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2부 41편 (2부 끝)
윤호는 호박색 액체가 담긴 글래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습관처럼 찾은 바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정작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를 앉아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누군가 윤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 여기 있었구나, 꽤 찾아다녔다. ”
윤호는 당연하게 옆에 앉은 창민을 초점이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창민이 다시 묻는다.
“ 비서가 그러는데 급한 볼 일 있다고 나갔었다며. 일은 잘 됐어? ”
그게 무엇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 묻는 창민의 얼굴은 어딘지 씁쓸했다. 윤호가 피식 웃었다.
“ 끝났어. ”
“ 뭐가? ”
뜻밖의 말에 되물어버린 창민을 무시하고 자신의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윤호가 말했다.
“ 나, 채였어 심창민. ”
“ 뭐라고? ”
아까부터 되묻기만 하는 창민이 우습게 여겨져서 윤호는 그만 웃어버렸다.
“ 찾아갔더니, 더 이상 내 곁에 있는 건 싫다고 하더군. ”
“ ……그런…… ”
“ 벌써 새로운 녀석이 생긴 모양이던데. ”
여기까지 말하고 잔을 들이마신 윤호를 보고 창민이 버럭 소리쳤다.
“ 그럴 리가 없어! 그랬다면 그건 진심이 아닐 거야. 좀 더 강하게 잡아보지 그랬어?
너 도대체 그 애한테 뭐라고 한 거야? ”
윤호는 묵묵히 고개를 저은 후 다시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전에는 항상 나를 볼 때마다 긴장하고 울고 그랬는데……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 ”
쓴웃음을 지으며 비어버린 잔을 하나 더 추가하는 윤호의 옆얼굴을 창민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건우는 한참동안 통곡하던 재중이 울다 지쳐 숨을 몰아쉴 즈음에야 비로소 겨우 입을 열었다.
“ 울지 마. ”
수건을 건네주자 재중이 기운 없는 손을 들어 얼굴로 가져갔지만 동작이 어딘지 굼뜨다.
건우는 그런 그를 보며 가슴 아픈 통증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 넌 항상 내 앞에 서면 우는 구나. ”
재중이 아직 흐느낌이 남아있는 얼굴로 씁쓸하게 웃었다.
“ 너도 남이 우는 건 싫어하니? ”
그는 그랬지. 내가 울 것 같으면 그 전에 내게 울지 말라고 얘기했었지.
그래서 나는 참고, 참고, 참아야 했어. 왜 당신은 내가 우는 게 싫었을까.
그저 남이 울면 짜증이 났기 때문인 걸까……?
건우는 상처받은 얼굴로 재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 난 네가 웃었으면 좋겠어. 더 이상 울지 말고, 항상 웃었으면 좋겠어. 내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누구와 함께라도 그렇게 웃기만 했으면 좋겠어…… ”
재중은 건우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 왜 항상 건우의 앞에 서면 나는 울게 되는 걸까.
그만큼 건우가 편하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재중은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너, 나 좋아하니? ”
“ 그래. ”
“ 어느 만큼? ”
“ 내 자신보다 더. ”
재중이 흐느낌 때문에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처절할 정도로 짙게 슬픔이 깔려있다.
“ 난 가끔, 아니 자주, 그를 생각하면서 울 거야. 넌 참을 수 있니? 그렇게 계속, 참아줄 거야?
난 평생 너 사랑 못 할 텐데, 평생 그 사람만 생각할 텐데, 그래도 좋아? ”
자신의 말이 상처가 되어 심장을 찌르는 기분이었다. 다시 눈물이 흘러내린다.
계속해서 흐느끼며 재중은 건우를 향해 말했다.
“ 미안해, 난 이제 누구도 사랑하지 못해. 내 마음은 아주 아주 작아서, 단 한 사람밖에 줄 수 없거든.
그런데 그 사람한테 모두 줘버리고 왔어. 그러니까 너에게 줄 마음이 남아있지 않아.
그래도 좋아? 그래도 괜찮겠어? ”
“ 괜찮아. ”
건우의 음성이 조용하게 내려앉았다.
“ 내가, 네 몫까지 너를 사랑하면 되니까. ”
아직 흐느끼고 있는 재중의 입술에 건우가 조심스럽게 키스를 했다. 재중은 순순히 입술을 연다.
격한 흐느낌 사이사이로 부드럽고 섬세한 키스가 이어졌다.
“ 울지 마. ”
건우가 입술을 떼고 재중의 눈가에 키스를 했을 때에야 비로소 재중은 자신이 다시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건우가 조심스럽게 재중을 바닥에 눕혔다.
건우의 손이 재중의 얇은 셔츠를 밀어 올리고 그 안의 마른 가슴을 쓰다듬었다.
전신으로 이어지는 건우의 키스가 자꾸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해서, 재중은 울고 또 울었다.
창민은 잔뜩 취해버린 윤호를 어깨에 메고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차를 너무 먼 곳에 주차시켜 둔 상태라 상당한 거리를 걸어야 했다. 하지만 윤호는
전혀 운전을 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억지로 끌고 가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너무 취해서 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주제에 윤호는
한사코 자신이 운전을 하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무시하고 계속 걷고 있는데,
갑자기 윤호가 그나마 늘어지던 발걸음을 멈춰버렸다.
“ 그 때도 여기…… 차를 세웠었는데…… ”
자신의 차가 세워져 있는 곳에 멈춰 서서 중얼거리는 윤호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한 창민이 억지로 그를 끌고 갔다.
“ 그 때…… 그 애가 쫓아와서 나를 잡았었는데…… ”
발음이 부정확해서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창민은 묵묵히 그를 끌고 걷기만 했다.
“ 그런데 왜, 지금은 나를 잡아주지 않는 걸까…… ”
이제 모퉁이만 돌면 자신의 차가 있을 것이다. 창민은 한숨을 내쉬며
그 때까지 윤호가 그나마 이런 걸음으로라도 걸어주기만 바랬다.
“ 조금만 더 걸어봐, 정윤호. ”
격려하듯 말했을 때, 또다시 윤호가 걸음을 멈춰버렸다.
“ 왜 그래? ”
창민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윤호는 멍하니 서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창민은 그제야 자신들이 서 있는 레코드 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day after day time pass away and I just can't get you off my mind
매일 매일 시간이 흘러갔어도 난 당신을 내 마음에서 쫓아낼 수 없었지.
nobody knows I hide it inside I keep on searching but i can't find
아무도 몰라, 내가 내 안에서 그토록 찾았던, 하지만 찾을 수 없었던 그것이
the courage is to show to letting you know I've never felt so much love before
and once again I'm thinkin' about takin' the easy way out
바로 내가 예전에 이런 사랑은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당신이 알게 해주고
그것을 당신에게 보여줄 용기와 표현이었다는 것을.
but if I let you go I will never know
하지만 만약 당신을 보낸다면 난 결코 모르겠지.
what my life would be holding you close to me will I ever see you smiling back at me
내 삶에서 내 가까이 당신을 안고 당신의 미소를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how will I know if I let you go
만약 당신을 떠나보낸다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night after night I hear myself say
밤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였지
why can't this feeling just fade away
어째서 이 감정이 사라져주질 않는 걸까
there's no one like you
어디에도 당신과 같은 사람은 없는데
you speak to my heart it's such a shame we're worlds apart
당신은 그것이 우리가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했지.
I'm to shy to ask I'm to proud to lose
나는 자존심이 상할까 부끄러웠어
but sooner or later I've gotta choose and once again
하지만 빠르건 늦건 나는 선택했고 또 같았지.
I'm thinkin' about taking the easy way out
나는 쉽게 표현할 방법을 생각했어.
but if I let you go I will never know
하지만 당신을 떠나보내면 난 결코 모르겠지
what my life would be holding you close to me will I ever see you smiling back at me
내 삶에서 당신을 안고 내 가까이에서 당신이 웃는 것을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
how will I know if I let you go
당신을 보낸다면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if I let you go
당신을 보내버린다면
“ 윤호 너……! ”
창민이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윤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그만 큰 소리로 울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