의 빈 침대를 쳐다보았다.
“아까 봤는데, 배가 많이 아프시다고 하셨습니다.”
김민준은 재빠르게 대답했다.
녀석은 화장실에서 고생 좀 할 것이었기에.
“그러냐? 알았다. 신경 쓰지 말고 자라.”
“예!”
이승호 병장은 별 터치가 없는 편이라고 한다.
그렇다기보다는, 후임들에게 무관심하다는 쪽이 정확하겠다.
‘훈련이나 일을 못 하면 미친 듯이 갈군다던데.’
그거야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으니 별 상관없긴 한데.
‘내 맞선임이 많이 혼난다고 했지.’
PX에서 먹을 것들을 왕창 사 주던 이동진 일병이 생각났다.
확실히, 그 녀석은 성격이 좋았다.
‘오늘 배치받았으니, 여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동안 지켜봐야겠네.’
**
오전 5시 40분.
헌터들의 기상 시간은 오전 6시였지만, 이병들은 20분 일찍 일어나 침대를 정리했다.
일병들의 기상 시간은 5시 50분.
‘쪼잔하게 10분 20분 가지고 생색내기는.’
미리 눈을 뜨고 있던 김민준도 일어나, 군복으로 갈아입고 대기했다.
지지직-
6시가 되기 무섭게, 스피커가 울리며 당직 사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2중대 소속 전 헌터, 훈련 준비를 갖추고 연병장으로 집합. 오늘부터는 단독 군장으로 집합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시불! 단독 군장이라고?”
“미친 부대. 왜 또 지랄이야.”
“장기 절대 안 한다, 진짜.”
상병장들은 단독 군장이라는 말을 듣자, 험한 말을 쏟아 내며 군복을 입기 시작했다.
자신이 속한 부대.
그러니까… 104사단, 무적 헌터 부대라고 했었나.
이곳은 훈련소에 있던 동기들이 절대 가지 말라고 했던 부대 중 하나였다.
최전방에 있어, 던전이 자주 발생하는 데다 몬스터가 심심하면 튀어나오는 것은 기본.
타 부대보다 훈련량이 3배 이상 많으며, 부조리도 가장 심하다고 했으니.
‘그 대신 실적을 빨리, 그리고 많이 낼 수 있지.’
추가 수당도 많이 받아 낼 수 있고.
김민준은 부패를 맞았던 상병의 얼굴을 슥 확인하고, 밖으로 향했다.
‘역시 마기가 부족해.’
그의 초췌한 얼굴을 보면 꽤 고생한 듯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10분 뒤.
연병장 앞으로 헌터들이 집합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본래는 가볍게 활동복을 입고 훈련을 시작하는데, 뜬금없이 단독 군장이라니.
당직 사관은 헌터들을 살핀 후, 새빨간 확성기를 가져와 입에 댔다.
“지금부터 아침 훈련을 실시하겠다. 간단한 인원 체크만 끝낸 뒤 출발할 수 있도록 한다.”
최신식 마이크에 스피커까지 있으면서 굳이 확성기는 왜 쓰는 건지.
“구보를 실시할 건데, 던전 3곳을 차례로 입장한다. 물론! 오늘부터는 긴급 상황에 대비해 단독 군장인 상태로 훈련에 임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말에, 병장 한 명이 나서서 질문했다.
“언제까지 단독 군장입니까?”
“오늘부터 전역할 때까지.”
“아….”
당직 사관의 말에,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퍼졌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니까, 따를 수 있도록 해라. 헌터군 훈련소에서 일어난 사고 때문인 듯하니까.”
아마, 빈 던전에서 튀어나온 몬스터 때문이겠지.
“자! 불만은 그만하고! 출발해라!”
당직 사관의 호령에, 단독 군장을 한 헌터들이 하나둘씩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부대였으면 빈 던전 한 곳을 돌고 나오면 끝이었지만, 무적 헌터 부대는 무려 세 군데나 돌았다.
동기들의 말대로, 정확히 3배의 훈련량이었다.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헌터군들은 던전에 대한 적응력을 기른다는 취지로, 구보할 때조차 빈 던전을 활용했다.
“이 개 같은 거. 아침부터 무거워 디지겠네.”
“아. 안 그래도 훈련 많아서 힘든데. 이젠 아침부터 굴리네.”
헌터들은 인상을 구기며, 갑작스러운 훈련 강도 증가에 불만을 쏟아 냈다.
‘이 정도야 편안하게 할 수 있지.’
김민준은 선임들의 뒤를 따르며 구보를 완료했다.
부대에 도착하기 무섭게, 선임들이 군장을 풀었다.
“아. 오늘 아침밥 꿀맛이겠다.”
“난 오히려 입맛이 없다. 어우.”
“야. 근데 너 괜찮냐? 얼굴이 창백한데?”
“어? 어어… 어제 배가 좀 아파서….”
“그러게 어제 좀 적당히 처먹지 그랬냐.”
김민준에게 부패를 맞았던 상병은 배를 문지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문제였나?”
구보를 마치고, 헌터군의 뷔페식 식당.
“크으… 이게 밥이지.”
김민준은 입맛을 다시며 반찬들을 양껏 펐다.
“어때. 내 말 맞지?”
어느새 다가온 이동진 일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헌터군 훈련소보다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게 타 부대랑 비교했을 때 좋은 점이지. 그리고 선임들도 식당에 대해서는 터치가 전혀 없어.”
그건 당연히 그래야지.
안 그래도 부조리가 많은데, 밥 먹을 때만이라도 건드리지 말아야지.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아. 먹으면서 들어. 오늘 오전하고 오후 전부 사격 훈련한다네.”
이동진은 훈련 내용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오전은 그냥 일반 사격. 오후는 특수 사격.”
후임들을 잘 챙겨 주는 선임은 이동진이 유일할 것이다.
다른 선임들은 김민준에게 일절 관심이 없었으니.
“여기는 원래 후임들 잘 안 챙겨 주더라고.”
“다른 부대도 그렇습니까?”
“아, 그건 아냐. 다른 부대들은 잘 챙겨 주는 거로 알고 있어.”
그렇단 말이지.
‘음… 여긴 최전방이고, 몬스터가 많이 나타나는 곳인데 오히려 서로 힘내자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언뜻 보면 이병이나 일병들에게 긴장감을 유지하라고 빡세게 굴리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냥 부조리다.
“아, 민준아.”
“이병 김민준.”
“나 좀 따라와 봐.”
“알겠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이동진 일병은 김민준을 데리고 창고에 들어갔다.
어제 상병이 데리고 간 장소와는 달랐다.
이전 창고는 폐부품들을 모아 놓는 곳이었다면, 이곳은 그냥 빈 창고였다.
“저기 총 있지? 저거 훈련용 모형 총인데, 사격 훈련 하는 데 약간은 도움이 될 거다.”
뭔가 싶어 따라와 봤더니, 오늘 있을 사격 훈련을 대비해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동진은 벽에 종이를 하나 붙인 뒤, 자신이 알고 있는 팁을 알려 주었다.
“영점 조절은 훈련소 있을 때는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거 없이 사격하거든. 쌩으로 하면 한 발도 맞추기 힘들어. 그랬다가는 너 선임들한테 엄청 혼날 테고.”
“그렇습니까?”
“그래. 넌 타이밍이 많이 나쁘네. 보통 신병 들어오고 나서 바로 다음 날 사격 훈련하는 건 드문데.”
“여기는 이용해도 되는 겁니까?”
김민준의 질문에, 이동진은 걱정 말라고 답했다.
“여긴 간부들도 신경 안 쓰거든. 선임들도 훈련에 관련된 거라면 웬만해서는 터치 안 하고. 그것보다 저기 가서 자세 잡아 봐.”
“알겠습니다.”
김민준에게 있어 사격은 껌이었지만, 순순히 이동진의 말을 듣기로 했다.
자대 배치 첫날부터 자신을 잘 챙겨 주었고, 사격 훈련 전에도 이렇게 연습할 장소를 제공해 주었으니까.
‘군대에서는 저렇게 성격 좋은 사람이 드물다던데.’
김민준은 엎드려 쏴 자세로 표적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티잉! 팅!
그러자 BB탄이 발사되며 표적지의 중앙을 여러 차례 두드렸다.
“잘 맞추네. 그래도 이게 모형이라서, 실제 총을 잡으면 느낌이 많이 다를 거야. 아직 훈련까지 시간은 좀 있으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알겠습니다.”
김민준은 이동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격을 계속 진행했다.
티잉!
이동진은 표적지 중앙을 귀신같이 적중시키는 김민준의 실력에 살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