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3부 33편
얼마나 그렇게 앉아만 있었을까. 2시간? 3시간? 아니 10분도 흐르지 않은 건 아닐까.
재중은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만 있다가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다. 왜 이렇게 떠오르는 생각이 없을까. 마치 머릿속이 바보가 되어버린 것처럼.
나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바보처럼, 내가 말을 하면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줄거라고 생각한 걸까. 무슨 자만으로.
그저 어림짐작으로 한 얘기를 고스란히 믿고.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는 주제에.
나는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
울어버리고 싶었지만 재중은 세게 고개를 휘저어 애써 참았다. 울고 있을 틈이 없어.
더 이상 그의 짐이 되기 전에 나가야지. 동정이라는 걸 알면서 언제까지나 그의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 확인까지 한 시점에서 계속 있을 수는……
방으로 들어왔지만 사실 짐이라고는 얼마 없다. 입고 있는 옷부터 전부 퇴원할 때 윤호가 사 준 것이다.
옷장에는 아직 상표도 뜯지 않은 새 옷이 가득히 쌓여있다. 망설이다가 고개를 돌린 재중은 자신의 물건을 찾아보려다가
교과서가 들어있는 가방조차도 그가 사주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잠시 망연히 서 있었다.
“ 빌리는 거니까…… ”
다짐하는 것처럼 혼잣말을 했던 재중은 결심한 듯 가방을 들고 그 안에 정말 필요한 것들만 챙겨 넣었다.
옷도 몇 벌만 최소한으로 갈아입을 정도만 꺼냈다. 서글픈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다른 것들을 생각하며 슬픔을 억눌렀다. 학교는 어떻게 됐을까. 물어보는 거였는데. 그러고 보니 안 간 게 벌써 몇 달이지. 건우가 죽은 건 여름이었는데. 벌써 계절은 가을의 끝자락에 와서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휴학처리가 되어있다고 해도 학교에 가보긴 해야할 것 같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던 재중은 금새 가방을 모두 챙기고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짐이 많아서 싸는 시간이라도 많이 걸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고작 30분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모든 일이 끝나다니.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이 한 번만 보고 싶은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로 울면서 매달릴 것 같다. 그럼 그는 얼마나 난처할까. 재중은 자신을 채찍질하며 가방을 어깨에 맸다. 바로 그 때, 거실에서 전화벨소리가 울려왔다.
누구지……?
이제껏 집에 전화가 온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재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떻게 할까.
저 전화는 누구의 전화일까. 혹시 그의 전화는 아닐까. 받아도 되는 걸까 아니면 그만 둘까.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사이에 전화벨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자동응답기가 돌아가며 껄끄러운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 안녕하십니까. 현재 전화를 받을 수가 없사오니 삐 소리가 들린 후에 메시지를 남겨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자동응답기의 메시지가 육성이 아닌 기계음인 것을 알고 재중은 윤호에게 걸맞는 행동이라고 멍하니 생각했다.
삐― 하고 신호음이 들린 후 처음 듣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 김재중씨, 거기 있지요? 나는 정 희태, 정윤호 사장님 비서입니다. 지금 사장님이 많이 다치셨어요…… ”
순간 재중은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 지금 지하 주차장입니다. 앰뷸런스가 오고 있으니 병원으로 와주세요. 장소는…… ”
“ 지금 내려갈께요! ”
재중은 비명처럼 소리친 후 가방을 멘 채 달려나갔다. 지하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른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재중은 문이 다시 열리자마자 총알같이 튀어나갔다.
“ 여깁니다! ”
부산한 사람들 사이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중은 잔뜩 몰려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달려갔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로 들것에 실려가는 윤호의 모습을 본 재중은 놀라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피투성이로 젖어있는 그는 의식을 잃은 듯 했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쓰러져 있는 모습을 처음 본 재중으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 어서 타요, 출발할 테니까! ”
옆에서 재촉을 하는 희태에게 떠밀려 급히 앰뷸런스에 올라탔던 재중은 윤호에게 이것저것 기계를 연결하기도
하고 혈압을 재기도 하면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향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 괘, 괜찮겠죠? 괜찮은 거죠? ”
“ 지금으로서는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이따가 병원에 도착해서 정밀검사를 받아본 후 의사한테 얘기를 들어보세요. ”
사무적인 말을 겨우 들었을 뿐 수확은 없었다. 하얗게 질려서 윤호의 얼굴만 바라보던 재중은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피가 많이 흘렀는데 괜찮을까. 깔끔하던 슈트와 셔츠는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사람의 몸 안에서 저렇게 많은 피가 쏟아져 나왔는데, 아무 일 없을까. 재중은 떨리는 손을 마주 잡고 눈을 꼭 감았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해? 제발, 당신이 나를 경멸해도 좋고 동정해도 좋고 어떻게 해도 괜찮으니까
제발 아무 일 없어 줘. 내게 어떤 결과가 있다고 해도 괜찮으니까.
“ 굳이 오시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 ”
재중은 중얼거린 혼잣말에 고개를 돌렸다. 희태가 초조한 얼굴로 난처한 듯이 중얼거렸다.
“ 회사의 매입건으로 보고를 드렸었는데, 그저 보고일 뿐이니까 오시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굳이 오시겠다고 하시더니…… 급히 서두르시는 게 왠지 이상해서 전화 끊자마자 와봤더니…… ”
내 고백 때문이야.
재중은 생각했다.
내 어이없는 고백 때문에 피하고 싶었던 거야.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랬다면 그가 이렇게 급히 나오다가 이런 일을 만나지 않았겠지.
단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어야 했는데, 내가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바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놓고 뻔뻔스럽게.
다시금 차오르려는 눈물을 애써 참고 재중이 물었다.
“ ……어디를…… 다친 건가요? ”
온 몸이 피로 젖어있어 도무지 상처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희태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 총을 맞으신 것 같습니다. 머리에 한 발. 뒤에서 쏜 것 같은데,
하필 경비원이 자리를 비웠을 때 일어난 일이라 목격자도 찾을 수가 없어요. ”
“ 그래요…… ”
우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던 재중은 다시 윤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에 범벅이 되어 있는 붉은 피가 심장 한 구석을 서늘하게 만든다.
“ 괜……찮겠죠……? ”
“ 글쎄요. ”
잠시 후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재중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그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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