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짓말-123화 (123/123)

거짓말 - 3부 48편

집으로 돌아온 재중은 피곤한 몸을 주무르며 샤워를 했다. 사계절 아무 때나 틀면 뜨거운 물이 나오니 정말 편하다.

언제나 그렇듯 창민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샤워를 끝낸 재중은 아침에 먹었던 식기를 씻고

다음날 먹을 쌀을 얹어놓은 후 곧장 방으로 달려가 이불을 깔고 그 안에 드러누워 책을 꺼냈다.

제빵에 관한 책이다. 어차피 대학은 포기했으니 기술이라도 배워볼까, 하고 시작한 공부다.

먹는 음식을 하면 최소한 굶지는 않겠지, 하는 소박한 생각에 시작했지만 생소한 분야라 이것저것 할 것이 많다.

우선 이론적인 것을 알아두기 위해 저번에 공부해두었던 부분을 간단히 복습하려 했던 재중은

그러나 몇 페이지 읽기도 전에 그만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재중은 갑자기 난폭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누구지?

저번처럼 술 취한 옆집 아저씨가 집을 잘못 알고 두드리는 걸까.

재중은 한숨을 내쉬며 급히 밖으로 나왔다. 현관까지 가는 짧은 거리동안 문은 계속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 나가요! ”

술 취한 사람이 말을 알아 들을 리 없겠지만 우선 답답한 마음에 소리친 재중은 급히 자물쇠를 열려 했다.

하지만 언제나 속을 썩이던 자물쇠가 오늘따라 더욱 열리질 않는 것이다.

낑낑거리며 몇 번씩 달그락거리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멈춰버렸다.

“ 비켜. ”

문 건너편에서 나직하게 울려온 음성에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물러섰던 재중은 다음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 목소리는 설마……

콰당―

엄청난 소음과 함께 문이 그대로 나가 떨어져버렸다.

멍하니 덜렁거리는 문을 바라보았던 재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밖을 보았다.

그는 급히 달려온 듯 어깨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언제나 단정하게 넘겨져 있던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지고,

안색은 파리하게 질린 채 셔츠는 구겨지고 넥타이는 비뚤게 매어 반쯤 내려와 있다.

내가 아직도 꿈을 꾸는 걸까……

재중은 멍하니 생각했다.

바보구나, 나는. 그 완벽한 사람이 저런 모습일 리 없는데.

게다가 그 사람이 저런 모습으로 내 앞에 설 리 없잖아. 내게 와 줄 리가 없잖아.

환상조차 제대로 된 모습을 보지 못하니 어떻게 된 걸까.

“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

환상이 말을 했다. 하지만 사과의 말을 하다니 더더욱 현실감이 없어서 재중은 그것이 정말로 환상이라고 단정지었다.

“ 어쩐 일로…… ”

“ 좀 들어가도 될까? ”

“ ……그래요…… ”

어차피 환상인 걸, 하고 재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호는 그 새 밖으로 나와 힐끔거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재중은 그가 들어온 후에 낑낑거리며 문을 제 위치에 두려고 애썼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윤호가 아무 말 없이 등뒤에서 나타나 문을 대충 끼워 넣는다. 그 바람에 몸이 스쳐 재중은

다시금 의혹에 빠지고 말았다. 환상에 실체가 있을 리 없는데, 꿈 치고 참 생생하기도 하다.

거실이라고는 해도 가구 하나 없는 썰렁한 마루일 뿐이라 윤호와 재중은 바닥에 마주 앉았다.

이왕 꿈이면 방석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하고 재중은 문득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의 환상은 정말 희한하다. 윤호가 저런 모습인 것도 생소하지만

저런 모습으로 이렇게 초라한 집의 마루에 앉아있으니 저렇게 안 어울리는 모습은 또 없을 것이다.

“ ……잘 지냈나? ”

윤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재중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다행이야. ”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참 이상한 일이다. 꽤나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떠오르는 것이 없을까.

윤호는 자신의 머릿속이 이렇게 텅 비어버린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 살기는…… 어떤가…… ”

“ ……그럭저럭…… ”

재중은 입안이 바싹 마르고 초조해져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또 무슨 말로 나를 헤집어 놓으려고. 듣고 싶지 않아. 환상에서조차 당신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깍지끼고 있던 두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었다. 재중은 슬쩍 바지에 손바닥을 문지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창민이는…… 자주 다녀가나? ”

꿈에서조차 저 사람은 나에 대해서 좋게 생각해주질 않는구나.

“ 갈 곳이 없어서 얹혀사는 거지 다른 건 없어요. ”

말투가 딱딱하게 새어나와 재중은 고개를 푹 숙였다.

바보야, 나는.

그렇게 비참한 꼴을 당하고도 저 사람을 보면 이렇게 또 심장이 아프다니.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정신을 차리려는 걸까.

“ ……그래…… ”

“ …… ”

“ 그럼, 나한테 오지 않을래? ”

재중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또 이런 상황인 건가. 재중은 어이가 없었다.

“ ……나를 사겠다는 의미인가요? ”

차갑게 흘러나온 음성에 윤호가 미간을 찌푸린다.

“ 그래서, 당신의 그 구역질나는 돈으로 얼마에 나를 살 건데요? ”

“ 그런 얘기한 적 없어. ”

“ 결국은 그런 얘기잖아! ”

재중이 격렬하게 내질렀다. 윤호는 놀란 얼굴로 재중을 바라볼 뿐이었다.

“ 당신은 항상 그랬잖아요, 난 당신에게 언제나 남창일 뿐이었어, 단 한 번도 당신은 내 이름조차 불러준 적이 없고,

제대로 나를 보아준 적도 없고, 내 얘기를 들어준 적도 없잖아요.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난 당신에게 있어서 그저 남창일 뿐이었잖아!

그리고 당신은 나를 아예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고 얘기했었잖아!! ”

말을 하는 도중에 점차 고함을 지르게 된 재중은 결국 다시 울어버렸다.

“ 나가요,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당신은 환상에서조차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고,

아프게 하고, 얼마나 나를 망쳐놓아야 속이 시원해? 이제 됐잖아,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

더 이상 내게 뭘 바라는 거야? 내가 죽기라도 바라는 거야 당신은? 정말 그래? ”

“ 그게 아니야……! ”

크게 흐느끼던 재중은 격렬한 윤호의 음성을 들음과 동시에 거칠게 그에게 손을 붙잡혀 안겨버렸다.

윤호의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재중은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기 시작했다. ……환상이…… 아니었나?

“ 죽다니, 그렇지 않아. 나는…… 내가 원했던 건…… ”

억눌린 신음소리같이 윤호가 말했다.

“ 나는 단지, 네가 살아주기만 바랬어. 내가 아니어도, 어디에서라도,

네가 살아만 있어주면 그것이라도 좋다고…… 나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 그래서 너 또한, 그렇게 내 곁을 떠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랬기 때문에…… ”

“ …… ”

“ 인정해, 모두 내가 솔직하지 못한 탓이야. 정말 원했던 것은 너뿐이라고,

다른 건 필요 없다고 얘기했어야 했는데…… 그래서 지금까지 너를 상처 입히고…… 돌이킬 수 없이 여기까지 와버렸어. ”

믿을 수 없어. 재중은 자신을 끌어안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는 윤호의 고백을 들으며 멍하니 생각했다.

이건 사실이 아니야. 당신이 내게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어. 당신의 이 말들은 모두,

나를 사랑한다는 말 같잖아……

“ 믿지 않지? ”

윤호가 속삭였다. 재중은 대답하지 않았다.

“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내 말을 믿겠어? 말해 봐, 내가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고는 말하지 않겠어.

하지만 조만간 모두 되살릴 수 있을 거야. 그 때는 지금보다 더 납득하기 쉽게 설명할 수 있을 테니까…… ”

그는 무척 초조한 기색이었다. 천국과 지옥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서 판결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한참만에 재중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똑바로 윤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 약속해요. ”

이를 악물었지만 그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나온다.

“ 다시는 나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

“ 약속해. ”

윤호의 대답에 재중은 다시 말했다.

“ 다시는 내 이름……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

“ 약속해. ”

숨소리가 점차 격렬해지더니 재중은 얼굴을 가리고 넘치는 눈물을 닦아내며 흐느꼈다.

“ 나 모른다고…… 외면하지 않을 거라고…… ”

“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

윤호가 속삭이며 재중의 손을 붙잡아 내려 얼굴을 들여다본다. 눈물로 흠뻑 젖어 흐느끼는 재중을 바라보던 윤호가

흘러내리는 눈물에 입을 맞추었다. 열이 오르는 눈꺼풀에 키스를 남겼던 윤호가 고개를 숙여

재중의 입술에 입을 맞대었다. 맞닿은 키스에서 짠맛이 난다. 떨리는 손을 들어 윤호의 목을 끌어안았다.

곧장 질러 들어오는 혀를 받아들이며 재중은 아련하게 자신이 이 키스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깨달았다.

막 재중의 셔츠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던 윤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 잠깐만, 여긴 바닥이 차잖아. ”

“ ……에…… ”

괜찮아요, 하고 말할 겨를은 없었다. 윤호는 곧장 재중을 안아 들더니 한 바퀴 시선을 돌렸다.

역시 저기가 방이에요, 하고 말할 틈도 없이 윤호가 단번에 방이 있는 곳으로 향해 걸어간다.

재중을 안은 채로 어깨로 문을 밀고 들어간 윤호에게 재중이 조금 불쾌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꽤 많은 상대와 지냈던 모양이에요, 처음 온 집에서 이렇게 쉽게 자는 방을 찾고. ”

비록 50%의 확률이지만 틀리지도 않고 한 번에 찾아 들어온 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듯 말한 재중을

이불 위에 내려놓으며 윤호가 그의 콧등에 키스를 했다.

“ 과거는 묻는 게 아니야. ”

“ 불리한 과거인 거죠? ”

윤호가 피식 웃었다.

“ 야옹, 하고 울어 봐. ”

순간 재중이 하얗게 질려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을 향해 밝게 미소짓는 윤호의 모습이 이렇게 두려울 수가 없다.

하필이면.

“ 기, 기억을 모두 되찾은 건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

재중의 떨리는 음성에 윤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 맞아. 그런데 갑자기 누워있는 너를 보니까…… ”

“ 보니까? ”

“ 갑자기 네 울음소리가 듣고 싶어졌어. ”

“ …… ”

재중은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 윤호에 의해 더 이상 말을 물을 수가 없었다.

조만간 모든 기억을 찾으면, 이라고 말했을 때는 사실 기뻤는데, 단 하나 달갑지 않은 기억을 잊고 있었다.

다시 입술로 돌아온 윤호의 키스를 받아들이면서 재중은 기도했다.

부디, 부디, 고양이 놀이만은 기억해내지 말아주길.

** 거짓말 - 뒷이야기

창으로 스며들어오는 아침햇살이 따갑다. 재중은 무의식중에 햇살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파묻었다가

뒤늦게 흠칫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시선을 올리니 윤호의 잠든 얼굴이 거기 있었다. 처음 본다.

이 사람의 자는 얼굴.

속눈썹이 굉장히 길구나.

재중은 홀린 듯 멍하니 한참동안 윤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길고 가늘어 날카로운 눈매가 감겨져 있으니

훨씬 이미지가 부드럽게 변했다. 새까만 속눈썹이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곧은 라인을

그리는 콧대와 섹시한 입술까지. 나, 저기 키스했는데…… 그것을 떠올리자 재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그렇지. 이 사람 일어나면 커피 마셔야 하는데……

집에 원두커피는 고사하고 커피믹스마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재중은 허겁지겁,

그러면서도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일어났다. 허리에 감겨져 있는 윤호의 팔을 아주 조심조심 떼어낸 재중은

욱씬거리는 허리를 겨우 추스리며 엉금엉금 기어 옷가지를 걸쳐 입었다.

겨우 걸쳐져 있는 문을 힘겹게 움직여 밖으로 나온 재중은 쏟아지는 아침햇살에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크리스마스는 어제였는데, 오늘이 정말 그 날 인 것 같다.

“ 메리 크리스마스. ”

작게 속삭인 재중은 문득 건우를 떠올리고 조금 표정이 슬퍼졌다.

미안해, 건우야. 나 지금 굉장히 굉장히 행복해.

하지만 그래도, 너 잊지 않을 테니까 용서해 줘……

“ 메리 크리스마스. ”

작게 혼잣말로 건우에게 속삭인 재중은 할 수 있는 최대속도로 슈퍼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피리리릭, 피리리릭.

……시끄러워.

윤호는 짜증이 났다. ……전화벨소리……

전화를 받기 위해 손을 더듬었던 윤호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놀라 일어나 앉았다.

초라하고 작은 방이 한 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방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붙박이장과 급히 벗어 던졌던 자신의 옷,

그리고 자신뿐이다.

어떻게 된 거지.

전화벨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윤호는 전화를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망연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내가 꿈을 꾼 건가? 아니면 미치기라도 했나?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은 생소한 방의 풍경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럼, 또 다시 떠나버린 건가?

윤호의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으로 치달아갈 뿐이었다. 이제 겨우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이제 또다시 너를 찾아서 헤매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하지.

한동안 패닉에 빠져있던 윤호는 급히 일어나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떠난 지 얼마 안 됐을 수도 있어. 빨리 나가서 찾아봐야……

전화는 어느새 끊겨 있었다. 윤호는 던져진 코트를 제대로 입지도 않고 손에 든 채 급히 방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하지만 그는 현관까지 가지도 못한 채 멈춰서고 말았다.

끼익, 끼익.

부서진 현관문을 붙잡고 재중이 낑낑거리고 있었다. 조금 움직였는지 그 사이로 어떻게든 들어와보려고 애썼지만

역시 무리다. 나가는 건 어떻게 나갔을까.

윤호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어주자 재중이 급히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 가버린 줄 알았어. ”

“ 예? ”

윤호의 중얼거림에 재중이 놀란 얼굴을 한다. 윤호가 문을 다시 끼워맞추고 피식 웃었다.

“ 눈 떠보니까 없길래, 또 사라진 줄 알았지. ”

“ 설마…… ”

재중은 소중하게 품에 안고 온 리필용 커피봉지를 내밀어보였다.

“ 집에 커피가 없어서 사러 갔다 왔어요. ”

“ 이런 건 됐으니까 불안하게 만들지 마. ”

“ 이런 건이라니…… ”

막 항의하려던 재중을 윤호가 끌어안았다.

“ 이번에도 사라져 버렸으면 어떻게 찾아야하나, 정말 암담했어. ”

윤호의 편안한 심장소리를 들으며 재중은 얼굴이 붉어졌다.

“ 그런 일은…… ”

윤호의 음성에 미소가 실려 있었다.

“ 이번에 다시 찾으면 그 때는 도망치지 못하게 묶어놔야겠다고 생각했지. ”

“ 당신이 지긋지긋해서 떼어내려고 해도 이젠 떨어지지 않을 걸요. ”

재중이 대꾸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

“ 죽음조차 쉽게 갈라놓지는 못할 걸. ”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난 후 재중이 웃었다.

“ 따라죽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네요. ”

“ 너는 안 그래도 나는 그렇게 해. ”

농담이었는데 진지한 대답이 돌아온다. 재중이 무안해져서 입을 다물자, 윤호가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꽤 진한 키스가 될 거라고 상상하면서 눈을 감았을 때, 타이밍 좋게 누군가 세게 문을 두드렸다.

콰당―

“ 이런 제길! ”

떨어져버린 문을 어깨로 받치고 욕설을 내뱉는 창민을 재중은 야속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필. 조금만 늦게 올 것이지. 윤호 역시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닌 듯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재중을 놓아주었다.

“ 뭐야, 아침부터. ”

창민이 기대고 있는 문을 들어올려준 윤호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 사이 안으로 들어온 창민이 투덜거린다.

“ 네가 전화를 안 받길래 걱정돼서 온 거잖아. ……보아하니 걱정할 필요 없었던 것 같지만…… ”

시선이 마주치자 재중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윤호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 확인했으니까 이만 돌아가 줘. ”

“ 큰 소리는. 이 문 네 짓이지? ”

“ 나중에 비서한테 청구해. ”

“ 잘난 놈. 됐어. 아침이나 주라. ”

“ 왜 아침을 여기서 먹어? ”

“ 밥 한 끼 가지고 정말 치사스럽구나, 정윤호. ”

불꽃이 튀기는 둘의 사이에 급히 재중이 끼어 들었다.

“ 자, 잠깐만요! 밥 차릴께요, 금방 해요. 잠깐만요…… ”

그리고 재중은 둘 중 누구하나 말릴 틈도 없이 냉큼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윤호가 창민을 노려보았다.

“ 너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줄 알아. ”

“ 있는 놈이 더하다더니 구두쇠 녀석. ”

“ 너한테는 보여주는 것도 아까워. ”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새는 줄 모른다더니, 딱 그 짝이다. 창민은 윤호를 바라보며 낮게 혀를 찼다.

완전히 맛이 갔구나. 전날 쌀을 얹어놓은 탓에 금새 밥이 되었다.

해두었던 반찬 몇 가지를 꺼내놓은 재중은 초라한 상이 너무 창피해서 팔짱을 끼고 잠시 그것을 노려보았다.

하다 못해 계란 프라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계란마저 떨어져 버렸다.

있는 거라곤 김치랑 수퍼에서 사온 나물 반찬 몇 개가 전부. 머리를 쥐어뜯던 재중은 뒤늦게 가게에서 얻어왔던

케익을 생각해내고 급히 세 조각을 잘라서 올려놓았다. 밥과 케익이라니,

뭔가 굉장히 안 어울리지만 그래도 일단 상이 풍성해보이고 화려해져서 조금 위안이 된다.

이틀 정도 지났지만 괜찮겠지. 재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영차, 하고 상을 들었다.

“ 식사하세요! ”

크게 소리친 후 낑낑거리며 상을 내오자 창민과 윤호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 너, 저거 받아들어. ”

윤호가 손으로 가리키자 창민이 기가 막힌 얼굴이 되었다.

“ 넌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냐? ”

“ 불청객은 손님이 아니야. 뭐해? 어서 받아들지 않고. ”

발로 걷어찰 듯한 기세에 창민은 얼떨결에 재중에게서 상을 빼앗아 들었지만 곧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길, 이러려던 게 아닌데. 사실 그가 굳이 아침을 먹고 가겠다고 한 것은 행복해서 죽을 것 같은 얼굴의

이 커플의 시간에 잠시나마 찬물을 끼얹고 싶다는 소박한 속셈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기세로는 먹고 나면 설거지까지 시킬 것 같다. 결국 예상한 대로 식사가 끝나자마자

부엌으로 쫓겨난 창민은 이를 부드득 갈며 생각했다.

내가 다시는 저 녀석을 상종하나 봐라.

윤호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창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호가 놈은 정말 얄밉지만

재중이 행복해 보여서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래 그래, 이건 저 놈이 아니라

그 애를 위해서니까 하고 마음을 달래고 설거지를 했지만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윤호는

팔짱을 끼고 역시 얄밉게 한 마디 한다.

“ 다 했으면 가. ”

싸가지 없는 새끼. 창민은 들고 있던 행주를 윤호의 얼굴에 던져버리려다가 뒤이어 나타난 재중을 보고 애써 참았다.

“ 정말 하셨어요? 죄, 죄송해요. 다음에 제가 정식으로 식사 대접할께요…… 오늘은 집에 먹을 게 없어서…… ”

음, 저래서 난 저 애를 좋아하는 것 같다, 하고 창민은 생각했다. 얼마나 예의도 바르고 착한가. 거기에 비하면 저건…… 어쩌다 저런 놈하고 친구가 됐지, 하고 창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호는 흥, 하고 고개를 돌린 후 재중에게 말했다.

“ 짐은 다 쌌어? 나가자. ”

“ 짐이라니? ”

윤호는 또다시 끼어드는 창민에게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 그럼 네 집에 언제까지나 있게 내버려둘 것 같아? ”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재중에게서 가방을 빼앗아들고 재중의 손목을 잡아끌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윤호의 뒷모습을 창민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 해도해도 너무한다. 창민은 뒤늦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야! 정윤호! 너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이번까지만 참아주는 줄 알아! ”

윤호는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지만 재중은 급히 뒤를 돌아보더니 소리쳤다.

“ 고마워요, 창민씨! ”

활짝 웃는 그 얼굴에 다시금 화가 식어버렸다. 창민은 잠시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다가 결국 머리를 긁적였다.

“ 뭐,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 ”

윤호가 차문을 열어주고 편안한 시트에 깊숙이 앉은 재중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가 운전석에 앉기를 기다렸다.

안전벨트를 매고 나자 윤호가 차를 출발시킨다.

“ 길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

“ 저, 우선 사거리 쪽으로 가셔서요…… ”

지금 윤호와 재중은 인찬이를 데리러 가는 길이다.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자마자

고개를 끄덕여준 윤호에게 재중은 감사의 말을 했다. 함께 살 수 있다는 걸 알면 인찬이가 얼마나 기뻐할까

. 문득 저번에 인찬이를 만났을 때 그가 묻지도 않고 길을 찾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재중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 생각을 접어버렸다.

기억을 모두 해내지 못하면 또 어때. 힘들었던 일 따위 모두 잊어버리고, 앞으로 행복하면 되는 거잖아.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이니까.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제 앞으로 더 이상 크리스마스를 아파할 일은 없겠지.

당신이 함께 있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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