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자대-1
‘뭐야. 저거 눈인가?’
바퀴를 확인해 보니 스노우 체인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금이 몇 월인데, 벌써 눈이라니.
“오래 기다렸겠네. 눈이 와서 천천히 오느라 조금 늦었다. 뒤에 타라.”
“이병 김민준! 알겠습니다.”
최전방이 아무리 힘들어 봐야 이스가르드만 하겠는가.
김민준은 편안한 마음으로 좌석에 올라탔다.
**
동기들이 자대로 떠나기 전, 김민준에게 남겼던 말이 있다.
강원도 철원에 너만 한 또라이들 많다, 거기 부조리 미친 듯이 많다, 훈련 강도도 미쳤다, 등등.
‘귀환했는데 입대 전날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냐고.’
지구로 귀환하면서 대부분의 힘을 잃었지만, 성격은 그대로였다.
즉, 현재 그에게는 개 같은 일을 견딜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선임이라도 한 번 잘못 때리면 영창에, 일반 군으로 배치된다고 했지.’
거기는 휴가도 6개월에 1번밖에 못 나간다는데.
밥도 더럽게 맛없고.
헌터군 생활에 익숙해진 그에게 있어, 일반군은 감옥이나 다를 바 없는 수준.
‘일단 참아야지 어쩌겠냐.’
이스가르드에서도 궂은일을 겪어 왔다.
지금 와서 참는 건 힘들겠지만, 그럴 때마다 이세계의 일을 떠올리기로 했다.
“신병 왔다. 밥 먹이고, 알아서 잘 가르쳐라.”
“예.”
“알겠습니다.”
간부가 생활관에 김민준을 툭 던져 놓고 사라졌다.
일병부터 시작해 상병, 병장 등등.
김민준은 수많은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충성! 이병 김민준입니다!”
“네가 오늘 온 신병이구나. 반갑다.”
“예! 감사합니다!”
“김민준? 얘가 그 훈련소 때 우수 병사였던 놈 아닙니까?”
“아. 그 겁나 큰 하운드 혼자서 잡은 놈?”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신병으로 온다고 듣긴 했는데, 소문인 줄 알았습니다.”
선임들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김민준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너 훈련소 성적 좋았으면 후방에 있는 부대 골라서 갈 수 있는데, 왜 와도 최전방으로 왔냐?”
“최전방이 실적을 가장 빠르게 쌓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야. 그거 때문에 왔다고? 진급 빨리하고 싶냐?”
“그렇습니다!”
김민준의 말에, 선임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달칵!
“야! 여기 신병 왔다며!”
“여기서 누가 제일 잘생긴 거 같냐?”
김민준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병장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야. 자대 가면 병장들이 너한테 몰려가서 누가 잘생겼냐고 물을걸? 백퍼다.’
‘거긴 최전방이니까 그거보다 더한 거 시킬 수도 있는데. 장기 자랑 같은 거 시키는 거 아냐?’
‘그게 언제 적 군대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 시킬 듯.’
훈련소에서 동기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귀신같이 딱 들어맞는 상황.
‘답은 없다고 했지.’
그렇다.
답은 없다.
그냥 눈치껏 기분 나쁘지 않게 대답을 잘해야 한다.
‘다 거기서 거기구만, 뭐.’
객관적으로 잘생겼다라는 말이 나오는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특히 제일 왼쪽에 있는 병장은 못생긴 메기를 닮았으니까.
“제 생각에는 이쪽에 계신 병장님이 제일 잘생기신 것 같습니다.”
“캬! 봤냐! 신병들이 3연속 나를 찝네! 보는 눈이 있구만!”
김민준의 말에, 지목당한 병장은 기분 좋은 듯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음으로 제일 못생긴 놈 한 놈 골라 봐라.”
“알겠습니다.”
김민준은 눈치껏 적당히 못생긴 병장을 한 명 지목했다.
‘메기를 찍었다가는 상처받겠지. 눈치껏이라는 게 어렵구만.’
그 뒤로 병장들은 김민준이 어디 출신인지, 여동생이나 누나는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예쁜지에 대해 물어 왔다.
신병들이 올 때마다 항상 해 왔던 질문이라고 한다.
“여동생이나 누나는 없습니다!”
“그래? 그럼 아는 여자분은 없냐? 너 대학교는 다녔을 것 아니냐.”
“전 고졸입니다! 대학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헌터군이라 해도 똑같은 군인들이다.
그들이 여자들, 특히 예쁜 여자에 집착하는 건 당연한 순리라는 말이다.
남자들만 있는 곳에서 자그마치 5년 동안 갇혀 있어야 하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에이 씨. 허탕이냐.”
“그럼 마지막으로 장기 자랑 하나 해 봐.”
“장기 자랑 말입니까?”
“그래. 네가 자신 있는 거 아무거나. 그렇다고 해서 진짜 아무거나 막 하면 우리한테 혼난다.”
장기 자랑이라.
훈련소 동기들 말이 귀신같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해야지 뭐 어쩌겠냐.’
김민준은 한 손가락으로 푸시업을 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얌마. 그게 뭔 장기 자랑이냐. 병장쯤 되면 충분히 할 텐데.”
재밌는 것을 기대한 병장들은 김빠지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해 봐라. 하는 거 보기나 하자. 그래도 이병이 하면 인정이지.”
“알겠습니다.”
김민준은 곧바로 한 손가락을 땅에 고정한 채로, 물구나무를 섰다.
그 상태로, 손가락 하나만을 이용해 푸시업을 시작했다.
“어….”
“저놈 뭐냐?”
병장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푸시업이 아니었기 때문.
김민준의 푸시업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손가락 하나로 저걸 한다고? 힘 스텟이 도대체 몇이냐?”
“저렇게 할 수 있는 애들 있냐?”
“어거지로 해 봐야 하나 정도밖에 못 할 것 같은데?”
병장들이 호들갑 떨며 말하는 사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그만하고 좀 꺼져. 나 피곤하다.”
뭔가 싶었더니, 훈련소에서 본 그 이승호 병장이었다.
‘훈련소 조교인 줄 알았더니,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김민준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이승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도 잠시.
“조교로 꿀 빨고 왔으면서 피곤한 척하기는.”
“애들 굴리고 오기만 하면 휴가받잖아. 너 얼마나 받았냐?”
“4일밖에 못 받았다. 그러니까 이제 좀 꺼져.”
“생각해 보니까 열 받네. 꿀 빨고 4일이나 받았다고? 이거나 먹어라.”
생활관 안에 들어온 병장들은 이승호에게 중지를 힘껏 치켜세우고 나갔다.
‘분위기가 좀 그렇네.’
잠시 후.
김민준은 생활관 안에 감도는 이질적인 분위기를 느끼고, 정자세로 침대 끝부분에 걸터앉았다.
일병 계급장을 단 다른 병사들 역시, 그와 같은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뭔 쌍팔년도 군대도 아니고.’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역시 세월이 지나도 군대는 군대라는 걸 느끼게 해 주는 광경이었다.
‘일단 일병까지는 금방 달겠고, 상병도 최대한 빨리 달아야겠네.’
다른 상병장들은 편안한 자세로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는 걸 보면, 일병까지는 행동 제약이 많은 듯했다.
“동진아!”
“일병! 이동진!”
잠시 후.
상병 한 명이 일병을 부르자, 침대에 정자세로 앉아있던 병사가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김민준은 오늘부터 네 맞후임이니까, 책임지고 교육시켜.”
“알겠습니다!”
이동진은 상병의 말에, 김민준을 데리고 생활관 밖으로 나갔다.
“뭐 좀 먹으면서 얘기하자. PX는 다른 선임한테 허락받아 놨어.”
“이병 김민준. 알겠습니다.”
뭐야.
PX도 마음대로 못 가?
그렇다는 것은, 군부대 내의 게임방 역시 이용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소리였다.
‘아. 개 같은 거. 곧 있으면 던파 이벤트 기간인데.’
어쩔 수 없지.
아껴 놨던 휴가권을 사용하는 수밖에.
“원래 일병들은 주말에만 PX를 이용할 수 있는데, 신병이 들어온 날이라면 평일에도 갈 수 있어.”
그밖에도 PC방은 상병부터 이용 가능, 운동 시설은 주말에 한해서 일병까지 이용할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미친놈들이네.’
계급을 올리기 위해서 꾸준한 단련은 필수다.
그런데 단련 시설을 주말에만 이용할 수 있다니.
평범한 병사들은 올릴 계급도 못 올리겠다.
간부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긴 한 건가?
“여기 부대가 부조리가 좀 많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김민준의 표정을 읽었는지, 이동진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 부조리, 병장 달면 바꿀 수 있습니까?”
“상병… 아니, 병장을 달아야 충분히 바꿀 수 있겠네.”
보통 같으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화를 낼 상황이겠지만, 이동진 일병은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지금 있는 부조리 대다수가 예전부터 있던 거라서. 쉽지는 않을 거야.”
“…그렇습니까.”
훈련소 동기들의 정보력은 정확했다.
전방일수록 부조리가 많다라.
적어도 이 부대는 정답이다.
‘내가 다 바꿔 주지. 기다려라.’
김민준은 자신이 병장을 다는 즉시, 군대 내의 부조리를 지워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병장 찍는 순간 싹 갈아엎어 버려야지.’
“오늘은 내가 다 살게. 부담 가지지 말고 막 사도 돼.”
PX에 도착하자, 이동진은 먹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고르라고 말해 왔다.
“정말 그래도 됩니까?”
“그래.”
“감사합니다.”
정말 사양이라는 걸 모르는 김민준은, 커다란 바구니를 양손에 안고 진열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진짜 시원하게 쓸어 담네.”
이동진은 30만 원이 넘게 나온 영수증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도 김민준이 시원하게 먹는 모습을 보니,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동진 일병님도 드십쇼. 제가 넉넉하게 샀습니다.”
“난 커피면 돼.”
그는 김민준의 옆자리에 앉아, 앞으로의 훈련 일정 및 행동 지침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저 녀석은 성격이 좋네.’
이동진은 김민준이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하면, 그 이상으로 상세한 내용을 알려 주었다.
“이동진 일병님은 군 생활 몇 년이나 하셨습니까?”
“나? 이번으로 4년 차긴 하네. 4년 차에 일병이라는 말 들으니까 한심하지?”
“아닙니다. 후임에게 굉장히 친철하시고, 평소에도 성실하실 것 같습니다.”
“말이라도 고맙네.”
이동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남은 커피를 들이켰다.
실제로 상병조차 달지 못하고 만기 전역하는 헌터들의 수는 적지 않았다.
그만큼 진급 시험이 어렵다는 말이다.
물론 수당이야 연차가 쌓일수록 올라간다.
그것보다, 낮은 계급의 병사가 자신의 선임이 되는 일이 발생하면 겪게 되는 자괴감이 장난 아니겠지.
‘열심히만 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니까.’
특히나 헌터는 더 그렇다.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스텟의 차이부터가 성장의 격차를 벌리게 되니까.
“이제 슬슬 일어나자. 내일 사격 있으니까, 준비 잘하고.”
“알겠습니다.”
김민준은 이동진의 뒤를 따라 부대로 향했다.
‘이병은 왜 이렇게 제약이 많아?’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화장실에 갈 때뿐, 이외에는 어딜 가든 선임과 함께해야 한다니.
‘진급 시험은 다음 주라고 했지.’
앞으로 일주일만 더 참자.
**
밤 10시 정각.
간단한 청소를 마치고, 취침 준비를 하는 시간.
“먼저 잔다. 내일 사격 있으니까 헛짓하지 말고 자라.”
“예. 편히 주무십시오.”
일과 후가 비교적 자유롭고 개방적인 헌터군이라도 해도, 기본적인 일과는 일반 군대와 똑같다.
새벽에 경계 근무.
일정 주기마다 훈련과 함께, 던전 클리어.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들이지 않는다면, 임무들을 효율적으로 수행해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 이걸 언제까지 참아야 하냐.’
물론 김민준은 예외였다.
속으로 툴툴대며 침대에 몸을 눕힌 것도 잠시.
“김민준. 따라 나와.”
상병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