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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106화 (106/123)

거짓말 3부 31편

콰당―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재중은 당황한 얼굴로 방안에 서있을 뿐이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변명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윤호가 받아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냥 넘어진 것 뿐이에요,

라는 말만으로는 지나치게 간략하지 않은가. 하필 그런 때에 들어오다니,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뭔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됐을까. 윤호에게 붙잡혔던 팔이 뒤늦게 아파와 무심결에

손을 들었던 재중은 붕대로 감싸여 있는 상박을 보고 다시 내렸다.

붕대를 풀면 다시 그 자국이 보이겠지. 거기에 새로운 상처가

더해져서 팔은 엉망이었다. 몇 번이나 칼을 내리그었는지 제대로 기억나질 않는다.

게다가 몽롱한 상태였을 때가 꽤 많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나 팔에는 붕대가 매어져 있고 윤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피로한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칠 때면 항상 가슴이 아팠었지. 거기까지

생각했던 재중은 문득 초조해졌다. 아까 그 일로 오해해버렸으면 어쩌지. 아니, 이미 오해해버린 거니까…… 그

걸로 화가 나서 나에게 나가라고 하면 어떡하나. 나는 당신의 옆에 있고 싶은데……

아직 낫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사실 나는 당신 곁에 있고 싶었던 건데……

이대로 당신이 나를 버리면 어떻게 해야하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재중은 등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재중은 머뭇거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문으로 다가섰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윤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 식사, 아직 안 했지? ”

피리리릭. 피리리릭.

“ 네, 비서실입니다. ”

희태의 정중한 목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상대방은 앙칼지게 소리쳤다.

“ 윤호씨 바꿔! ”

희태는 살짝 전화기를 귀에서 떼었다가 역시 정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 사장님은 안에 안 계십니다, 신 지영씨. ”

“ 거짓말하지 마, 윤호씨가 안 받겠다고 했어? 지금 올라가서 확인할 거야! ”

소리가 간간이 끊기는 것으로 보아 핸드폰인 것 같았다.

“ 정말입니다. 안 받으시겠다고 했다면 그렇게 말을 전했을 겁니다. ”

희태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지영은 ‘ 제기랄 ’ 하고 욕설을 내뱉더니 당장 전화를 끊어버렸다.

끊어진 신호음을 듣고 있던 희태는 전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새로운 전화벨을 들었다.

“ 네, 비서실입니다…… 예, 그렇습니까? 현재 윤화쪽에서 300억을 모았다고요…… 예…… ”

윤호와 재중은 말없이 마주 앉아 밥만 입에 떠 넣고 있었다. 재중이 전날 사둔 재료로 밥을 짓겠다고 말했을 때

윤호는 흘깃 시선을 주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두부 찌개를 끓이면서 재중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난 거야, 분명히.

식탁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며 신문을 읽고 있는 그의 얼굴을 흘깃 보았지만

그것은 무섭도록 굳어져 있어 말을 걸기조차 두려웠다.

“ 저어, 식사하세요. ”

수저를 차려놓으며 말했지만 윤호는 잠자코 신문을 내려놓았을 뿐 여전히 말이 없다.

불편한 분위기 때문에 밥이 돌처럼 위에 얹히는 것 같았지만 재중은 기를 쓰고 아무 일 없었던 듯 먹기만 했다.

윤호 역시 마찬가지인 듯 반도 제대로 먹지 않은 채 수저를 내려놓는다.

“ 이, 입에 안 맞으세요? ”

울상이 되어 물었지만 윤호는

“ 아니야,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

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래도 재중이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려는 듯 일어나지 않고 신문을 펼쳤기 때문에

그나마 좀 위안이 되었다.

“ 커, 커피 드시겠어요? ”

말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자 윤호가 신문을 덮고 역시 일어났다.

“ 됐어, 넌 식사해. 내가 끓일 테니까. ”

그리고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커피 메이커에 커피를 넣었다.

가스레인지에 유리포트를 올려놓는 그의 얼굴이 몹시 궁금했지만 그는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문득 창민의 말이 생각났다.

녀석이 얘기 안 했어?

그 때 나와의 일이 있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그 자식 제정신 아니었어.

정말 미친개처럼 날뛰더라고. 언제나 냉철한 이성, 하면 정윤호였는데 말이지.

어떤 일에도 그렇게 흥분하거나 망가지는 꼴은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 녀석이 고집도 세고 자존심도 강해서 먼저 얘기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먼저 말을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그나마 동정으로 나를 돌봐주고 있었던 것조차 이제는 없어지는 게 아닐까.

재중은 초조해하며 숟가락을 든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이가 없어 웃을지도 몰라, 저 사람은. 저 사람이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해본 일이 있을까.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 받았을 때 저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웃었겠지.

그렇지 않으면 귀찮아하면서 얼굴을 찡그렸을 거야. 결코 저 사람은 남의 진심따위 받아주지 않을 거야……

“ 식사 다 했나? ”

갑작스레 들려온 음성에 재중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윤호가 자신의 컵에 커피를 따르고 남은 커피를 든 채 서 있었다.

재중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 커피 마시겠어? ”

“ 네, 네에. 주세요. ”

윤호가 재중의 머그컵에 커피를 따라 건네주었다. 그의 뼈마디가 가늘고 긴 손가락을 잠시 황홀한 눈으로 보았던

재중은 뒤늦게 서둘러 컵을 받았다.

잠시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윤호는 아무 말 없이 자신과 재중의 식기를 들어 싱크대로 가져갔다.

“ 제, 제가 ”

“ 그냥 둬, 나중에 아주머니가 와서 청소할 거야. 용역을 불러뒀으니까. ”

재중의 말을 가로막고 내뱉은 윤호는 식탁을 모두 치운 후에 맞은 편에 앉았다.

이제 식탁에는 두 개의 머그컵이 놓여있을 뿐이다. 윤호가 다시 신문을 볼 거라고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그는 커피를 마시기만 할 뿐 뭔가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 ……저어…… ”

힘겹게 입을 열자 윤호가 고개를 든다. 재중은 바싹 마른 입에 침이라도 삼키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 ……왜…… 저한테 이렇게 잘 해 주세요……? ”

네가 불쌍해서, 라고 대답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 죽어버리고 싶어지지 않을까.

하고 문득 재중은 생각했지만 윤호는 대답대신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컵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

두 손을 식탁 밑으로 내려 깍지낀 것이 전부였다. 재중은 도저히 일어나지 않는 용기를 끌어 모아

겨우 힘겹게 입을 열었다.

“ ……나는…… 얼마동안 여기 있어도 되는 건지…… ”

“ 얼마든지 있고 싶을 만큼 있어. ”

무심하게 흘러나오는 대답이 가슴아프다. 재중은 다시 물었다.

“ 평생이라도요? ”

“ 평생이라도. ”

당신은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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