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2부 26편)
재중은 문득 잠에서 깨어 눈을 떴다가 생소한 방의 벽지를 보고 의아해졌다. 밖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얼굴이 따끔거렸다. 일어나서 씻고 싶은데 도무지 기운이 없다.
방은 한눈에도 알 수 있는 꽤 초라한 자취방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의 방에는 낡은 비디오 겸용 TV가 한 대 있고,
방 한 구석에 역시 조그만 냉장고가 초라하게 놓여 있다.
할머니들이나 쓸 것 같은 곳곳에 기스가 난 나무로 된 장 위에는 역시 오래 된 이불이 둘둘 말려 얹
혀진 상태였다. 자신이 누워있는 이불에도 묻어있는 희미한 담배냄새에 재중은 겨우 기억을 떠올렸다.
그럼 여긴 건우의 방인가……
때마침 문이 열리고 건우가 고개를 내밀었다.
“ 어, 일어났구나. 마침 지금 밥 다 했는데. ”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자 건우가 조그만 상에 밥을 차려서 들고 왔다.
그나마 상다리가 하나 없어서 굴러다니는 잡지를 몇 개 얹어 다리 대용으로 삼
는 것을 보고 재중은 그에 대해 생각했던 자신의 선입견이 하나 둘 씩 사라지는 것을 깨달았다.
“ 인스턴트지만 먹을 만 해. 기운 내는 데는 미역국이 최고라더라. 그래서 아줌마들 애 낳고 나면 꼭 해 먹잖아. ”
다른 때보다 더 말이 많은 건우였다. 재중은 묵묵히 찌그러진 황색 놋냄비에 담겨진 미역국을 들여다보았다.
“ ……잘 먹을께. ”
투박하게 썰어진 깍두기하며 완벽하게 실용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뻔히 눈에 보이는 식기들이었지만
식사는 꽤 먹을 만 했다. 둘은 마주 앉아 묵묵히
식사를 했다.
“ 태풍 올라오나 봐. 하늘이 엄청나네. ”
깍두기를 우두둑, 씹어먹으며 건우가 말했다. 재중은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 어떻게 할래? 여기 계속 있을 거야? ”
건우의 질문에 재중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 ……가능한 빨리 나갈게. ”
“ 나가라고 한 말 아니야. ”
건우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 네가 아까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헤매고 다녔으니까 하는 얘기잖아.
……뭐, 말하기 싫으면 굳이 묻지 않을 테니까 결론만 얘기해. 있을 거야?
미리 말해두는데 난 네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어. ”
“ …… ”
재중은 망설였다. 냉큼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더욱이 상대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잘도 쫓아다녔던 건우다. 그런데 함께 있자니, 바로 그 건우와.
“ 38선 긋자. ”
“ 응? ”
갑작스러운 말에 재중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 38선 긋자고. 너 초등학교 때 안 해봤냐? 책상에 줄 쫙 긋는 거 말이야. ”
“ 해봤지만…… ”
“ 방이 보다시피 그리 크지 않으니까 중간에 빨래줄 너는 걸로 대신하지 뭐. 아니면 바닥에 테이프를 붙일까? ”
“ 저기, 나는…… ”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건우가 웃었다.
“ 걱정하지 마, 억지로 널 어떻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럴 맘이었다면 진작에 엎었을 걸. ”
그건 그렇다. 마음만 먹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단지 건우가 참았을 뿐이다.
“ ……호의가 지나쳐서…… ”
역시 말끝을 흐리자 건우가 말한다.
“ 오해하지 마, 나름대로 작전이니까. ”
“ ……? ”
“ 점수따기 작전 말이야. ”
그리고 건우는 벌떡 일어나 벽 한 쪽에 걸어두었던 빨래줄을 쫙 끌어당겨 반대편 벽에 걸었다.
그러더니 상을 들어 딱 가운데에 놓고 반대편에 앉는
다.
“ 문도 딱 가운데 있으니까 손만 넘어가면 돼. 발은 넘지 않을 거야. ”
재중은 망연히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웃어버렸다.
“ 잘 부탁해, 룸메이트. ”
재중은 친숙하게 웃으며 내민 건우의 손을 아직 조금 망설이는 얼굴로 맞잡았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이 마음을 가라앉힌다. 재중은 정
말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