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2부 37편
며칠만에 학교에 갔을 때는 또 다른 소문이 무성해져 있었다. 바로 ‘ 이 건우가 짱 윤 영철을 깨부셨다 ’ 라는.
정권교체라느니 원인이 어쨌다느니 말이 많았지만 정작 건우는 조용했다.
영철이 패거리들을 규합해 자신의 밑에 둘 거라고 예상했던 아이들은 그것이 이상해 건우의 눈치를 새삼 살폈지만
그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나마 그 소문이 재중에 관한 소문을 덮어주어서 다행이었다.
게다가 재중에 관한 소문이 가라앉은 이면에는 ‘ 짱을
깨부신 이 건우의 수족 ’ 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가 존재했다.
물론 소문 중에는 건우와 재중의 관계에 대해서 꺼림칙한 것들도 섞여 있긴 했지만 당장 눈앞에서는 조용해주니
그것까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여전히 쉬는 시간마다 재중을 찾아가는 것이 건우의 일과였고,
그런 건우의 태도에 시종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재중의 하루였다.
그리고 한동안 조용히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 여기 틀렸잖아. ”
재중이 볼펜으로 노트를 꾹 짚으며 말했다. 건우는 ‘ 에에 ’ 하고 볼펜 끝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묻는다.
“ 어디가? ”
되묻는 건우를 한심한 얼굴로 쳐다본 재중이 말했다.
“ 6 7에 42지 어떻게 48이야. 곱셈에서 틀리다니 어이가 없어. ”
건우가 씁쓸하게 웃더니 계산과정을 고쳤다. 건우는 꽤 열심히 따라와 줘서 중위권의 레벨까지 겨우 올라오긴 했지만
종종 사소한 데서 이렇게 실수
를 하곤 했다. 재중은 그가 좀 더 꼼꼼히 과정을 풀어가기만 한다면 좀 더 좋은 성적이 나와줄 텐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수업이 끝나고 연일 계속되는 과외에서 건우는 무척 성실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성적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여전히 빨래줄을 경계로 상을 중앙에 놓고 공부를 하고 있는 둘은 이제 그것이 아예 습관으로 자리를 잡아
상대가 없을 때조차 행여 발꿈치라도 스칠 때면 후다닥 발을 떼어놓곤 했다.
재중이 건우에게 지적을 할 때도 볼펜을 길게 잡아 끝으로 톡 건드릴 뿐 그 이상 넘으려 하지 않는다.
건우도 역시 마찬가지라 둘은 철저한 경계 속에 암묵적으로 서로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역시 눈치채고 있었지만
서로가 내색하지 않았다.
“ 여기까지만 하고 밥 먹자. ”
재중이 문제를 적으며 말했다. 건우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재중이 낸 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던 재중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 왜 그래? ”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든 건우를 보며 아직 웃음이 남아있는 얼굴로 재중이 말했다.
“ 너, 학교 짱이라고 소문이 엄청나. 그런데 이렇게 얌전히 앉아서 게다가 수학 문제 푸느라 골머리 썩는 거 보면
다들 놀랄 걸. ”
“ 소문따위야 알 게 뭐람. ”
한 마디로 일축한 건우가 다시 문제에 전념했다.
재중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다가 그가 문제를 다 풀고 연습장을 들이밀자
그것을 받아 과정과 답을 검토했다.
“ 잘 풀었는데, 여기는 이렇게 풀면 더 빠르고 쉽거든?…… ”
연습장을 돌려 함께 볼 수 있도록 한 재중이 볼펜으로 예를 들어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부드럽게 울려오는 음성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건우는 언제나
그의 설명을 듣는 것이 좋았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반면 더할 나위 없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면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곱씹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재중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들어보기 위해 일부러 어이없는 실수를 할 때도 있었다.
바로 아까 곱셈의 경우와 같은.
“ 넘어왔어. ”
재중의 음성에 현실로 돌아온 건우는 방바닥을 짚고 있는 자신의 손이 반정도 빨래줄을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웃으며 자신을 향해 말하는 재중의 얼굴이 왠지 얄미워 보인다.
갑자기 건우가 재중의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 ……앗……! ”
재중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풀썩 건우에게 안겨버렸다.
“ 이번엔 네가 넘어왔어. ”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건우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재중은 그를 밀쳐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빨갛게 변해버린 자신의 얼굴을 눈치채일까 두려워
차마 그러질 못했다. 건우 역시 냉큼 자신을 밀치고 일어날 거라 생각했던
재중이 예상외로 조용히 있는 것에 놀라 뜻밖의 행운에 잠자코 그를 안고 있었다.
조용한 방안에 서로의 심장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재중은 마음을 진정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건우는 잡지 않았다.
“ 이런 장난은 하지 마…… ”
겨우 떨리는 음성으로 말한 재중은 벌떡 일어났다.
“ 저녁 먹자. ”
달아나듯 부엌으로 가버리는 재중의 뒷모습을 보던 건우가 씁쓸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둘은 서로의 두근거림을 무시하고 애써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식사를 하고 자리에 누웠지만
어느 쪽도 제대로 잠을 자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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