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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104화 (104/123)

거짓말 3부 29편

쏴아아아……

계속되는 빗소리를 들으며 재중은 침대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간밤의 일은 기억이 흐릿하다.

머릿속이 잔뜩 젖은 솜처럼 무거워서 도무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재중은 느릿하게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손끝하나 움직이는 것조차도 힘겹다.

……아파……

몸 구석구석 쑤시지 않은 곳이 없다.

“ ……아아…… ”

재중은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집안은 조용하다. 그 사람은 어디로 간 걸까. 분명히 어제 저녁에 나를 안아줬었는데.

기억이 흐릿하게 끊겨 있었다. 재중은 누운 채 열심히 생각을 떠올렸지만 도무지 마지막의 기억이 없다.

잠들어 버린 걸까.

재중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기대를 했었는데, 정작 그 때가 오니까 잠들어 버리다니.

한심해.

재중은 우울해졌다. 몸도 아프고 비도 오고…… 침대에서 나가 식사라도 해야 했지만 도무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어려웠다. 재중은 일어나려던 것을 포기하고 침대에 깊이 몸을 파묻었다.

몸은 둔해져 어떤 명령도 따르지 않을 것 같다.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려던 재중은

그러나 아련히 무슨 소리를 듣고 다시 눈을 떴다.

……초인종 소리……?

멍하니 누워 생각했던 재중은 놀라 벌떡 일어나려다 엉거주춤 멈춰 섰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다.

발을 질질 끌며 억지로 침대에서 나와 문으로 다가갔다. 떠오르는 사람은 오직 한 명.

재중은 기대에 부풀어 무너지려는 몸을 채찍질 해 현관으로 향해갔다. 그 사이에도 초인종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달칵.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열었던 재중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렇지……

그는 자신의 집인데 초인종을 누를 리가 없잖아…… 바보같이…… 멍

하니 생각하며 눈만 깜박이는 재중을 향해 창민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 ……오랜만이야. 들어가도 괜찮을까? ”

윤호는 마지막 서류에 급히 서명을 했다. 새벽부터 내리던 비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오기 전까지 재중이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긴 했지만 역시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혼자 남겨져 있는데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어쩌나. 윤호는 일이 밀려 하는 수 없이 회사에 나와야 했던

자신에 대해 짜증이 났다. 이런 일들은 대충 넘어가도 될 텐데. 예전에 사소한 서류 한 장이라도 세심하게 훑어보던

그로서는 꽤나 급변한 태도였다. 서류의 정리를 끝내자 때를 같이 해 전화벨이 울렸다.

희태가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연결하는 소리다.

“ 무슨 일이지? ”

버튼을 눌러 신경질적으로 물은 윤호에게 희태가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 윤화기업의 신회장님이십니다. 전화 연결할까요? ”

몸이 달았군. 윤호는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연결음이 들리며 다급한 음성이 이어졌다.

“ 윤호 자네, 이럴 수가 있나? ”

초조함과 불안이 뒤섞여 앞뒤없이 덤벼든 음성에 윤호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 오랜만입니다 신회장님. 별고 없으십니까? ”

“ 지금 안부를 묻자고 전화한 게 아니야! 자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우리 지영이랑 파혼할 때도 그렇고, 너무한 게 아닌가?! ”

물어뜯을 듯이 덤벼드는 그의 음성에 윤호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 어차피 사업이란 전쟁이 아닙니까? 이기고 지는 것 외에 길은 없는 법이죠.

유감스럽게도 회장님께서 제게 진 겁니다. 저도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

“ ……내 기업을 어떻게 하려는 건가. ”

보지 않아도 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으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윤호는 차가운 미소를 띄며 말했다.

“ 분해할 겁니다. ”

“ …… ”

“ 하나 하나 갈가리 찢어서 배분할 예정입니다. ”

“ 정윤호 이 자식! ”

분을 참지 못하고 그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윤호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 내일까지 600억을 준비하시기만 한다면 회장님이 이기시는 겁니다.

오히려 그 때는 제가 수세에 몰리겠지요. 아직 시간은 있어요. ”

“ 이…… 이 놈…… 이 발칙한 놈…… ”

분노가 가득 실려 떨리는 그의 음성을 받아 윤호가 말했다.

“ 행운을 빌겠습니다. ”

그리고 윤호는 좀 더 뭐라고 소리치려는 그를 무시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낭비했다. 창 밖으로 계속 쏟아지는 비를 힐끗 본 윤호는 서둘러 일어나 슈트를 걸쳤다.

벌컥―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희태가 벌떡 일어선다. 윤호는 그의 곁을 지나치며 말했다.

“ 급한 건 먼저 끝냈으니까, 일이 있으면 집으로 전화 줘. ”

“ 알겠습니다. ”

깊이 허리를 숙이며 말하는 그를 뒤로 한 윤호는 잰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재중과 창민은 서로 마주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하기만 하다가

그 흔한 차조차도 내주지 않는 재중에게 창민은 농담처럼 말했다.

“ 너무하군, 커피조차 주지 않는 거야? ”

“ …… ”

대답하지 않는 재중을 향해 창민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재중은 그의 말을 기다리면서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어째서 이렇게 마주 앉아 있게 된 걸까. 무시하고 문을 닫아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까는 그럴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 언제나 재중이 보아왔던 창민과는 다르게

그는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얼굴로

“ ……미안한데, 들어가서 조금만 얘기하면 안 될까? ……네가 싫다면…… 가겠지만…… ”

하고 얘기했던 것이다.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상대에게 도저히 야멸차게 대할 수는 없어서

재중은 대답대신 문을 열어 그를 들여보냈다. 물론 그가 신발을 벗고 거실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언제든 방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는 재중을 보며 창민이 쓴웃음을 지었다.

“ 그렇게 보지 마, 얘기만 할 거라니까. ”

하지만 여전히 고슴도치처럼 온 몸을 곤두세우고 있는 재중을 보고 창민은

최대한 그에게서 거리를 두고 돌아서 소파에 앉았다.

“ 이러면 되겠지? 이제 얘기를 좀 하지. ”

그가 정말로 얘기만을 할 건지 아직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재중은 엉거주춤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리고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창민이 차를 달라고 말했지만 재중은 대답하지 않았다.

“ ……걱정했어. ”

한참만에 입을 열었던 창민이 말했다.

“ 갑자기 네가 없어지고…… 같이 있던 녀석은 사고가 났다고 해서…… 정말, 많이 걱정했어. ”

재중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라고 생각해서…… 미치는 것 같았지. ”

그래, 나는 아마도 저 말을 기대했을 거야.

재중은 어렴풋이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말을 기대한 상대는 당신이 아니었어……

재중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말을 단 한 번도 해 준 적이 없었던 그를 생각하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창민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괜찮은 거 보니까 다행이야…… 아니, 몹시 아팠다는 얘기는 들었어. 하지만 지금은…… 많이 나은 것 같으니까…… ”

“ 할 얘기는 그것뿐인가요……? ”

피곤한 음성으로 물은 재중에게 창민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깎지껴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 ……그래…… 아니…… 네가 괜찮은 걸 보니까 안심했어. ……윤호와의 일이 잘 된 거 같기도 하고…… ”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재중은 얼굴을 찡그렸다.

“ 잘 되다니, 뭐가요? ”

조금 날카롭게 새어 나와버린 재중의 말에 창민이 고개를 들었다.

“ 윤호가 너와 함께 있는 거 말이야. ……녀석이 얘기 안 했어? ”

“ 무슨 얘기를…… ”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채 눈만 깜박거리는 재중을 보고 창민이 오히려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 이런, 하여간 그 자식은…… ”

창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 그 때 나와의 일이 있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그 자식 제정신 아니었어.

정말 미친개처럼 날뛰더라고. 언제나 냉철한 이성, 하면 정윤호였는데 말이지.

어떤 일에도 그렇게 흥분하거나 망가지는 꼴은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

재중은 멍하니 창민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 그 녀석이 고집도 세고 자존심도 강해서 먼저 얘기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먼저 말을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

왜 이 사람은 내게 이런 말을 할까.

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으면서. 저런 말이 무슨 도움이 될 거라고.

하지만 재중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심 기대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자신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는데 창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 내가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내가 보기엔…… ”

찰칵.

그와 동시에 열쇠소리가 났다. 재중과 창민은 동시에 놀란 얼굴로 현관을 향했다.

3중으로 된 열쇠 중의 두 번째가 돌아간다.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가려 했다.

이번엔 진짜야. 정말로 그가 온 거야.

반가운 마음에 그는 급히 서둘렀지만 그만 다리가 엉켜버렸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재중을 보고 창민이

놀라 일어나 그를 붙잡았지만 역시 균형을 잃어버렸다.

“ 위험해…… ”

콰당탕―

큰 소리가 나고 창민과 재중은 그대로 바닥에 굴러버렸다.

“ 아야…… 아…… ”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삼킨 재중의 위에서 창민이 역시 둔하게 울려오는 통증을 겨우 참고 물었다.

“ 괜찮아? ”

“ 에, 에에…… ”

재중은 눈물이 찔끔 나와버렸지만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이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것은 그 때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재중과 창민은 창백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윤호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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