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3부 42편
지영은 콧노래를 부르며 차에서 내렸다. 오늘은 윤호가 퇴원을 하는 날이다.
병원 현관으로 향해 가면서 지영은 자신의 뜻밖에 행운에 다시 한 번 고소를 머금었다.
전화위복이란 이런 거겠지.
아버지 회사의 일이라든가, 그 남창에 관한 얘기를 창민으로부터 전해들었을 때는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올라서 앞 뒤 가리지 않고 저지른 일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은 몰랐다.
처음 충고와 같이 그 말을 해주며 “ 이제 그 쪽 일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마. ”
라고 말했던 창민도 지영의 얘기를 듣고는 어이가 없어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다는 것은 창민도 알지 못한다.
총을 쏜 직후 자신도 놀라 경비원이 오기 전에 후다
닥 도망치기 바빴으니까. 하지만 과녁이 빗나가 윤호가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에 놀란 지영은
정말 필사적으로 윤호의 병실에 찾아갔었다. 그의 경과를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그가 깨어나 자신에 대해 진술할 경우를 생각해서, 변명이나 다른 방법이라도 강구할 예정이었다.
창민을 불러 눈물어린 목소리로 호소하며 “ 나 그 사람 한 번만 보고 싶어, 아프다는데. ”
하고 연기를 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창민은 어릴 때부터 지영에게는 약해서 말하는 것은
대개 들어주곤 했으니까. 아버지의 회사 쪽도 창민 덕분에 일부를 회생시킬 수 있었다.
창민의 도움으로 지영은 지긋지긋하게 붙어있던 남창을 떼어내고 그 사이 병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최대의 행운이었던 건지!
사고가 있은 후 처음으로 눈을 떴던 윤호는 잠시 의식이 돌아왔으나 단편적인 기억이 사라져 있었다.
그가 최근 1년 남짓한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뜻밖의 행운에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야.
지영은 콧노래를 부르며 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다시는 누구도 당신과 나를 방해하지 못할 거야.
“ 윤화기업이 넘어가다니? ”
윤호는 셔츠를 갈아 입다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희태가 정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 사장님께서 병환에 누워 계시기 전 지시하셨던 사항입니다.
그리고 기업은 해체하여 인수인계까지 모두 끝냈습니다. ”
“ 어이가 없군…… ”
윤호는 기가 막혀하는 얼굴로 한 마디 중얼거렸다. 희태가 계속해서 말했다.
“ 그룹의 계열사 중에서 처음 일을 진행하실 때 반 이상을 넘기기로 한 업체에 대해서,
모든 사무처리가 끝났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심창민 사장님께서 양도받아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
“ 그걸 다시 물밑에서 신회장이 운영하겠지. ”
“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윤호는 기계적으로 셔츠의 단추를 모두 채우고 넥타이를 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업을 해체하다니, 그것도 약혼녀의 기업을.
윤호는 지영과 자신이 파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지만 지영은 그것을 “ 당신이 남창한테 속아서
그런 실수를 했던 거야 ” 라고 간단히 말해버렸다.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듣는 얘기라고는 하나같이 앞뒤가 안 맞고 이해할 수 없는 얘기뿐이다. 창민은
찾아와서 한숨만 내쉬다 가고, 희태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보고만 할뿐이고,
지영은 매일같이 찾아와서 알 수 없는 것들만 물어보고 윤호가 모른다고 대답하면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급기야 경우는 눈을 뜨고 며칠만에 찾아와서는 난동을 부리고 나갔다.
하지만 모두 공통적인 것은, 윤호가 뭔가를 물어보려 해도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고
“ 됐어, 넌 잊은 채 살아 ” 라든가 “ 기억이 되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말씀드려 혼란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 또는 “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야 ” “ 병신새끼, 니 일을 왜 나한테 물어? ”
하고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자신에 관한 일을 남에게 물어야하다니, 정말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계속 뭔가 허전한 기분은. 고개를 돌리면 누군가가 거기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그것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지영으로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자신이 지영에게 그 정도의 집착이나 관심이 있었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왜 그 애가 생각날까.
울어버릴 것 같이 붉어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 애가 문득 생각났지만,
그럴 때면 언제나 지영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하곤 했다.
“ 그 애는 남창에 사기꾼이야. 울며불며 매달리고 당신을 속여서 당신은 감쪽같이 당한 거라구.
아아, 당신이 그런 끔찍한 기억을 잃어버려서 얼마나 다행인 건지. ”
윤화기업에 관한 얘기를 했을 때도, 그녀는 고양이같이 웃으며
“ 괜찮아, 창민이가 뒷수습을 잘 해줘서 그럭저럭 아버지도 회복하신 것 같으니까.
사업이란 원래 그런 거잖아. 신경 쓰지 마. 자기랑 나랑 결혼하면 아버지도 용서하실 거야. ”
라고 말했을 뿐이다. ‘ 용서 ’ 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윤호는 자신이 실수라든가,
착오에 의해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는 것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뭔가 분명히, 계획된 것이다.
그게 뭘까. 고민하고 있는 새 갑자기 병실문이 열리더니 지영이 환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 윤호씨! 준비 다 됐어? ”
활기차게 들어왔던 그녀는 희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멈칫했다. 윤호는 어김없이 흐르는 긴장된 분위기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또다. 최근 지영이 나타날 때면 이런 일이 많아졌다.
경우야 원래 그녀를 싫어했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희태까지.
윤호는 이런 분위기 속에 그들이 남겨져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 준비 끝났으니 아파트로 돌아가지. ”
서늘한 음성으로 내뱉은 후 먼저 일어나 나가자 그 뒤를 지영이 쫓아왔다.
희태는 간단히 챙긴 가방을 들고 그 뒤를 따라가면서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도중에 싫다는 지영을 억지로 돌려보내고 아파트로 돌아온 윤호는 오랜만에 혼자라는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희태는 이미 병원 현관에서 돌려보낸 후였다.
딩동.
가벼운 벨소리가 들린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윤호는 익숙한 아파트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뭐지?
발을 들여놓는 바로 그 순간, 엄청난 공허가 밀려들어왔다.
윤호는 놀라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려 버렸다.
……집이…… 이렇게 넓었던가……?
당장이라도 누군가 뛰어나와 자신을 반겨줄 것 같은데,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정적뿐이다. 윤호는 아련하게 스며드는 젖은 눈동자를 생각해내려 애쓰며
한참을 그렇게 서있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