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2부 38편
“ 마르신 것 같습니다. ”
비서의 말에 윤호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진다.
“ 누구처럼 아내가 있어서 챙겨주질 않아 그런 거겠지. ”
“ 무례한 말씀이지만 신지영씨가 식사를 잘 차릴 것 같지는 않던데요. ”
“ ……서류는 이게 전분가? ”
“ 그렇습니다. 말씀하셨던 대로 스케줄은 비워뒀습니다만, 외출하실 계획이십니까? ”
“ ……아니…… 음…… 생각중이야. ”
윤호의 아리송한 대답에 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 그럼 용건이 있으시면 부르십시오 ”
하고 말한 후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남겨진 윤호는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할까.
그동안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자신이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머릿속은 오직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 해결책을 윤호는 알지 못했다.
무턱대고 돌아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포기할 용기는 더욱 없었다.
그가 어디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찾아갈 결심이 서질 않는 것이다.
그는 이전에 주었던 카드에서 적은 현금만을 간혹 꺼내쓰는 것 같았다.
학교의 친구에게 얹혀 사는 것 같았지만, 자세한 것은 캐어보지 않았다.
그저 그가 무사하다는 것에만 안도하고 나머지 생각은 접어두려 하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날개를 달게 되면 잡을 수 없게 되니까 아예 가두어 두는 것이 좋다.
이유가 필요한 걸까.
어떤 이유?
뭐라고 해서 그 애를 붙잡으려고 하는 거야?
그 이유라는 건, 그 애를 위한 명목인 건가 아니면 나를 위한 건가.
내가 붙잡으면, 너를 잃지 않을까.
또 그들처럼 내 곁을 떠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되면 나는, 이번에는 결코 버텨내지 못할 거야.
“ 같이 죽어버릴까. ”
윤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하겠다.
지금이라도, 네가 원한다면. 네가 원한다고 말하기만 한다면.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그 애가 옆에 있을 때 두려울 일도 없겠지. 단지 공허할 뿐인 거야.
그것만 참아낼 수 있다면 그 애를 놓아줄 수 있어.
……하지만 결국 참아낼 수 없으니까 그 애를 원하는 게 아닌가……?
그 애가 죽는 것과, 살아 있어도 내 곁에 머물러주지 않는 것과, 내게 다를 게 뭐지?
난 역시 공허하고, 지독스러운 허무 속에서 혼자 남겨져 있을 뿐이잖아.
윤호는 방금 꺼낸 결론에 그만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어차피 결과가 같다면, 내가 망설이는 의미가 뭐란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한 윤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곧장 일어나 걸어두었던 양복의 상의를 집어들고 바삐 사무실을 나갔다.
콰당―
거칠게 열어제쳐진 문소리에 비서가 벌떡 일어난다.
“ 지금 퇴근할 거니까 급한 일 아니면 연락하지 마. ”
내뱉듯 말한 윤호는 곧장 비서실을 가로질러 달리듯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수업이 끝나고 먼저 집으로 돌아왔던 재중은 방을 치우다가 카드의 명세표를 발견하고 잠시 멍하니 숫자를 바라보았다.
처음 현금 서비스를 받고 난 후 두 번 정도 돈을 더 뽑았던 것 같다.
카드 사용이 가능한 것을 보니 그가 알아서 통장을 채워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재중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돈을 대주는 것만으로 의무는 다 한 것이라는 듯이.
따져보면 그가 이 정도로 해야 할 의무라는 것도 없었지만.
그런데도 역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이렇게 명세표를 하나하나 모아두고 있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면 참 불쌍하기도 하다.
쓴웃음을 지었던 재중은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후다닥 명세표를 감추고 방을 치우는 척 했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예상대로 건우가 들어왔다.
“ 잘 들어왔어? ”
“ 응. 아르바이트 벌써 끝났어? ”
건우는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많았다.
주말에는 나이트에서 서빙을 하고 때로는 공사판에서 노역을 하기도 했다.
“ 주유소는 쉽지만 그만큼 안 벌려. ” 하고 건우는 웃으며 얘기했었다.
처음 보았던 이미지대로 남들 삥이나 뜯지 않을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재중은 새삼 그의 성실함에 감탄했다.
“ 아니, 오늘은 아르바이트 제꼈어. ”
“ 응? 왜? ”
“ 어디 갈 데가 있거든. ”
놀라 되물은 재중을 보며 건우가 조심스레 말했다.
“ 같이 안 갈래? ”
“ 어딘데? ”
“ 엄마 산소. ”
재중은 아무렇지 않게 말한 건우의 대답에 더 놀랐다.
“ 별로 안 멀어. ”
그렇군, 기일인가 보구나. 재중은 생각하고 왜 굳이 자신과 함께 가려는 건지 의아해했다.
혼자 다녀오는 것이 편하지 않나? 동행이 있으면 거추장스러울 텐데.
하지만 건우는 속에 없는 말을 겉치레로 하는 성격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터라 재중은
그가 예의상 한 말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결국 잠시 망설이던 재중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그래. ”
건우가 환히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 가자, 고속도로 통과해서 가면 금방 다녀올 수 있어. ”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서 익숙한 건우의 허리를 안은 재중은 편안하게 넓직한 등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