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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84화 (84/123)

거짓말 - 3부 9편

부산한 발소리에 윤호는 잠에서 깨었다. 비서가 출근을 한 모양이다.

손으로 눈두덩을 문지르며 피로한 눈을 깜박였다. 호텔에 체크 아웃을 한 후, 아파트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이래서 습관이란 무서운 거야, 하고 윤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누군가 기다려주던 것이 습관이 되어서,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귀가라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마음 한 구석이 텅 비는 것 같았다.

덕분에 그는 최근 집에 들어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사무실에 앉아 늦게까지 멍하니 담배를 피울 때도 있고,

그러다 보면 어느 새 깜빡 선잠이 들곤 한다. 피곤한 머리는 야속하게도 꿈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빈 담배갑이 잡히는 것을 깨닫고 윤호는 혀를 찼다.

의자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갔다. 벌컥 문을 열자 때마침 책상을 걸레로 닦고 있던 비서가

행동을 멈추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 또 사무실에서 주무셨습니까? ”

“ 담배 있어? ”

비서의 말을 무시하고 묻는 윤호에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 있습니다만 드릴 수 없습니다. ”

“ 하? ”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하는 윤호를 보며 그는 말했다.

“ 최근 부쩍 담배가 늘으셨습니다. 저번에는 세 갑도 넘게 피우시던데, 곤란합니다.

오늘부터 담배를 줄이시도록 적극 관여할 예정입니다. ”

“ 네가 무슨 권리로? ”

무척이나 감정이 상한 듯 이를 갈며 묻는 윤호에게 그는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 권리는 없지만 의무는 있습니다. 사장님께서 혹여 폐암이나 기타 질환으로 일찍 세상을 등지게 되시면

저는 졸지에 실직하게 됩니다. 남의 귀한 자식 얻어다 힘들게 마누라 삼았는데 고생시킬 수 없지 않습니까. ”

“ 지금 잘라버릴 수도 있어. ”

“ 부당 해고로 고소 당하고 싶으시면 그래도 좋습니다. ”

윤호는 만만치 않은 비서를 한참동안 노려보다가 난폭하게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담배가 없으니 기분이 영 저조하다.

초조함을 지나쳐 마구 스트레스가 쌓이는 기분이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때마침 비서가 녹차를 타서 들어왔다.

“ 커피보다 녹차가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담배가 생각나실 때는 이것을……. ”

녹차와 함께 은단을 내려놓는 비서를 보고 윤호는 너무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어버렸다.

“ 아침을 대용하실 뭔가라도 드시겠습니까? ”

뻔뻔할 정도의 강철신경을 가진 비서에게 결국 두 손 들어버린 윤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됐어, 그보다 다른 일을 해줄 게 있는데……. ”

“ 말씀하십시오. ”

윤호는 밤새 생각했던 단 하나의 일을 어렵게 입에 올렸다.

“ ……그 애가…… 있는 곳에 가서…… 잘 지내는지…… 알아봐 줘. 나를 보면 싫어할 테니까……

네 얼굴은 모르니까 괜찮을 거야……. 그리고 어느 복지가가 후원을 원한다고……

그냥 받는 게 싫으면 빌려주는 것으로 하고…… 이자는 없으니까 언제든…… 편할 때 갚으라고……. ”

“ 알겠습니다. ”

비서인 정 희태는 윤호의 명령으로 이전에 재중의 행방을 찾느라 이미 그의 얼굴과

그가 건우라는 동급생과 함께 지낸다는 것, 또한 사는 곳까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비서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외면한 채 중얼거린 윤호의 말을 모두 알아들은 그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등뒤로 문을 닫고 나오면서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정말 여러 모로 손해다. 윤호에 대해 이미 충분히 알고 있지만,

알면 알수록 스스로 손해를 일으키는 사람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가끔은 솔직해져도 좋을 텐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원.

그는 스케줄표를 점검했다. 점심 전에 서둘러 다녀오면 괜찮을 것 같다. 평일이니까 학교에 있겠지.

집을 먼저 대강 둘러보고 학교 끝날 때쯤 가서 요령있게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역시 요령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내임에는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암담해하면서도 일단 재중이 살고 있는 건우의 하숙집으로 향했다.

미련을 끊지 못하다니, 어리석어.

윤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완벽하게 채여놓고선,

그래, 나는 결국 이렇게나 어리석은 사람인 거야……

한숨을 내쉬고 습관처럼 담배를 찾았던 윤호는 다시금 담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 은단이라니, 바보취급하는군 정희태. ”

어쩔 수 없이 은단을 집어 입에 넣으면서도 윤호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주소만 들고 건우의 집으로 향했던 희태는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집 앞에는 엉망으로 부서져버린 오토바이가 초라하게 뒹굴고 있다. 아스

팔트에 온통 검붉은 것이 깔려 있다.

……이거…… 피?!

희태는 얼굴을 찌푸렸다. 동네에서 개라도 잡았나…… 그렇다고 길에 이렇게…….

별로 기분이 좋지 못했다. 그는 바닥에 깔려 있는 핏자국을 피해 걸으며 건우의 하숙집을 밖에서 살펴보았다.

조용한 것을 보니 이미 학교에 간 모양이다. 학교로 갈까, 하고 돌아섰던 희태는 때마침 옆집에서

나온 웬 아줌마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 여기 학생 찾아왔수? ”

“ 아…… 예. ”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탐색하듯 희태를 바라보았다.

“ 무슨…… 사인데요? ”

“ 후원회에서 왔습니다. ”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거짓말에 그녀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말했다.

“ 죽었어요. ”

“ 네? ”

희태는 놀라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 2-3일 전이던가. 갑자기 뭐 때려부수는 소리나고 비명같이 엄청나게 소란스럽더니……

그래서 창으로만 봤는데 그 학생 하나 놓고 어찌나 패대는지

…… 119를 부르긴 했는데, 벌써 죽었었더라구. ”

“ ……함께 살던 다른 학생은요? ”

“ 나는 못 봤는데, 내 딸이 보기로는 웬 놈들이 끌고 가더라는군.

……불쌍해서 어떡해, 착한 학생이었는데…… 좀 불량해 보이긴 했지만서도 예의도 바르고 훤칠하니 생긴 것도

잘 생겼었구만…… 에이, 쯧쯧…… 세상이 험해서……. ”

그리고 몇 마디 말을 더 덧붙이는 그녀에게 대충 감사의 말을 한 희태는 사색이 되어 급히 동네를 빠져나갔다.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이 있었나? 그러고 보니 그 건우라는 녀석, 무슨 조직에 있었던가……

뒤늦게 조사했던 자료를 떠올린 희태는 이번에는 급히 학교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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