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2부 40편
“ 오랜만이군. ”
먼저 입을 연 것은 윤호이었다. 재중은 묵묵히 고개를 푹 숙였다.
윤호의 발치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담배꽁초를 보고 그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을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말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만 재중은 도무지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윤호로 인해 도무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는 왜 온 걸까.
조그마한 희망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재중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윤호는 그 때까지 옆에 서있던 건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둘이 할 얘기가 있어서 잠시 비켜줬으면 하는데. ”
모래가 묻어날 것 같이 건조한 음성에 건우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재중이 자신도 모르게 건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건우는 흠칫 걸음을 멈추고 재중을 내려다보았지만 재중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건우의 소매를 붙잡은 채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윽고 재중이 손을 떼었지만 건우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 같이 있어줄까? ”
걱정이 가득 스며든 그의 물음에 재중은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저었다.
“ 괜찮아. ”
건우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윤호와 재중을 번갈아 본 후 안으로 들어갔다.
마주 서 있는 윤호와 재중은 어느 쪽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정말 무척이나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이렇게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다니.
도통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화제를 어떻게든 꺼내보려고 하는 재중에게 갑자기 윤호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내질렀다.
“ 몸이 왜 그래? ”
날이 선 음성에 놀란 재중은 뒤늦게 팔에 아직 남아있는 멍자국을 생각해내고
서둘러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뒤로 숨겼다.
얼마 전 갑작스레 난입한 지영으로부터 당한 구타자국이 아직 모두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반팔이라 멍이 든 팔이 그대로 드러나버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윤호에게 들키다니 왠지 민망했다.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는 재중에게 윤호가 협박하듯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 저 자식이 그랬어? ”
재중은 너무나 어이없는 오해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 건우가 나를 때려요? ”
침묵이 흘렀다. 윤호는 재중의 격한 반응에 자신이 잘못 짚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재중이 자신의 상처에 대해 도무지 말할 기색이 아니었기 때문에 윤호는 화제를 바꿔 다시 입을 열었다.
“ 지내기는 좀 어떤가…… ”
“ 그럭저럭 괜찮아요. ”
할 얘기는 이게 아니다. 윤호는 더 이상 말을 끌며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재중이 건우와 함께 있는 것을 본 후 기분이 상당히 가라앉은 상태였다.
기다리는 동안 생각했던 숱한 말들이 모두 자취를 잃고 사라져버린 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면 보다 더 효율적으로 그럴 듯 하게 들릴까.
윤호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재중을 바라보았다.
“ 계약에 대해 얘기하려고 왔어. ”
재중의 얼굴이 굳어진다. 윤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저번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겠어. 나도 잊을 테니까…… 없었던 일로 하지. ”
재중은 윤호의 입에서 나온 지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멍하니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뭘 잊겠다는 거야? 뭘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 타. ”
윤호가 말한다. 하지만 재중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참만에 겨우 꺼낸 말은 잔뜩 쉬고 갈라져 있었다.
“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는 건가요……? ”
“ 그래. ”
“ 다시 계약을 하자고? ”
“ 그래. ”
야속할 정도로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윤호를 재중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윽고 이를 악물었다.
“ 싫어요. ”
윤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재중은 그를 노려보며 잔뜩 힘이 들어간 음성으로 말했다.
“ 돌아가지 않겠어요, ”
윤호가 얼굴을 찌푸린다. 이해할 수 없겠지, 당신같은 사람은. 당신같이 거절당하는 것이 어떤 건지 전혀 모르는 사람은,
내 마음 같은 거 전혀 이해하지 못할 거야. 역시나 윤호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 뭐가 불만이야? 잊겠다고 했잖아. ”
“ 당신과 계약하고 싶지 않아요! ”
재중의 격렬한 대답에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가 역시 격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 그럼 여기 계속 있겠다는 거야? 이런 초라한 곳에서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어?
도대체 내가 너한테 안 해준 게 뭐야?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왜 이렇게 골치 아프게 구는 거지? 다 잊겠다고 했잖아! 내가 너한테 그럼 뭘 더 해줘야 해? 뭘 바라는 거야? ”
“ 당신은 몰라요…… ”
재중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윤호는 이를 악물고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 됐어, 이제 이런 바보같은 언쟁은 하고 싶지 않아. 어서 타,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
“ 가지 않겠어요. ”
윤호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재중을 바라보았다. 재중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고 겨우 참고 있었다.
한 마디라도 더 하게 되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윤호를 쫓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재중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난 이제 지쳤어.
재중은 고개를 숙인 채 생각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제는 싫어. 이것으로 난 충분해. 이제 더 이상은……
윤호의 깊은 한숨소리가 들린다. 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지만 재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재중은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준다면, 아니 사랑하지는 않아도,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준다면…… 그렇다면 얼마든지 그를 쫓아갈 생각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해주기만 한다면. 하지만 그는 잠시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재중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채
익숙한 손길로 지갑을
뒤져 몇 장의 수표를 꺼냈다. 멍하니 그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재중에게 윤호는 수표를 내밀었다.
“ 받아, 빈 손으로 나갔잖아. ”
그 순간 재중은 참고 있던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탁―
거칠게 윤호의 손을 쳐내자 윤호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수표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재중은 최후의 희망마저 무참히 짓밟아버린 그를 원망과 증오가 서린 눈으로 노려보며 소리쳤다.
“ 날 남창취급 하지 마……! ”
그리고 재중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카드를 꺼내 그의 얼굴을 향해 집어던졌다.
바람소리가 일어날 정도로 세게 몸을 돌려 집안으로 달음박질쳐 들어가는 재중을 윤호는 잡을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쾅―
등뒤로 허름한 대문을 닫은 재중은 어깨로 숨을 몰아쉬며 한동안 대문에 기대어 있었다.
행여나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자신이 잘못 말했다고 그는 말해주지 않을까. 남창취급하지 않았다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 내가 오해한 거라고 해명해주지 않을까.
재중은 또 다시 기대를 하게 되는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한참동안 그렇게 서있었다.
이윽고 차의 시동소리가 들린다. 멀어지는 자동차소리를 들으며 재중은 그가 정말로 떠나갔다는 것을 실감했다.
방에 앉아 이제나 저제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건우는 문소리에 성급히 고개를 돌렸다.
재중이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온다.
뭔가 분위기가 안 좋았지만 섣불리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건우는 잠시 눈치를 살폈다.
“ ……돌아오래? ”
조심스레 묻는 말에 재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는 가슴 한 구석이 저며오는 통증을 느끼며 겨우 말했다.
“ 그래…… 짐 싸는 거 도와줄까? ”
재중이 고개를 젓는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우뚱한 건우에게 재중이 중얼거렸다.
“ 나, 그만 뒀어 건우야. ”
“ 뭘? ”
바보처럼 되묻자 재중이 잔뜩 가라앉아 흐느끼는 음성으로 겨우 대답했다.
“ 싫다고 했어. 난 그 사람 따라가지 않겠다고. ”
건우는 떨리기 시작하는 어깨를 보고 역시 상처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 왜…… 그 사람 기다리지 않았어? ”
재중이 다시 고개를 젓는다. 흐느낌이 더욱 거세게 흘러나왔다.
어느새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는 재중을 건우는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