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3부 46편
이틀째 내리는 눈 때문에 도로는 온통 아비규환이었고 그것을 핑계로 한가로이 집안에 남겨져 있던
윤호는 커피를 마시며 몽롱한 머릿속을 헤매이고 있었다. 전날 다녀간 청소 용역이 적어두고 간 쪽지도 신경이
쓰인다. 쓰지 않는 방이어서 제대로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
상표도 뜯지 않은 옷들이라 손질하면 괜찮을 듯 싶어서 그대로 두었습니다 ”
하고 뭔가 불쾌한 감정이 묻어있는 쪽지를 두고 간 것을 보고 윤호는 의아한 얼굴로 그 방을 열
어보았다가 놀라 멈춰서고 말았다. 자신의 삭막하기까지 한 방과는 상반되게 파스텔 계열의 색채로
도배가 되어 있는 그 방은 가구부터 시작해서 창가의 화분들까지 전혀 적응이 안 되는 분위기였다.
그나마 화분은 2-3일에 한 번 오는 청소 용역에서 말라 죽어가는 것을 불쌍히 여겨 돌봐주기라도 했는지
아직 살아있긴 했지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누렇게 시들어 있었다. 설
마, 하고 옷장을 열어봤던 윤호는 그 안에 즐비하게 걸려 있는 옷가지들을 보고 급히 그것들을 끄집어내었다.
상표조차 뜯지 않은 옷들이라면 이걸 의미한 걸까.
“ ……짐을…… 쌌는데…… 저번에 사주신 거…… 조금 들고 나왔어요…… 옷도 없고 짐도 없어서
…… 급한 것만…… 조금…… 다음에 갚을께요…… ”
“ 안 입은 건…… 옷장에 그대로 뒀는데…… 다른 것들도…… ”
윤호는 한동안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금 그 애는 어디에 있지?
피리리릭, 피리리릭.
순간 윤호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 네, 정윤호입니다! ”
자신도 모르게 날카롭게 새어나온 음성에 상대방은 느긋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 오랜만입니다. 경과보고를 위해 전화드렸습니다. 다치셨었다는데, 이제 좀 어떠신가요? ”
사뭇 친절하게 울리는 음성은 생소한 듯 하면서도 어딘지 낯익다. 윤호가 어리둥절해하며
기억을 더듬는 사이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의뢰하신 대로 일은 잘 끝났습니다. 저번에 저희 사업에 협조해 주신 일도 잘 마무리 지었고요.
대금 역시 확실히 받았습니다. 사실 마지막 일에 대한 기간이 꽤 길어서 기다리느라 좀이 쑤실 지경이었지 않습니까,
하하…… ”
의뢰라니, 무슨 소릴까.
“ 크리스마스 이브인 데다가 시간에 맞추느라 저희도 꽤 고심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번에는 눈까지 와서 교통이 꽤 지체가 되었었거든요.
어이쿠, 제가 쓸데없는 소리까지 지껄이는군요. 어쨌거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평안히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 잠깐만…… ”
윤호는 급하게 말을 꺼냈지만 이미 사내는 전화를 끊은 후였다.
공허하게 울리는 통화불능의 신호음에 윤호는 한동안 넋을 잃고 전화만 바라보았다.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를 할 수 없어 엉거주춤 전화를 내려놓았던 윤호는
그 즉시 다시 울린 전화벨소리에 다시 전화를 받았다.
“ 네, 정윤호입니다. ”
아까보다는 침착한 자신의 목소리에 안도했던 윤호는 상반되게 격한 음성으로 흘러나온 창민의 고함소리에
또다시 놀랐다.
“ 윤호야, 큰일났어! 지영이가…… ”
윤호는 혼잡한 시내에 힘겹게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몇 배는 더 밀리는 교통체증 때문에 겨우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몇 시간이 흐른 후였다.
“ 어떻게 된 거야? ”
창민을 만나자마자 물은 윤호에게 창민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모르겠어, 오늘 가족끼리 모임이 있어서 데리러 갔는데 아파트문이 열려 있더라고. 들어가 보니까 지영이가…… ”
“ 지영이가? ”
왜 갑자기 그 이상한 전화가 떠오를까. 경과보고, 의뢰, 마지막 일. 그 말을 뒷받침하듯 창민이 말했다.
“ 강도라도 들어왔었던 모양이야. 집안이 완전히 뒤집혀져 있는데…… 지영이가…… ”
거기까지 말했던 창민은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른 듯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미 몇 차례 구토를 했던 듯 쓴 위액만을 뱉어내는 그를 보고 있던 윤호가 애써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 그래서, 상태에 관해서는 누구에게 들으면 되는 거야? ”
도저히 대화를 나눌 상태가 아닌 창민을 붙잡고 독촉해봐야 의미가 없다.
윤호는 수술이 끝난 후 나올 주치의를 기다리며 대기실의 의자에 앉았다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뭔가 더 안타깝고, 화가 나고, 또 참을 수 없이 불안해하며 초조하게 수술실의 문만 바라보았던 그런 일이.
그건 언제였지……?
두 손을 깍지낀 채 생각에 골몰해 있던 윤호는 한참만에 나온 의사로부터 상태를 들을 수 있었다.
의사는 식은땀을 닦으며 사진을 들어 보이며 차근차근 설명을 했다.
“ 굉장히…… 뭔가 원한이라도 품은 것 같아요. 방법이 아주 잔혹합니다.
우선 여러 명이 집단으로 강간을 한 것 같아요. 신체 여기저기에 구타자국이 남아있고……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
의사는 또 다른 사진을 끼워 넣으며 말했다.
“ 위에서 다량의 클립이 발견됐습니다. ”
“ ……클립이라니? ”
“ 커튼 클립 말입니다. ”
윤호는 멍하니 사진을 바라보았다. 의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억지로 삼키게 만든 모양입니다. 입안에서부터 식도는 물론이고 위까지,
죄다 상처가 나서 성한 곳이 없어요. 클립이 삼켜지면서 기관을 모두 긁으면서 내려간 겁니다.
곳곳이 파열되어서 출혈이 심해요. 게다가…… 이건 면도날로 한 것 같은데…… 잘 드는 나이프일 수도 있고요. ”
다시 사진을 바꾸며 의사가 말했다.
“ 생식기를 아주 난도질 해놨어요. 아예 수술이 불가능할 정도로. 갈기갈기 찢겨졌다고 봐야 겠지요.
이 상태로서는 여성으로서의 기능은 할 수 없을 거라고 보셔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항문 성교도 강요당한 모양인데…… 역시 장 쪽도 다르지 않아요. ”
사진을 넘긴 의사는 계속 혀를 차며 설명한다.
“ 자궁 쪽에도 이물질이 넣어져 있어서 꺼내봤더니 유리조각들이더군요. 손으로 밀어넣은 모양입니다.
어쩔 수 없이 자궁을 적출했습니다. ”
윤호는 그만 듣고 싶어졌다. 창민이 자꾸 구토를 하는 심정이 이해가 간다.
직접 눈으로 봤으니 얼마나 처참했을까. 참다 못한 윤호가 말했다.
“ 그만 됐으니 결과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설명을 계속하려던 의사는 윤호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말을 돌렸다.
“ 현재로서는 정상적으로 돌아가기에는 불가능합니다. 식도 쪽으로 식사를 할 수 없을 테니
위쪽으로 직접 관을 삽입해 영양분을 공급해야할 거고, 배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도 환자가 정신적 충격을 이겨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겠지만…… ”
“ …… ”
할 말을 잊은 윤호에게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하필 크리스마스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우연치고는…… ”
지영의 수술이 끝난 후 그녀가 중환자실로 옮겨진 것을 확인한 후에 윤호와 창민은 병원을 나왔다.
이미 밤이 되어버린 거리는 눈으로 뒤덮인 채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주차장으로 향해가려는 창민에게 갑자기 윤호가 말을 걸었다.
“ ……한 잔 하고 들어가지 않을래? ”
창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보고 있는 윤호의 표정이 비할 데 없이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