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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96화 (96/123)

거짓말 3부 21편

달이 크게 기울은 밤이었다. 어디선가 멀리서 가야금소리가 들려오는 고급 요정.

거대한 한옥은 방마다 방음장치가 철저하게 되어 있어 밀담을 나누기엔 아주 적합하다.

한복을 입은 여자가 우아하게 술을 따라준다. 건너편에 앉은 사내는 얼굴에 길게 흉터가 새겨져 있어

인상이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여자가 따라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상대편에게 말했다.

“ 그런 조무래기를 내게 의뢰하다니, 당신 간이 크군. ”

“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이해하고 있소. ”

상대편에 앉은 남자는 눈에 띄게 핸섬한 얼굴이었지만 눈매가 가늘고 긴 데다 가는 은테안경을 써서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이 더 강해 보였다. 그는 눈가를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으나 그것은 어딘지 섬뜩했다.

“ 그래서 그만큼 더 후하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 아니겠소? ”

“ 얼마나 후한지 들어보기나 하지. ”

콧방귀를 끼듯 시니컬하게 말한 그에게 윤호는 미소지었다.

“ 윤화기업 정도라면 어떠신지? ”

사내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윤호는 여전히 여유 있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 일만 제대로 성사된다면 거기에 별도의 사례까지 하지요. ”

“ ……당신…… 보통 사내가 아니로군. ”

그는 감탄하면서도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 섣불리 일을 맡으실 수 없을 테니 물론 증거는 보여주겠소. 월요일 조간을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

윤호의 시원시원한 말에 그는 물었다.

“ 당신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소.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군,

그까짓 조무래기들에게 그렇게까지 쏟아붓는 이유가 뭐요? ”

윤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지어졌다.

“ 내 가장 소중한 것을 망친 댓가지요. ”

윤호는 사이를 두고 빙긋 웃었다.

“ 그럼 조간을 보신 후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그는 인사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나가고 난 후 그의 뒷모습을 함께 바라보던 측근이

사내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 진심일까요? ”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 술김에라도 허튼 소리는 하지 않을 타입이야. 저런 스타일들은 최대한 말을 아끼면서 절대 직접 나서지 않지.

……천성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몸에 배인 부류들이야. 씨팔, 누군지 단단히 걸렸군. ”

그리고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팔짱을 꼈다.

“ 제길, 윤화기업이라니 탐은 나지만 고작 잔챙이 하나 잡고 받으려니 영 내키질 않는군.

……이봐, 그 자식 백구랑 아는 사이라고 했던가? ”

“ 네, 지금 당장 착수할까요? ”

“ 그래. 조간이 떠서 사실확인하자마자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놔. ”

“ 알겠습니다. ”

윤호는 병원의 긴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라 병원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병원을 비운 것은 불과 3-4시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피가 마르는 것 같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달칵……

재중이 자고 있을 것을 예상하며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던 윤호는 창가에 멍하니 서있는 재중을 발견하고

놀라 서둘러 다가갔다.

“ 왜 그러지? 잠이 오지 않나? ”

조용하게 묻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얼마 전 사건이 있었던 후로 인위적인 상처가 난 팔에는

두터운 붕대가 둘러져 있다. 재중은 잠시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윤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누군지 기억을 더듬는 것 같은 기색이다.

“ ……아…… ”

그는 한참만에 조용히 말을 내뱉더니 고개를 숙였다.

“ 안녕하세요…… ”

“ ……나…… 알아보겠어? ”

그가 온전히 한 마디의 말을 한 것만으로도 믿을 수 없어하며 윤호가 성급히 물었다.

재중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여기…… 병원인가요……? ”

“ 그래. ”

“ ……어떻게…… 여기…… ”

“ ……네가 많이…… 다쳐서, 치료하려고…… 입원해 있는 거야. ”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겨우 말을 이은 윤호를 재중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눕도록 해, 아직 성치도 않은데 그렇게 오래 서있는 건 좋지 않아. ”

윤호는 그렇게 말하고 재중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가볍게 그를 안아들었다. 앙상하게 마른 몸이 안쓰럽다.

윤호는 한창 성장기의 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라버린 그의 가는 몸을 안고 침대로 향했다.

다행히 링거줄이 길어서 뽑히지는 않았지만, 팽팽히 당겨져 있던 것을 확인한 윤호가 침대에 그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 함부로 다니지 마, 주사가 뽑히면 큰일나니까. ”

“ ……소리가…… 들려서…… ”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 소리라니? ”

귀를 기울여 봤지만 들리는 것이라고는 없다. 재중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 시계소리가 들려요…… ”

“ 시계는 이 방에 없어. ”

윤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 그 자식들도 여긴 오지 못해. 알겠어? 넌 안전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넌 괜찮아. ”

“ ……하지만…… 계속해서 들리는데…… ”

윤호는 초점이 모호한 재중의 눈을 보고 그가 현실과 환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윤호는 참담한 심정으로 침대가에 앉아 똑바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 내가 누군지 알겠어? ”

“ ……예…… ”

“ 누구야? ”

“ ……정…… 윤호…… ”

그의 입에서 겨우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에 윤호는 심장 한 쪽이 저려오는 기분이었다.

그 때 재중이 멍하니 다시 물었다.

“ 건우는……? ”

순간 윤호는 그 동안 재중의 행동이나 말 한 마디로 위로 받았던 자신이 삽시간에 무너져버리는 것을 깨달았다.

그토록 간절히 그의 곁을 지켰는데,

정작 그는 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걸까. 통증을 호소하는 심장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윤호는 겨우 말했다.

“ 죽었어. ”

“ ……그래요…… ”

재중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 울지 마. ”

윤호는 재중이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이미 죽은 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우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았다. 그로 인해 자신이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짐작하게 만들어 주니까.

재중은 윤호의 딱딱한 말투에 애써 울음을 참았지만 흐느낌이 새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나 때문이에요…… ”

“ …… ”

“ 건우야…… ”

밤새 재중은 작게 흐느꼈지만 윤호는 그런 그를 위로하지도 못한 채 비참한 심정을 곱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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