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3부 20편
……목이 말라……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재중은 겨우 눈을 떴다. 버티칼이 처져 있는 창 밖은 새까매서,
아직 새벽까지 시간이 남아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생소한 곳에 와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순간 재중은 흠칫했다. 공포에 질린 눈이 시계를 향한다. 3시.
지금은 밤이야.
그는 겨우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직 괜찮을 거야. 아무 일 없을 거야. 아직은 괜찮을 거야……
하지만 만약에 저녁이 아니라 새벽이라면 어쩌지? 그들이 새벽에 오는 거였으면 어떻게 해?
아니, 어쩌면 하루에 한 번 오는 게 아니었을지도 몰라.
여기서는 밤도 낮도 알 수가 없어. 그저 들리는 것은 시계소리뿐.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간뿐.
……그들이 오는 시간뿐.
달아나야 하는데. 어서 달아나야 하는데. 몸이 왜 이렇게 무거울까. 어째서 이렇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걸까.
이제 눈꺼풀마저 무거워 재중은 다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 ……흐윽…… ”
흐느낌이 비어져 나왔다. 지독한 통증이 온 몸에 번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오늘은 죽을 수 있을까. 그러면 이 고통도 끝날까. 제발 오늘 죽여줬으면. 어떤 행위가 이어져도
오늘은 죽을 수 있었으면. 이제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인데, 어째서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갑자기 누군가 손을 잡는다. 재중은 흠칫 놀라 몸을 경직시켰다.
“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
부드러운 목소리. 분명히 들은 기억이 있는데 왜 생각나지 않는 걸까. 긴장된 마음을 안정시키는,
그러면서도 눈물이 날 것같이 저미게 하는 낮은 음성. 이건 누구의 목소리였지……?
“ 아픈가? 힘들어? ”
다시금 묻는 부드러운 음성에는 초조함이 묻어 있다. 재중은 겨우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아 상대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입술을 달싹여 보지만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 응? 뭐라고? ”
그가 고개를 숙여 귀를 가까이 가져왔다. 재중은 힘겹게 속삭였다.
“ ……다섯 시…… ”
“ ……? ”
“ ……그들이 올 거야…… ”
“ …… ”
“ ……나를 죽일 거야…… ”
겨우 속삭인 재중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의식이 가라 앉아버린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윤호는
그제야 발작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 ……빌어먹을…… ”
윤호는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흉악한 그의 얼굴이 마치 악귀 같다.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며 윤호는 다짐했다.
“ 약속해, 그들 중 누구도 절대로 그냥 죽게 하지 않겠어. ”
그러고서 재중은 전보다 자주 의식이 깨이곤 했지만 언제나 같은 시간에 발작을 일으켰다.
시계를 없앴음에도 그는 시계소리가 들린다고 소리지르기도 하고 공포에 떨기도 했다.
여전히 윤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는 그저 재중의 의식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한다고
몇 번씩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팔의 상처에 대해 경우는 말했다.
“ 일단 수술부위도 그렇고, 몸이 좀 나아져야 그 쪽을 건드릴 거 아니야. 좀 기다려.
……씨발, 산부인과 빼고 과마다 다 보게 생겼네. ”
윤호는 차마 재중의 곁을 비울 수가 없었지만 언제까지나 병원에서만 회사일을 처리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회사에 가 일을 하고 대신 서둘러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던 어느 날,
윤호는 희태로부터 기다리던 정보를 들었다.
“ 그 쪽 파의 간부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매화각에서 약속을 잡았습니다. ”
대개 사업상의 밀담이나 고위 정치가들이 애용하는 요정에 대해 말한 희태에게 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 기대되는 군. ”
회사일을 일찌감치 끝내고 병원으로 돌아갔던 윤호는 재중이 침대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 급히 그를 찾았다.
링거줄은 또다시 뽑혀서 바닥은 피가 흥건하다. 피는 침대에서 화장실로 이어져 있었다.
“ 이봐…… ”
급히 달려가 소리친 윤호는 순간 놀라 하얗게 질려버렸다. 재중은 멍하니 세면대에 기대어 서있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뜨거운 물에 두 팔을 담그고 계속해서 문지르기만 한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두 팔은 벌겋게 익어있고 살갗이 일어나 피가 흐르는데도 재중은 계속 닦고 있었다.
“ 뭐하는 짓이야?! ”
다짜고짜 뛰어들어 그를 낚아챈 윤호가 소리쳤다.
하지만 재중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 안 지워져…… ”
팔 안 쪽은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벌겋게 익어있었지만 새겨진 글자는 지워지지 않았다.
다시 손을 들어 팔을 문지르려는 재중을 억지로 붙잡아 침
대로 데려갔다.
“ 이거 놔요…… ”
재중은 반항했지만 아직 몸이 온전하지 못해 그다지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침대에 내던지다시피 눕혀진 재중은 다시 팔을 들어올렸지만 윤호에 의해 제지당했다.
윤호는 재중의 몸 위로 올라와 그의 손목을 각기 붙잡고 사나운 눈길로 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잘 들어, 이건 가짜야. 곧 사라질 상처에 지나지 않아. 내가 낫게 해줄 거야.
아예 없애줄 거라고. 넌 남창이 아니야, 알겠어? 그 새끼들이 너에게 어떤 짓을 했건,
무슨 소리를 지껄였건, 넌 아니란 말이야. 결코, 결코 아니야……! ”
어느샌가 윤호의 목소리는 격하게 흩어져 나왔다. 재중은 여전히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윤호의 손에 강하게 붙잡힌 손목이 아프다. 재중은 그에게서 손을 빼내려 애썼지만
아파서인지 아니면 다시 손목의 글자를 없애려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뜨거운 것이 얼굴에 떨어진다. 재중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어느새 윤호가 그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의 진동이 느껴진다.
……이상하구나……
재중은 멍하니 생각했다. 이 목소리도, 얼굴도 무척이나 낯익다.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어.
아련하게 기억 속에서 부옇게 그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신은 아닐 거야……
그 사람이 나를 안고 이렇게 울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그 사람은 당신이 아니야……
재중은 다시 눈을 감고 잠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