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2부 34편)
“ 재중아, 밥 먹자! ”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음성에 재중은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교실 문 앞에 서 있는 건우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이제 습관이 된 민철이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이젠 아예 고정멤버가 되어버린 <점심조>는 언제나 그렇듯 한 줄로 서서 식당으로 향한다.
“ 재중아, 어제 가르쳐 준 거 다 외우긴 했는데 말이야. ”
줄을 서서 기다리며 건우가 말을 걸었다. 수학 공식에 대한 얘기인 것 같다.
전날 건우와 재중은 3차 방정식을 공부했었다. 재중은 물끄러미 그를 바
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건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답은 맞는데 과정이 틀리는 거 있지. ”
“ ……증명 문제인데 과정이 틀리면 어떻게 해. ”
기가 막혀서 중얼거린 재중을 보며 건우가 다시 웃었다.
“ 그러게 말이야. 오전 내내 풀었는데 그게 영 안 되더라고. ”
재중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건우는 꽤 머리가 좋은 편이라 뭐든 설명하면 쉽게 알아들었다.
하지만 공부를 쉰지 정말 오래 되었는지 암기력은
형편없었다. 외우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지 않으니 이해를 해도 곧 잊어버리곤 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아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처음
시작할 때는 그야말로 앞날이 암담했었다.
“ 우선 다른 문제 해. 집에 가서 다시 설명해 줄게. ”
이미 그러한 둘의 대화에는 익숙해진 듯 민철은 점심메뉴를 훑으며 무관심한 태도였다.
자리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 문득 재중은 자신이 건우를 이제
무척 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에는 이렇게 마주 앉아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 수업 끝나고 너네 교실로 갈게. ”
점심시간이 끝나고 자신의 교실로 가며 건우가 말했다.
언제나 건우는 수업이 끝나면 재중의 반으로 와서 재중을 데리고 집에 가곤 했다. 집에 갈 때
함께 가면 아침에 등교할 때 따로 들어오는 의미가 뭐냐고 한번은 물었었는데,
그 때 건우는 “ 그래도 저녁에 함께 가는 건 둘이 놀러가는가 보다, 내지는 어디 데려다주나보다,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침에 같이 가는 건 둘이 밤샜나 보다,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 하고 대꾸했다.
맞는 말이라 부정할 수도 없었다.
언제나 같은 일과를 보내면서도 건우는 항상 “ 데리러 올게 ” 라든지 “ 너네 반으로 갈게 ” 라는 말을 하곤 했다.
마치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재중이 먼저 가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교실에 앉아 남은 수업시간을 멍하니 앉아 때운 재중은 종례가 끝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가방을 챙겼다.
콰당―
크게 울린 문소리에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문을 활짝 열고 서 있는 여자는 어딘지 낯이 익다.
그녀의 얼굴을 기억해낸 재중은 놀라 하얗게 질려버렸다.
이목구비가 시원한 데다 섹시한 생김에 한창 나이의 소년들은 놀라 술렁거렸다.
남학교에 찾아온 여자, 게다가 그녀는 엄청난 미인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향해 숙덕거리는 소년들을 무시하고 빠른 눈길로 교실을 훑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
치는 순간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콰당―
의자가 뒤로 젖혀져 큰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그녀가 재중을 알아보고는 고양이같이 웃는다.
“ 여기 있었구나. ”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가 위험하게 울려 퍼진다. 그녀가 걸어감에 따라 웅성거리던 아이들이 시원하게 길을 터준다.
덕분에 그녀는 장애물이라고는 없이 똑바로 재중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재중의 얼굴에 공포가 스며들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예전에 자신을 향해 칼을 휘두르던 그녀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자 그는 달아나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그녀는 망설임없이 재중을 향해 걸어와 섰다. 시선이 마주친다. 그녀가 다시 생긋 미소지었다.
“ 겨우 찾아냈지 뭐야. ”
“ …… ”
“ 나, 윤호씨하고 파혼했어. ”
에?
뜻밖의 소리에 재중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입가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에 스치는 흉폭한 빛에 재중은 다시금 하얗게 질려버렸다.
“ 너 때문이야, 개새끼야. ”
철썩―
날카로운 마찰음이 교실에 울려 퍼졌다. 재중은 화끈한 통증이 얼얼하게 뺨을 스친 것을 깨달았다.
시끄럽던 교실에 삽시간에 침묵에 잠긴다. 그녀는 다짜고짜 재중의 멱살을 붙잡고 이를 갈았다.
“ 너 때문이라고, 이 남창새끼야. 내가 뭐라고 그랬어? 꺼지라고 했었지? 그런데 왜 네가 일을 이 꼴로 만들어?
내가 그 사람 손에 넣으려고 얼마나 애
썼는지 알아? 그걸 네가 다 망쳐버렸어, 빌어먹을 남창새끼야.
그런데 넌 뻔뻔하게 이렇게 멀쩡히 앉아있어? 가증스럽게! ”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녀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재중을 밀쳐버렸다.
얼떨결에 밀려버린 재중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재중이 몸을 추스려 일어나기도
전에 그녀는 쫓아와 재중을 하이힐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구두굽이 어깨에, 팔에, 머리에 찍힌다. 계속되는 구타에 재중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도 그녀의 폭언은 계속되었다.
“ 죽어버려, 빌어먹을 남창새끼야. 죽어버리라고! 니가 뭔데 일을 그 따위로 만들어? 넌 죽어야 돼, 죽여버릴 거야! ”
어지럽다. 느껴지는 것은 오직 통증뿐이다. 주변의 소란소리가 귀를 멍하게 만든다.
교실 한 복판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폭력에 누구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녀의 광기 어린 폭언과 폭행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재중을 구해줄 생각이 누구에게도 없었는지 그건 알지 못한다. 하필 민철은 교실에 없었다.
사정없이 내리찍히는 하이힐이 어디를 맞았는지 알 수가 없다.
재중은 겨우 온 몸을 공처럼 구부려 그녀의 폭행을 견뎌내는 것이 전부였다.
“ 꺄앗! ”
갑작스레 비명소리가 들리고 온 몸으로 쏟아지는 것 같던 발길질이 멈춰졌다.
재중은 겨우 눈을 들어 위를 보았다. 붉게 물든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비쳐졌다. 키가 큰 그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의 손아귀에 잡혀있는 긴 머리채가 유독 시선을 끌었다.
건우다.
재중은 겨우 생각하고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건우는 격렬한 분노의 빛을 감추지 않고 발산해내며
이를 갈 듯 말했다.
“ 이게 무슨 짓이야? ”
건우의 손에 머리채를 붙잡혀 바닥에 굴러버린 지영이 눈을 치켜뜨고 고함을 질렀다.
“ 넌 뭐야, 이 새끼야?! 이거 당장 놓지 못해? "
지영의 욕설에 건우는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엄청난 힘으로 잡고 있던 머리칼을 잡아챘다.
“ 꺄아악! ”
지영이 비명을 지르며 끌려간다.
“ 내가 물었잖아.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넌 묻는 말에나 대답해. ”
건우의 온 몸에 넘치는 분노에 아이들은 주춤거리며 눈치를 살폈지만 지영은 전혀 기죽지 않고 건우에게 소리쳤다.
“ 니가 무슨 상관이야. 난 이럴 권리가 있어!
…아하, 이제 보니 네가 저 남창 새끼 이번에 돈줄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
철썩―
굉장한 소음이 들리고 그녀의 얼굴이 확 돌아갔다. 건우가 그녀의 머리를 붙잡아 눈을 마주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 너, 다시 한 번 그딴 소리 지껄이면 너야말로 죽여버릴 거야. ”
“ 퉷. ”
그 순간 지영이 건우의 얼굴에 피 섞인 타액을 뱉어버렸다.
건우는 물끄러미 그녀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그것을 닦아내었다. 그의 입에서 낮게 욕설이
흘러나온다.
“ 갈보 같은 계집애. ”
그리고 건우는 다짜고짜 지영의 머리채를 붙잡은 채 질질 끌고 난폭한 걸음걸이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걷는다기 보다는 마치 나는 것 같아서,
그에게 붙잡힌 채 끌려가는 지영으로서는 여러 의미로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계단 앞까지 온 건우는 그대로 지영을 집어던져 버렸다.
“ 꺄악― ”
콰당―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녀가 계단을 굴러 복도 한 쪽에 처박힌다.
건우가 계단 위에 선 채 엉망으로 구겨져 버린 그녀에게 뇌까렸다.
“ 다신 나타나지 마, 빌어먹을 계집애야. ”
그리고 그는 돌아서서 난폭한 걸음걸이를 다시 교실로 향했다.
그 때까지 재중은 교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건우가 서둘러 다가와 그를 안아들었을 때는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 빌어먹을. ”
건우가 욕설을 내뱉으며 교복의 타이를 풀어 재중의 코를 쥐어주었다.
그제야 재중은 자신의 얼굴이 이마와 코에서 흘러내린 피로 온통 젖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응급실로 가자. ”
재중을 안고 나는 듯이 교실을 뛰쳐나간 건우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 거짓말 주제곡...입니다 하하 장난으로 만든 겁니다만... 이번이 아니면 공개를 못 할 것 같아서...
원 곡은 동요 <곰 세 마리>입니다. 음에 맞추어 불러주세요.
공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1번 공 2번 공 3번 공
1번 공은 후까시(땅토끼)(테리우스)
2번 공은 비열해(구두쇠)(니일)
3번 공은 마당쇠(깡패공)(안소니)
으쓱으쓱 잘 한다♬
기분에 따라 괄호로 바꿔 부르셔도 됩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