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3부 3편
종소리가 들려왔다. 교문 앞에 서서 인찬이를 기다리고 있는 재중의 마음은 어딘지 두근거렸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보면 인찬이는 얼마나
좋아할까. 슬쩍 옆을 보니 건우는 교문에 기대어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좋은 날씨, 좋은 기분. 이렇게 나른한 행복도 나쁘지 않다. 그와 함께 있을 때처럼 벅찬 두근거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행복도 느껴지지 않지만, 그 대신에 이런 편안하고 나른한 기분도 익숙해지면 좋은 것이다.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길 때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이내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을 하나씩 세심하게 훑어보면서 인찬이를 기다렸다.
“점심먹고 셋이 오락실 갈까? ”
“ 오락실은 안돼, 애 버려. ”
건우의 제안을 한 마디로 거절하자 건우가 투덜거렸다.
“ 요즘에 너처럼 고리타분한 애도 없을 거야. ”
“ 그럼 넌 들어가든가. ”
샐쭉하게 말하자 건우는 한숨을 내쉰다.
“ 삐지는 것도 만만치 않아. ”
또 한 마디 하려는데 때마침 멀리서 걸어오는 인찬이가 보였다. 재중은 반가운 마음에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 인찬아! ”
고개를 푹 숙이고 느릿하게 걷고 있던 인찬이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다.
놀라 커진 눈에 가득히 재중의 모습이 비쳐졌다.
“ 형! ”
인찬이 갑자기 달리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재중에게 달려들었다.
“ 형! 형! 형! ”
“ 잘 지냈어? ”
“ 형, 어떻게 왔어? 응? ”
“ 오늘 학교 쉬는 날이라서 우리 인찬이 마중 왔지. ”
꼭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인찬을 겨우 떼어내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
인찬 역시 재중의 볼에 뽀뽀를 하고 목을 꼭 끌어안았다.
“ 부자지간도 그렇게는 못 할 거다. ”
옆에서 투덜거리는 건우의 말을 무시하고 재중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갑자기 누군가 끼어 들었다.
“ 방정맞게 뛰어가더라니, 누구냐? 홍 인찬. ”
도전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꼬마녀석을 내려다본 재중은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또래치고는 꽤 키가 큰 두 녀석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쪽은 눈매가 매섭게 뻗어있어서 나이가 들면 한 인상하게 생겼다.
다른 쪽은 반대로 둥근 눈매라 웃으면 반달형으로 예쁘게 접어질 것 같은 눈을 가졌지만
역시 지금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앞의 녀석이 남자답게 잘 생긴 얼굴이라면
뒤의 녀석은 곱상하게 생겼지만 성격은 만만치 않게 보였다. 먼저 입을 열었던 앞의 녀석이 말을 계속했다.
“ 웬일로 찾아오는 사람이 다 있어? ”
재중은 굳어있는 인찬의 얼굴을 보고 어렴풋이 예전에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 혹시…… 네가 진규니? ”
“ 제가 현 진규예요. 얘는 백 경헌이구. ”
옆에 빠져 있던 곱상한 녀석이 말했다.
전에 경헌이라는 녀석이 인찬을 놀린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재중은 어렵게 미소를 지으며 인찬을 안고 있는 손 대신 다른 손을 내밀었다.
“ 인찬이랑 같은 반이니? 난 인찬이 형이야. 반갑다. ”
진규와 경헌이는 내밀어진 재중의 손을 바라보더니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재중은 불쾌했지만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화를 낼 수도 없어 참고 다시 말했다.
“ 악수 안 할 거야? ”
겨우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일그러져 있는 그의 얼굴을 향해 경헌이 노려보며 말했다.
“ 호모랑은 악수 안 해요. ”
재중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등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 애가? 옆에 서 있던 진규라는 애가 천진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 형은 남자 상대로 돈 번다면서요? 누가 그러는데, 그런 거 남창이라고 하던가. ”
“ …… ”
“ 사전 찾아봤더니, 娼이라는 말이 몸파는 여자, 라는 뜻이던데요. 그럼 형이 아니고 누나네. ”
재중은 화를 참지 못하고 나서려는 건우를 붙잡았다. 핏기라고는 전혀 없이 창백한 얼굴로 겨우 입을 열었다.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떨리는 것을 겨우 억눌러 애써 침착하게 말하는 재중의 얼굴은 가면처럼 무표정했다.
“ 누가 그런 말을 해? ”
진규와 경헌은 서로 마주보더니 진규는 피식 웃고 경헌이 대신 대답했다.
“ 안 가르쳐 줄래요. ”
“ 이 자식…… ”
“ 그만 둬, 이 건우! ”
재중이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건우는 주먹을 휘두르고 말았다. 거친 바람소리가 들리고 주먹이 크게 스윙을 한다.
예상했던 일인 듯 경헌과 진규는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경헌은 주먹 끝에 얼굴이 걸리고 말았다.
퍽―
스쳐간 주먹인데도 데미지는 상당한 듯 경헌이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이번엔 진규 쪽으로 주먹을 휘두르려는 건우를 좀 더 세게 제지한 재중이 소리
쳤다.
“ 그만 하라고 했잖아! ”
“ 하지만…… ”
건우는 반발하려다 재중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말을 멈췄다.
“ 제길. ”
홧김에 땅을 걷어차고 돌아서버린 건우를 대신해 재중이 심호흡을 사이에 두고 말했다.
“ 너희들이 그런 소리를 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너네 인찬이랑 꽤 친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좋지 않아. ”
입술이 터져 피를 뱉어낸 경헌을 보고 진규가 말했다.
“ 꽤 강한 사람을 기둥서방으로 두고 있네요. ”
재중은 기가 막혔다. 뭐 저런 애가 다 있을까. 아직 초등학생인 주제에.
그런 그의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진규가 피식 웃었다.
“ 지금은 우리가 어리게 보이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신 눈 높이보다 더 높게 자랄 거예요.
그 때는 그렇게 쉽게 우리한테 훈계하지는 못 할 걸요. ”
이렇게 되바라진 애는 처음이다. 재중이 말을 잃고 있는 사이에 진규가 아직 재중에게 안겨있는 인찬을 향해 말했다.
“ 지금은 거기 숨어 있으라구, 홍김 인찬. 조만간 끌어내줄 테니까. ”
진규의 악의에 찬 눈빛을 보고 재중은 순간 섬뜩했다. 이 애가 정말로 초등학생이 맞는 건가?
그러나 진규는 언제 자신이 그랬냐는 듯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 기대해. ”
그리고 진규는 돌아서서 경헌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경헌은 그 손을 뿌리쳤다.
“ 빌어먹을. ”
경헌은 벌떡 일어나 건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 다음에 배로 갚아줄 거야. ”
그리고 경헌은 먼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쫓아가던 진규는 슬쩍 뒤를 돌아 재중과 건우를 훑어보더니
다시 인찬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인찬이 움칠한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드는 듯 그는 씨익 웃고 돌아서서 경헌을 쫓아갔다.
“ ……하아…… ”
피곤한 얼굴로 이마를 문지르며 재중은 암담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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