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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99화 (99/123)

거짓말 3부 24편

집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그들은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인찬이,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 ”

대문 앞에서 다시 한 번 다짐한 재중은 인찬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후 벨을 눌렀다.

안에서 흘러나온 음성에 재중은 대답했다.

“ 저 재중인데요, 인찬이 데려 왔어요. ”

대답대신 문이 철컹, 하고 열렸다. 재중은 자꾸 뜸을 들이는 인찬의 등을 밀어 억지로 안으로 들여보냈다.

인찬이 돌아본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울어버릴 것 같아서 재중은 대문을 닫아버렸다.

철컹―

커다란 소리가 울리고 난 후 재중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윤호가 차밖으로 나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중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꼿꼿이 들고 윤호에게로 갔다.

“ 용케 길을 다 아시는군요. ”

한 번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익숙한 길인 듯 무리없이 찾아온 윤호에게 말하자 윤호는 대답대신 다른 말을 했다.

“ 동생이 여기 있는 걸 싫어한다면 데려가도 상관없어. ”

뜻밖의 말에 재중은 잠시 놀랐으나 곧 고개를 가로 저었다.

“ ……졸업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

윤호는 한 번 더 권하려다가 재중의 얼굴이 고집스럽게 굳어있는 것을 보고 그만두었다.

저 아이는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는 법을 너무나 모른다.

때로는 쉽게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는데. 한숨을 내쉬었던 윤호는 재중을 위해 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미끄러지듯 차안으로 들어가자 윤호가 차를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차를 출발시킴과 동시에 전화벨이 울린다.

“ 네, 정윤호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그 건에 관해서는 일임하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

대화의 내용을 알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뱉은 윤호가 다시 핸드폰을 껐다.

윤호의 아파트로 돌아갈 때까지 둘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자

피곤한 기색으로 감사의 말을 웅얼거린 재중은 양해의 말을 하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등뒤로 문을 닫고 서자 고요한 방안에는 적막감만이 가라앉는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다시 찾아오는 시계소리에 재중은 공포심을 억누르려 애썼다.

자신도 모르게 문을 잠궈버린 재중은 곧장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모두 괜찮아……

숫자를 센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어느새 시계소리와 뒤엉켜버려 재중은 비명이 나올 것 같은 자신을

필사적으로 억눌러야 했다.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에 윤호는 고개를 돌렸다. 적막감이 찾아온다. 윤호는 쓴웃음을 지어버렸다.

자고 있는 사이에 덮칠 생각은 전혀 없는데.

나조차 믿지 못하는 걸까. ……하긴, 믿을 행동을 한 일도 없지만.

윤호는 장식장으로 다가가 술병을 꺼냈다. 글래스에 붉은 색의 액체가 채워진다.

마치 그것이 핏빛을 연상시켜서, 윤호는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 ……지금쯤 시작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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