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3부 47편
어두운 바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다보니 여기저기 커플들로 즐비한 가운데
창민과 윤호는 머쓱하게 나란히 앉았다.
“ Tullamore Dew로. ”
아이리쉬 위스키(Irish Whisky)를 시키는 윤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창민도 뒤따라 주문을 했다.
둘은 술이 나올 때까지 잠자코 침묵했지만 내심 창민은 윤호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조바심이 났다.
“ 할 얘기가 뭐야? ”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낸 창민을 무시하고 윤호는 먼저 술을 한 모금 입에 넣었다.
“ 너한테밖에 물을 데가 없어. ”
“ 뭘? ”
“ 도대체 지난 1년 동안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고개를 돌려 똑바로 노려보는 윤호의 시선을 마주본 창민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 무슨 일이라니…… ”
목소리가 떨리는 바람에 모른 척 시침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을 깨닫고 창민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윤호가 계속해서 말했다.
“ 뭔가가 있었지? 벌써 몇 달째 내 주변에는 알 수 없는 일들 뿐이야. 도무지,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질 않나, 아파트에 난데없이 나 이외 누군가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고,
그런데 물어보면 다들 얘길 안 해.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다들 짜기라도 했어? 왜 당사자인
내게 말을 안 하는 건데? ”
“ …… ”
창민은 침묵하며 술만 들이켰다. 식은땀이 흘렀다. 저렇게 흥분한 윤호의 모습을 본 것은 오랜만이다.
재중의 일 이외에 저런 격렬한 반응을 내비치는 것은. 지영이 그 동안 그에게 꽤 큰 위치가 되었던 걸까,
하고 생각했던 창민의 예상은 다음 윤호의 말로 보기 좋게 빗나갔다.
“ 제기랄, 모두 다 엉망이야. 믿을 수 있어? 결혼까지 하려고 했던 여자가 저 지경이 되어서 누워있는데,
나는 정작 떠오르는 거라곤 그 자식 얼굴뿐이라고. ”
홧김에 술을 들이키듯 맛을 음미하지도 않은 채 단숨에 마셔버리는 윤호를 보고 창민은 눈을 깜박였다.
“ ……기억이…… 돌아온 거야? ”
“ 그렇지 않으니까 네게 묻는 거잖아. ”
창민은 윤호의 말에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심난해졌다.
“ 기억도 돌아오지 않았으면서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
윤호는 한동안 자신의 글래스를 노려보았다. 가라앉는 얼음을 한참동안 응시하던 윤호가 겨우 입을 열었다.
“ 이상해, 난 분명히 그 애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째서 이렇게 잊혀지지가 않는 건지…… ”
“ …… ”
“ 돌아보면 언제나 그 애가 있어. 나를 향해서 항상 울고만 있어. 꿈에서조차 나를 놔주지 않아.
그 애는 나한테 뭘 바라는 거지? 왜 아무도 그 애에 관해서 얘기하지 않는 거야? 나는…… ”
그 애가 보고 싶은데.
윤호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보고 싶다고? 어째서? 내가 그 애에 대해서 뭘 알아서? 자꾸 생각나고, 떠오르고, 그것뿐이잖아.
그러니까 조바심내지 말고 기다리면 모두 괜찮아질 텐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거라 생각했던 그 찰나의 기억이 어째서 날이 갈수록 이렇게 심장을 아프게 할까.
“ ……그 애를 사랑해? ”
“ ……? ”
윤호가 순간 고개를 돌렸다. 창민은 윤호를 외면한 채 중얼거렸다.
“ 그 때도 난 너에게 그렇게 물었었지. 하지만 넌 그렇지 않다고 했어. ”
“ …… ”
“ 이제 그 애는 모두 정리하고 마음 편히 살고 있어. 몸은 고되더라도, 그 때처럼 울지는 않아.
너, 이번에는 정말 자신 있어? ”
“ …… ”
“ 네가 다시 또 그 애를 찾아가서 그걸 모두 망쳐놓는 건 내가 우선 바라지 않아.
너 때문에 몇 번이나 그 애가 상처입고, 아파하고, 울어왔는데, 더 이상 그 애를 울리지 않을 자신이
정말 있는 거야? ”
“ …… ”
“ 네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건, 어쩌면 본의인 게 아니야? 그 애를 책임지는 것이 두렵고,
사랑하는 자신을 인정하기 싫어서 도망친 게 아니냐고? ”
“ …… ”
“ 넌 비겁한 자식이야, 정윤호. ”
창민이 경멸하듯 이를 갈았다.
“ 너 혼자 편하기 위해서 달아난 것밖에 얘기가 되지 않잖아. 마음껏 걔 인생을 난도질해놓고,
마음을 상처 입히고, 너는 모든 걸 잊었다고 말하면 다인 거지. 그래놓고 이제 와서 그 애를 찾겠다고? 말이 돼? ”
“ ……그게 아니야…… ”
힘없이 중얼거리는 윤호에게 창민이 계속해서 몰아세웠다.
“ 그게 아니야? 뭐가 아니야? 그래서 달라진 게 뭐가 있어? 결론은 같아, 정윤호.
네가 그 애를 망쳐놓고 넌 편안히 도망가 숨어버린 거야. 그게 전부야. ”
윤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머리가 아프다. 왜 이렇게 속이 울렁거릴까.
“ ……나는…… ”
뭔가가 생각날 것도 같은데 그게 도대체 뭘까. 왜 너는 항상 울고 있을까.
왜 나는 네 웃는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지?
……어쩌면 너는, 단 한번도 내게 웃어주지 않았던 걸까.
내가 항상 너를 울려왔던 걸까. 그래서 넌 항상 울면서 나를 바라보는 거야? 그래서 나를 놓아주지 않는 건가……?
윤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린다. 급히 나가려는 윤호의 어깨를 창민이 붙잡았다.
“ 기다려, 어딜 가려는 거야? ”
“ ……찾아야 해…… ”
멍하니 중얼거린 윤호의 눈에는 초점이 없다.
“ 찾아서 어쩌려구? ”
창민이 묻는다. 하지만 윤호는 그것에 대해서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단지 그를 찾아야한다는 생각뿐이다.
찾아서…… 그래, 찾아서 어떻게 할까.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그를 보게 되면 알 수 있을까.
단지 먼 발치에서라도 그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모두 알 수 있을까.
“ ……이거 놔. ”
한참만에 윤호가 겨우 중얼거렸다.
“ 네가 상관할 일 아니야. 난 어떻게 해서라도 그 녀석, 찾아낼 거야. 그 뒤 어떻게 할 지는 내가 결정해. ”
“ 넌 항상 그런 식으로 그 애를 망쳐놓은 거야! ”
“ 네가 뭘 알아! ”
난 이런 식으로밖에는 사랑하지 못해. 타인을 속이고, 나를 속이고, 그렇게 안도하면서, 그렇게 밖에 하지 못해.
나는 이렇게나 겁쟁이니까.
“ 그 애를 기억하지도 못 하잖아! ”
창민이 소리쳤다. 윤호는 잠시 창민을 바라보다가 한풀 기가 꺾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머리는 잊었어도 심장이 잊어주질 않아…… ”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심장이 무너지는데…… 어떻게 그를 버릴 수 있을까.
미안해.
내가 너를 망쳤어. 내 이기심으로 모두 망쳐버렸어. 단지 너를 잃고 싶지 않아서,
그게 전부였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그토록이나 너를 원했었는데.
내가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너를 잊을 수가 있을까……
창민은 한참동안 멀거니 윤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
“ ……재개발을 하려던 연립이 하나 있어. ”
“ ……? ”
“ 주소를 알려줄게. 좀 있으면 아르바이트 끝날 시간 되니까 너 갈 때쯤이면 있을 거야.
크리스마스라서 늦게 끝났을 테니까…… ”
그리고 창민은 펜과 종이를 꺼내 간단히 주소를 적어 윤호에게 내밀었다.
윤호는 잠시 주소를 읽어보는 듯 하더니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급히 달려나갔다.
남겨진 창민은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 짝사랑의 화려한 종말이로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