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3부 22편
재중이 퇴원한 것은 그 다음 주 월요일이 되어서였다. 경우는 좀 더 입원을 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윤호는 거절했다.
더 이상 삭막한 하얀 벽안에 그를 가두어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태에게는 월요일에 출근하지 않겠다고 미리 얘기해 두었다. 퇴원수속을 마치고 재중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기다리던
윤호는 갑자기 울려온 전화벨 소리에 핸드폰을 들었다.
“ ……아…… 조간 보셨습니까? ”
서늘한 미소가 지어진 그의 얼굴은 어딘지 섬뜩하다. 재듄은 창가에 기대어 앉아 나즉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아닙니다, 이 쪽에서 당연히 드려야 할 사례인 걸요.
네, 그럼 그렇게…… 믿겠습니다. ”
찰칵.
전화를 끊었던 윤호는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재중이 서 있었다.
사복으로 갈아입었지만 바지도 셔츠도 너무나 헐렁해서 병자임을 감추지 못했다.
예전부터도 그다지 체격이 있는 편은 아니었는데, 하고 생각하며 윤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휠체어를 빌릴까? ”
“ 괜찮아요…… ”
재중은 조심스레 고개를 저은 후 물었다.
“ 저…… 저 때문에 일 미루신 거라면…… 전 괜찮으니까…… ”
“ 신경쓰지 마, 오늘은 비워뒀으니까. ”
“ 그래요…… ”
전날 일을 위해 들여왔던 기기들을 죄다 치웠던 탓에 가져갈 짐이라고는 그다지 없다.
간단히 꾸려진 가방을 들고 고개를 돌렸던 윤호가 물었다.
“ 뭔가 할 말이 있어? ”
“ ……저기…… ”
재중은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 어디로 가는 건가요…… ”
“ 내 아파트야. ”
주저없이 대답하는 윤호를 재중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윤호는 더 이상 할 얘기는 없다는 듯 먼저 돌아섰다.
“ 수속은 끝냈으니까 그만 가지. ”
그리고 언제나처럼 앞서가는 윤호의 뒤를 쫓아가면서, 재중은 왠지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상대를 찾으면 항상 호텔로 가는 게 아니었나……?
예전에 윤호와 했던 대화를 떠올리며 재중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병원에서 나왔을 때부터 윤호는 아무 말도 없다. 시종 전방을 응시하며 운전에 몰두해 있는 모습이어서,
재중은 섣불리 말을 걸 수도 없었다.
담배가 거의 다 타들어가자 윤호는 다시 새로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벌써 반 갑은 태운 것 같다.
건강에 안 좋은데, 하고 생각한 재중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저어…… ”
대답대신 슬쩍 시선을 돌린 윤호에게 재중은 어렵게 말을 이었다.
“ 담배…… 그만 피우시면 안 될까요…… ”
몸에 안 좋아요, 하고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윤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물었던 담배를 떼고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윤호가 버튼을 눌러 차의 창문을 모두 여는 것을 보고 재중은 어리둥절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호의 아파트는 외관부터가 일반 아파트와는 달랐다. 이런 거, 펜트 하우스라고 하던가.
재중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삼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지하 주차장에서 곧장 연결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층을 누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는
곧장 최고층으로 향한다. 놀라워하는 재중에게 윤호가 말했다.
“ 전용이야. 한 층에서밖에 안 서. ”
그리고 그 한 층이란 최고층, 즉 윤호가 사는 곳이었다. 한 층을 모두 사용하고 있는 그의 아파트는
거실 하나가 집 한 채를 방불케 했다. 재중은 마른침을 삼키고 겨우 말했다.
“ 집이…… 굉장히 크네요…… ”
익숙한 태도로 거실을 가로질러가던 윤호가 흘깃 돌아보았다.
“ 글쎄, 중학교때부터 살았던 곳이니까. ”
“ 중학교요? ”
새삼 놀라며 재중은 자신이 윤호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자각했다.
윤호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돌아서서 어느 방 앞에 섰다.
“ 이 방을 쓰도록 해. 우선 네가 쓸만한 것은 모두 준비해 뒀지만 또 필요한 게 있다면 얘기하고. ”
쭈삣거리며 엉거주춤 고개를 들이밀었던 재중은 놀라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넓다란 방에는 킹 사이즈의 침대가 놓여 있고 벽 한 쪽에 차지한 거대한 창문과 그에 맞닿아 있는
역시 거대한 사무용 책상. 최신 기종의 컴퓨터가 놓여진 책상은 충분히 넓어서 컴퓨터를 올려놓고도 반 이상이 남아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했다. 게다가 창문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귀여운 화분이라니!
재중이 고개를 돌려 그것에 관해 묻자 윤호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 ……전자파 차단에 좋다고 해서. ”
알면 알수록 세심한 사람이다. 재중은 기쁜 한 편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일까. 처음 그가 나를 구해줬다는 걸 알았을 때도 역시 황당했지만 지금 이 상황에 비하면 그건 애교다.
“ ……저어…… ”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줘요?
“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
정작 속에 숨은 말은 하지 못하고 재중이 겨우 말했다. 윤호가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재중은 어렵사리 다음 말을 이어갔다.
“ ……동생을…… 계속 못 만났어요…… ”
윤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동생이 있다는 보고는 이미 들었었다. 당장 재중의 일에 눈이 멀어 미처 살피지
못했지만. ……실수다. 윤호는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재중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면서 또 다른 오해를 했다.
“ 저, 저어…… 혼자 다녀올 수 있으니까…… 폐 끼치거나 하지 않을께요…… ”
잔뜩 주눅이 들어 말하는 그를 보며 윤호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같이 가지. ”
“ ……아…… 아니오…… 괜찮아요…… ”
“ 동생은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이지? 지금 출발하면 하교시간에 맞출 수 있겠군. ”
앞서서 걸어가는 윤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재중은 눈만 깜박였다. 어떻게 인찬이에 대해 알고 있지?
다시 만나게 된 윤호는 정말 이전과 너무 다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재중은 갑갑해하면서 불안한 얼굴로 그의 뒤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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