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짓말-118화 (118/123)

거짓말 - 3부 43편

딸랑, 딸랑, 딸랑……

매년 이맘때면 들려오는 구세군의 종소리가 이번 해에는 서글프게 울려온다.

재중은 눈이 올 것 같이 잔뜩 흐린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몇 시쯤 됐을까.

지난 달에 중고로 산 라디오에서 나온 시간을 듣고 맞춰서 나왔는데, 좀 일찍 도착한 것 같다.

아직도 시계소리에는 예민해서 집에 시계를 들여놓지는 못했다. 학교를 휴학한 채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도 몇 달되었다. 처음에는 그나마 자리를 찾기가 어려워 열흘 가까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먹을 것도 없어서 굶다가 쓰러져버린 것을 창민이 발견하고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는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창민의 도움으로 찾게 된 아르바이트는 어느 중소기업의 사무실 보조였는데,

청소부터 시작해 잡무까지 하고 나면 한 달 생활비하고 조금 더 되는 돈이 나왔다.

일 자체가 그다지 어렵지 않고 근무시간도 짧아 남는 틈틈이 공부를 하라고

사무실에서는 말했지만 재중은 그 사이 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저녁과 주말에는 케익점에서

시간당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재중은 길의 한 쪽에 서서 찌부둥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 재중아! ”

멀리서 들려오는 경쾌한 음성에 재중은 고개를 돌렸다가 환하게 웃었다. 민철이 급히 달려와 숨을 몰아쉬었다.

“ 늦어서 미안해, 길이 얼마나 막히던지. 많이 기다렸어? ”

사실 시계가 없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지 못한다. 재중은 ‘ 아니 ’ 하고 고개를 젓고는 민철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휴학을 하고 나서까지도 유일하게 만나는 친구는 민철 뿐이다. 수능도 패스하고

이제 놀 일만 남았는데도 민철은 꼬박꼬박 잘도 재중을 챙겨주었다.

유일한 친구인 민철이 합격한 것을 뒤늦게 축하하기 위해 가장 붐비는 날인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당일에

휴일을 신청했지만 역시 통하지 않아서 둘은 낮에 만나 간단히 식사

를 하고 헤어지기로 했다.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케익점에 돌아가야 한다.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민철에게 확인한 후 둘이 나란히 걸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재중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 동생은 요즘 어때? ”

“ 잘 지내. ”

저번 주말에도 얼굴을 봤지만 인찬은 볼 때마다 더 재중에게 매달리곤 했다.

사정만 된다면 언제든 데려와버리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혼자 버티는 것도 힘들다.

하지만 3월쯤 되면 어느 정도 저금이 마련되니까 그 때는……

“ 저 카페 어때? ”

민철이 가리킨 곳에 위치한 아담한 카페에 재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에는 민철의 합격을 축하하는 자그마한 선물이 들어있다.

민철을 따라 들어가며 재중은 그가 선물을 받고 기뻐해주기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대했다.

“ 윤호씨, 저거 어때? ”

지영이 윤호의 팔짱을 끼고 소리쳤다. 쇼윈도우에 걸려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키는 그녀를 흘깃 본 윤호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 디자이너에게 말해 봐. ”

“ 윤호씨 마음에 드는 걸로 하고 싶단 말이야. ”

그녀는 어리광을 부리며 윤호의 팔에 매달렸다. 그러나 윤호는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할 뿐이다.

그는 오랜만에 가지려는 휴식시간에 억지로 끌려나온 것이 못내 불쾌한 것이다.

지영이 윤화기업의 일만 입에 올리지 않았던들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아비규환에 길에 나올 리 없다.

하지만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또 다시 협박처럼 그 말을 꺼낸다면 이젠 절대로 받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슬슬 지영의 제멋대로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도 한계인 것

이다. 그나마 이것도 윤화기업에 관한 최소한의 배려였지만.

“ 쇼핑은 다 끝났어? 이거면 되나? ”

손에 든 쇼핑백을 들어 보인 윤호에게 지영은 잠시 생각하는 척 하더니 말했다.

“ 그러고 보니 어제 봐둔 귀걸이가 있는데, 이번에 산 코트하고 잘 어울릴 것 같아. ”

지영은 윤호가 확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말했다.

“ 이것만 마지막으로 사면 돼, 윤호씨~ ”

다시 팔에 엉겨붙는 그녀를 떼어낸 윤호는 먼저 차를 세워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는 싫다. 여기저기 행복해 보이는 얼굴들이 가득 차서 그 안에 오직 자신만이 불행한 것처럼 남겨지는

것은 더욱 싫다. 이래서 나오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하고 생각하며 차로 다가가 차문을 열려 했던 윤호는

순간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온통 사람들의 물결뿐이다.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윤호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 이봐요! ”

키를 찾는 자신의 소매를 그가 붙잡는다.

“ 저, 저… 저를 하 하하 하룻밤 사 사사주세요! ”

그건 분명히……

“ 윤호씨?! ”

순간 윤호는 지영의 음성에 현실로 돌아왔다. 지영이 얼굴을 찌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 왜 그래? 얼굴이 너무 창백하잖아. 어디 아픈 거야? ”

지영이 손을 뻗었지만 윤호는 뿌리쳐버렸다.

“ ……오늘은 그만 집으로 가야겠어. ”

“ 뭐?! 윤호씨…… ”

지영이 소리쳤지만 윤호는 난폭하게 차에 올라 혼자 출발해버렸다.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두통이 일어난다. 토할 것 같다. 신호조차 무시하고 마구 차를 몰아가면서 윤호는 안개처럼

부연 기억을 어떻게든 잡아보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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