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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114화 (114/123)

거짓말 - 3부 39편

끼이…

두근거리며 문을 열었던 재중은 고개만 살짝 들이민 상태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병실 안은 때마침 햇살이 가득히 스며들어와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가을이라 날씨가 쌀쌀했던 탓에

한순간 부르르 한기를 느꼈던 재중은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심장을 두 배로 가속화된다.

단 하루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보고 싶다니, 하고 재중은 저미는 가슴을 부여잡고 생각했다.

오늘쯤 눈을 뜰 거라고 그랬는데……

조바심을 내며 다가갔던 재중은 깊이 잠들어 있는 것 같은 윤호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핏기라고는 없는 것 같이 창백한 윤호의 얼굴을 보며 재중 역시 창백해졌다.

……그렇겠지…… 그렇게 피를 많이 쏟아냈던데…… 당연히 빈혈이 있겠지……

재중은 문득 경우의 말이 의심스러워졌다. 정말로 괜찮은 걸까. 혹시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런 말을 했던 건 아닐까? ……그 동안 보았던 경우의 성격상 누군가를 배려해서

거짓말을 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저렇게 안색이 창백한데……

망설이며 서있었던 재중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윤호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끝이 느껴진다.

전날부터 계속되었던 시계소리가 이제는 심장소리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재중은 마른 침을 삼켰다.

바로 그 때, 마치 마법처럼 윤호가 눈을 떴다. 그는 초점이 맞지 않는 듯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더니

천천히 재중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재중은 그만 울어버릴 것 같아 거칠게 숨을 들이키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정말이구나……

경우의 말을 떠올리며 재중은 겨우 그가 한 말이 맞았다는 것만을 생각할 수 있었다.

의심해서 미안, 하는 마음조차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윤호의 눈을 마주보는 순간 격하게 찾아온 감동 탓이었다.

“ 다행이에요…… ”

재중은 한참만에 겨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 난, 나는…… 정말 많이 다치셨을까 봐…… ”

다시는 눈뜨지 못할 까봐. 감동을 억누르고 입을 다물 재중이 심호흡을 했다.

좀 이르지만 지영이 오기 전에 얘기를 해야겠다. 어떤 상황이라도, 설령 지영과 윤호가 결혼한다고 해도,

정부로라도 좋고 하다못해 무시해도 좋으니까 옆에 있게 해달라고, 이제야말로 빌어봐야지.

“ ……저어…… ”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는 바람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바싹 마른 입안을 움직여 어렵게 침을 만들어내는 사이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아아…… 너인가 보군. ”

윤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급히 부축하려 했지만 윤호는 재중의 손을 뿌리쳐버렸다.

창백해진 재중의 얼굴을 무시하고 베개에 기대어 앉은 윤호가 말했다.

“ 지영이가 말한 대로군. 계산 때문에 왔지? ”

에? 재중은 그의 냉정한 얼굴과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녀의 이름에 잠시 생각을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었다.

윤호가 계속해서 말했다.

“ 잠시 기다려. 좀 있으면 비서가 올 테니까 그 때 비서한테 얘기해. 병실까지 찾아오다니, 정말 끈질기군. ”

재중은 멍하니 윤호를 바라보았다. 원래 그다지 다정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심하다. 어떻게 된 거지?

“ 저, 저기…… ”

겨우 다시 입을 열었던 재중을 가로막고 윤호가 짜증을 냈다.

“ 또 뭐야? 너같이 하루 이틀 섹스한 정도로 그렇게 당연한 듯이 쫓아다니는 녀석들은 정말 질색이야. ”

하루 이틀 섹스.

재중의 심장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역시 이 사람은 그저 나를 동정하고 있었을 뿐이야.

괜히 혼자 들떠서, 바보같이. 재중은 자신이 매달려도 괜찮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어떤 상황이 와도 꺾이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했지만 이 정도로 심하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재중은 멍하니 윤호가 손을 뻗어 전화를 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 희태인가. 어디쯤이야? 왜 이리 늦어? 계산해 줄 일이 있으니까 빨리 와. ”

자신이 할 말만을 쏟아낸 그가 고개를 돌렸다.

“ 1층이라는군. 곧 도착할 거야. ”

“ ……저어…… ”

“ 또 뭐야? ”

재중은 고개를 푹 숙이고 겨우 입을 열었다.

“ ……짐을…… 쌌는데…… 저번에 사주신 거…… 조금 들고 나왔어요…… 옷도 없고 짐도 없어서

…… 급한 것만…… 조금…… 다음에 갚을께요…… ”

“ 안 갚아도 되니까 그만 둬. ”

‘ 다음 ’ 이라는 말을 핑계로 한 번 더 만나고 싶어하는 재중의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듯이 윤호가 야멸차게 말했다.

재중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겨우 중얼거렸다.

“ 안 입은 건…… 옷장에 그대로 뒀는데…… 다른 것들도…… ”

“ 가지고 가. 어차피 나한테는 필요 없는 거니까. 아니면 네가 버리든가. ”

“ ……아파트 키가…… 없는데요…… 관리실이라도 전화를 해주시면…… ”

“ 아파트? ”

윤호의 목소리가 뭔가 기묘하게 틀려졌다.

“ 아파트라니? 내가 너를 아파트에 데려갔었단 말이야? 내 아파트? ”

“ 네…… ”

“ 정말 미쳤었나 보군. ”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흘러내려온 앞 머리칼을 짜증스럽게 쓸어올리는 윤호를 보는 순간 재중은

그들의 대화가 기묘하게 어긋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장 한 구석이 쓰라리면서 박동소리에 귓가가 멍해졌다.

“ ……기억…… 안 나세요? ”

“ 뭐가? ”

“ ……저하고…… 만났던 일이라든지…… 그…… 키스를 했던 일이라든지…… ”

“ 키스라…… ”

윤호의 입가가 시니컬하게 굳어졌다.

“ 나를 상대로 거짓말을 하려면 좀 그럴 듯하게 하지. 나는 관계만 가지는 상대에게 키스 따위는 안 해. ”

“ 정말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나에 대해서? ”

재중의 음성에 격한 흐느낌이 배어들었다. 하지만 윤호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다.

“ 짜증스럽게 만드는군. 내가 너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어야하는 이유는 또 뭐지? ”

“ ……왜 그녀는 기억하면서…… 나는 기억하지 못해요? ”

난 정말 당신에게 그 정도 존재밖에 안 됐을까. 이렇게 쉽사리 잊혀질 정도로.

그녀는 당신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한 걸까. 윤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 글쎄, 잊어버린 건 최근 1년 남짓한 시간뿐이어서…… ”

재중은 윤호를 붙잡고 통곡하고 싶은 자신을 참느라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난 이렇게 뚜렷이 당신을 기억하고 있는데 당신은 왜 나를 잊어버렸을까.

왜 기억해내지 못한다고 내게 말하는 걸까. 어떻게든 당신이 나를 다시 보아주기만을 바랬는데,

어째서 그 대가가 이렇게 가혹한 걸까.

“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

처음 관계를 가졌을 때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을 한 재중에게 윤호는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우뚱하더니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 정윤호. ”

덤덤한 그의 말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재중은 애써 참았다.

“ 나는 김재중이에요. ”

그는 처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얼굴이다.

“ ……내 이름…… 기억해 줄 수 없을까요…… ”

시간이 역류한다. 그 속에서 윤호는 그 때와 똑같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 그랬었지. 그는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었지.

글세, 울면서 이름을 불러야 하는 건 내 쪽이 아니니까 내게는 그다지 필요할 것 같지 않군.

…하지만 나로서도 상대가 다른 녀석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니까 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

비뚤어진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좋아, 그럴 일은 없겠지만 행여 그렇게 된다면 그 때는 네 이름을 불러주지. 그럼 이제 된 건가?

“ ……한 번만…… 내 이름…… 불러봐 주지 않겠어요……? ”

이건 구걸이야.

재중은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알고 있어. 이 이상 비참하게 누군가에게 매달릴 일은 이제 없을 거야.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구걸해도 상관없어. 당신에게라면 나는 창부가 되어도 좋아.

그러니까 단 한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 줘……

그러나 재중의 바램은 다음 순간 들려온 노크소리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 사장님, 좀 어떠십니까? ”

문을 열고 들어왔던 희태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재중의 얼굴과 짜증이 배어있는 윤호를 번갈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윤호가 무심하게 명령한다.

“ 계산해 줄 일이 있어. 너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부르는 대로 줘. ”

“ ……네? ”

희태는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윤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재중을 바라보았다.

재중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이를 악물고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 ……계산만 끝내주면…… 갈께요. ”

“ 김재중씨, 이게 무슨…… ”

뭐라고 말을 하려는 희태를 가로막고 재중이 말했다.

“ 난 돈을 받기로 하고 관계를 가진 게 다니까…… 돈만 주시면 이제 안 나타날 거예요…… ”

“ 아니, 잠깐만요…… ”

희태가 다시 입을 열었지만 재중은 윤호를 향해 돌아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채로 웅얼거렸다.

“ 죄송합니다, 폐가 많았어요. ……빨리 나으시길 바랄께요…… ”

윤호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재중은 희태를 잡아끌고 서둘러 병실을 나왔다.

“ 어떻게 된 겁니까? ”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묻는 희태에게 재중은 겨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 기억이 나질 않는대요. ”

“ 뭐라구요? ”

“ 1년 좀 넘게, 기억이 나질 않는대요. ”

“ 그런 바보같은…… ”

어이가 없는 얼굴로 멍하니 중얼거렸던 희태가 다시금 재중에게 따져 물었다.

“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고 나오면 어떡해요? 기다리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기억이 돌아올 텐데,

당장 이렇게 포기해버리면…… ”

“ 나를 모른다잖아요! ”

재중이 격하게 소리쳤다. 그만 참았던 눈물이 흘러 나와버리고 그 순간에 재중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됐다.

“ 다른 건 모두 기억하면서, 나만 잊었잖아요! 나만 지워버린 거잖아요……

당신도 기억하고, 그녀도 기억하고, 죄다 기억하는데, 나만, 나만…… ”

결국 크게 통곡해버린 재중을 망연히 바라보는 희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당신은 항상 먼 곳만 바라보는 걸까. 왜 나를 보아주지 않을까.

난 이렇게 당신만 바라보는데, 어째서 항상 돌아봐 주지 않을까.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언제나 나를 보아주지 않는 당신을 향해서,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구걸해야 하는 걸까.

당신이 돌아와 주길 간절히 원했는데, 그 대가가 이렇게 크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

“ ……미안해요, 나 이제 정말로 그만 둘 거예요…… ”

“ 이봐요, 김재중씨. 그러지 말고…… ”

희태는 좀 더 만류해보려 했지만 재중은 고개를 저었다.

“ 이렇게나 명백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 난 못하겠어요…… 신경 써 주신 건 정말 고맙지만, 끝낼래요…… ”

“ …… ”

“ 문 경우 선생님께도, 저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으면 하고 전해주세요…… ”

“ ……이제 어디로 갈 겁니까? 갈 곳이 있어요? ”

걱정이 스며있는 그의 음성에 재중은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에 겨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건강하세요. ”

그리고 재중은 돌아서서 병원의 긴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금 눈물이 쏟아져 나왔지만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그는 크게 흐느끼며 울며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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