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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116화 (116/123)

거짓말 - 3부 41편

역시 억지로 이끌려 아파트까지 들어간 재중은 입을 굳게 다물고 발끝만 노려보며 소파에 앉은 채였다.

창민은 일부러 거리를 두고 앉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 일시적인 거니까 그런 얼굴하지 마. 괜찮을 거야. ”

“ 일시적으로 나만 잊은 거군요. ”

비꼬듯 대답한 재중에게 창민은 화제를 바꿔 말했다.

“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셈인 거야? ”

“ …… ”

“ 딱히 갈 데도 없지? ”

“ …… ”

창민이 한숨을 사이에 두고 말했다.

“ 재개발하려고 비워둔 연립이 있는데, 공사가 중지됐어. 한 1년 정도는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기라도 있겠어? ”

“ ……? ”

고개를 번쩍 든 재중에게 창민이 말을 이었다.

“ 물론 보일러도 다 들어오고 가스도 돼. 사계절 뜨거운 물 언제든지 나오고. 낡은 연립이지만 쥐도 없고.

가구는 붙박이라 아직 쓸 수 있을 거야. 물론 공사가 중지된 상태라 대부분은 아직 거기 살고 있는 상태야.

비어있는 집이라고 해봐야 2-3채 정도. 그러니까 그다지 음산하지도 않을 거야. ”

“ ……저보고…… 거기서 살라고요? ”

“ 어차피 남는 집이니까 말이야. ”

재중은 창민의 호의를 받아들여야할 지 잠시 망설였다. 현실적으로 따져볼 때 이건 정말 기적이다.

당장 오늘 잘 곳도 없는 상황에서 내밀어진 이 손을 잡아도 되는 걸까. 재중은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 ……그만 둘래요. ”

“ 어째서? ”

“ 난, 당신이 내게 뭘 기대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

“ …… ”

“ 당신의 기대를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

“ 그렇지…… ”

창민은 피곤한 얼굴로 담배연기와 함께 한숨을 내뱉었다.

“ 그저 난 내가 하고 싶은 호의를 네게 베풀었을 뿐이야. ”

창민은 사이를 두고 다시 말했다.

“ 언젠가 이 감정이 사라질 지도 몰라. 아니,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까……

윤호가 저렇게 된 지금이 기회라는 것 알고 있고, 이용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야.

……비열해, 나는. 최저야. 하지만 그래도 역시 포기할 수는 없어…… ”

“ 당신은 불행해질 거예요. ”

재중이 중얼거렸다.

“ 그녀가 말했듯이, 난 재수가 없는 거예요. 나와 함께 있으면 모두 불행해져요. 건우도 그랬고,

그 사람도 그렇고, 당신도 불행해질 거예요. 아마 그래서 부모님은 나를 버리고 갔나봐요.

불쌍한 인찬이, 나 때문에 같이 버림받고…… 인찬이도 나 때문에 불행해진 건지도 몰라…… ”

“ 그렇지 않아, 우연일 뿐이야. ”

“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돼요. ”

“ …… ”

“ 부탁이에요, 이제 더 이상 누구도 불행해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내게 그런 제의를 해준 건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그만 두겠어요…… ”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맺은 재중이 고개를 푹 숙였다. 창민은 행여나 재중이 울기라도 할까봐

내심 불안했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창민이 한숨을 내쉰다.

“ 그래도 너를 그냥 둘 수는 없어. 그리고 난 운명이라는 거 믿지도 않고. ”

“ ……하지만…… ”

“ 내 양심의 문제야. 너에 대한 관심 여부를 떠나서, 갈 곳 없고 당장 막막하다는 걸 뻔히 아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잖아. 해결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

“ …… ”

“ 부담스러우면 나중에 커서 갚아. 빚으로 해둘 테니까. ”

그는 진심이었다. 재중은 난처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조건이 있어요. ”

“ 말해 봐. ”

“ 방세라든가…… 관리비 같은 거 모두 제가 낼께요. 학교 졸업하고 나면 집세도 모두 갚을 거고…… ”

“ …… ”

“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재중은 창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 누군가 나로 인해 불행해진다는 건 피해의식일지 몰라요. 하지만 이젠 사실 피곤해요.

당신이 나를 걱정해준다는 건 알지만 이 이상은 제게도 역시 부담이 될 뿐이에요. 여기까지만 해주세요. ”

단호한 그의 얼굴을 보고 창민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

“ ……감사합니다…… ”

웅얼거리며 인사를 하는 재중을 보고 창민은 잠시 안타까운 얼굴을 했으나 곧 표정을 바꿔 벌떡 일어났다.

“ 행동은 빠를수록 좋겠지. 자, 가자. ”

먼저 걷기 시작한 창민의 뒤를 따라가며 재중은 다짐했다. 이제 결코 누구에게도 손내밀지 않을 거야.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는 것도 이제는 끝이야.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기대하거나 의지하지 않을 테니까.

창민이 소개해 준 연립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깨끗하고 조용했다.

낡았다는 얘기를 거듭 들어서 꽤 각오를 하고 쫓아왔는데, 들었던 것만큼 그렇게 낡은 건 아니라 재중은 새삼 놀랐다.

“ 페인트 칠을 새로 했거든. ”

창민은 그렇게 말한 후 재중에게 방을 안내해 주었다. 큰 방과 작은 방이 각각 하나씩에 거기엔

각자 붙박이 장이 딸려 있어서 큰 불편은 없을 것 같았다.

부엌 역시 작았지만 그런 대로 쓸만하다. 싱크대 역시 집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재중은 크게 마음에 들었다.

“ 어때, 괜찮아? ”

집을 모두 둘러본 후 물은 창민에게 재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 네, 감사합니다. ”

“ 다행이군. 자, 열쇠. ”

현관열쇠를 쥐어주며 창민이 말했다.

“ 문이 허술해서 방범이 약한 게 흠이야. 나중에 따로 자물쇠를 다시 달아주지. ”

“ 괜찮아요. 가져갈 것도 없는 걸요. ”

“ 내가 안 괜찮아. ”

재중의 거절을 한 마디로 무시한 창민이 말했다.

“ 그럼 최후의 호의로, 간단한 생활품만 좀 사줄게. 그건 받아주겠지? ”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것까지 거절해버리면 좀 너무한 것 같아 재중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쇼핑몰로 향하려는 창민을 붙잡아 재활용 가구점과 대형마트를 뒤져 가격을 일일이 대조한 후 사야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했지만.

창민은 저녁이 되어 돌아오자마자 보일러를 틀어 난방이 잘 되는지 확인한 후 돌아갔다.

창민이 사준 이불을 덮고 생활정보지를 뒤지며 재중은 자꾸만 생각나는 기억을 지우려

애쓰다가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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