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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56화 (56/123)

거짓말 (2부 22편)

택시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기까지 재중은 걷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새삼 깨달아야 했다.

겨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을 때는 그냥 주저앉

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학교에 가야 했지만 도저히 그럴 기운이 없었다.

어서 방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만을 하고 겨우 엘리베이터에서 내

린 재중은 무거운 손을 들어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

삑―

카드키의 체크소리가 들리고 재중은 안으로 들어갔다. 피곤하다.

다리를 끌며 들어오던 재중은 자욱한 담배냄새에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택시에서 내렸을 때 시간은 벌써 10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걸까, 이 담배냄새는.

매캐하게 방안 가득히 가라앉아 있는 익숙한 향기는 재중의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떨리는 심장소리가 불안하게 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재중은 창가의 테이블에, 익숙하게 담배를 입에 물고 앉아 있는 윤호의 얼굴을 보고 하얗게 질려버렸다.

재중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오는 것 같았다. 아직 출근을 하지 않다니, 어떻게 된 걸까.

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재떨이에 수

북히 쌓여있는 담배꽁초와, 방안 가득한 담배연기와, 그의 창백한 얼굴빛과,

면도조차 하지 않은 듯 거뭇하게 자라있는 수염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 했다. 바로 재중이 가장 두려워하던 바로 그 상황을. 애써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겨우 입을 열었다.

“ 어, 어떻게…… 아직 출근 안 하셨네요…… ”

윤호는 대답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재중을 바라보았다.

재중은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을 느끼고 마른침을 삼켰다.

“ 늦었군. ”

어떻게 하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재중은 긴장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황급히 등뒤로 감추고 대답했다.

“ 죄, 죄송해요. 학교의 과제 때문에 친구네서 잤어요…… ”

내 말을 믿어줄까. 과연 믿어줄까. 안돼, 목소리가 떨리고 있어……

보지 않아도 내 얼굴색이 어떨지 정도는 충분히 짐작해. 방안이 왜 이렇게 환하

지? 왜 여긴 이렇게 조용한 거지? 내 안색도 목소리도 모두 감출 수 있을 정도로 어둡고 시끄럽다면 좋았을 텐데.

태풍이 올라온다던데 어째서 날은

저렇게 맑고 방은 이렇게나 조용할까. 내 숨소리가 오히려 시끄럽게 여겨질 만큼.

윤호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 학교의 과제라…… ”

재중은 절망감에 아무 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윤호가 피우던 담배를 끄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

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재중은 그것이 더 두려웠다.

그가 가까워지자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곧 벽에 등이

닿아 불가능해져 버리고, 재중은 달아날 틈도 없이 윤호와 마주 서야 했다.

윤호가 재중을 내려다보고 있다. 저 눈과 마주보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

재중은 두려움에 떨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갑자기 윤호가 손을 든다.

재중은 맞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급히 눈을 꼭 감았다.

촥―

다음 순간 사납게 열어제쳐진 셔츠에 재중은 놀라 눈을 떴다. 단추가 사방으로 흩어져 굴러다닌다.

윤호가 비웃듯이 중얼거렸다.

“ 과제라고? ”

의미 있게 짚어 내려가는 윤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재중의 얼굴이 유령처럼 창백해졌다.

곳곳에 남겨져있는 키스마크는 변명의 여지가 없게 만

들었다. 하지만 재중은 변명을 해야했다. 어떻게든 아니라고 얘기해야 했다. 당신은 오해를 하고 있다고,

이건 사실이 아니라고. 하지만 재중의 머릿

속에는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윤호가 경멸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 그래, 이번에는 또 어떤 거짓말을 할거지? 말해 봐, 들어줄 테니까. ”

“ ……거짓말이라니…… ”

겨우 잔뜩 갈라진 음성으로 말한 재중에게 윤호가 계속해서 말했다.

“ 처음부터 지금까지 네가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은 게 뭐가 있어? 그러니까 지금도 또 해보라고.

네 그 조그만 머리 속에 들어있는 온갖 말들을 다 지

어내 보란 말이야. ”

재중은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윤호가 여전히 조소섞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 처음엔 남창이라고 나를 속였지. 경험도 없는 주제에. 다음에는 다른 손님 따위는 받지 않겠다고 말했지.

하루종일 나를 기다렸다느니 귀여운 말도

가끔은 해주고. 그건 특별한 서비스였나?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을 털어놔 보지 그래.

대체 몇 명이나 상대하고 있는 거야? 돈이 모자

라나? 아니면 나로는 만족을 못 하겠어? ”

“ ……아니…… 그게…… 나는 그게 아니라…… ”

오해하고 있어요, 라고 말할 틈은 도무지 없었다. 무엇보다도 금새 목이 메어와서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믿어주지 않아.

확신처럼 마음 한 구석에서 또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어떤 말을 해도 그는 믿어주지 않을 거야.

난 그와 끝난 거야.

“ ……나는…… ”

겨우 입을 열었지만 다음 말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가득히 눈물이 차올라와 윤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재중은 흐느낌이 올라오는 입을

틀어막고 황급히 윤호를 밀치고 방을 뛰쳐나갔다. 넘치듯이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도무지 앞이 보이질 않아

그는 몇 명이나 부딪혔지만 달리는 것

을 멈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윤호는 그의 뒤를 쫓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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