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2부 21편)
창민의 아파트에 도착한 재중은 곧장 침실로 향했다. 머릿속은 어서 볼일을 끝내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냉큼 옷을 벗고 침대에 앉았지만 정
작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창민은 얼굴을 찌푸린 채 서있기만 했다.
“ 뭐해요? 빨리 와요. ”
짜증스럽게 말했지만 창민은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재중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재중은 내심 초조해졌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이렇게 되면 아침에
애써 계획한 것이 틀어져버린다. 재중이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는 것을 보고 창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 할 얘기가 있어. ”
“ 얘기는 됐으니까 빨리 끝내요. ”
재중은 성급하게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 내 말 들어! ”
갑자기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재중은 놀라 흠칫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는 ‘ 제길 ’ 하고 욕설을 내뱉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
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방안을 서성이는 모습이 무척 불안해 보인다. 재중은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 뭐예요, 할 얘기가 있으면 어서 해요. ”
갑자기 창민이 걸음을 멈추고 재중을 노려보았다.
“ 어제는 어디 갔었어? ”
“ 뭐라구요? ”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재중은 대꾸했다.
“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야? ”
“ 윤호랑 있었지? ”
재중은 어이가 없어 그만 웃어버렸다.
“ 당연한 것 아니야? 도대체 이런 어리석은 대화를 계속해야하는 이유가 뭐야? ”
“ 씨발. ”
그 동안 기껏해야 젠장, 빌어먹을 이 전부였던 그에게서 꽤 험한 욕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재중은 어안이 벙벙해져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 어제, ”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끈 후 사이를 두고 창민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 너희 학교에 갔었어…… ”
“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
날카롭게 내지른 재중의 말을 무시하고 창민이 계속해서 말했다.
“ 꽤 즐거워 보이더군, 너와 윤호. ”
“ …… ”
“ 그 녀석은 또 뭐지? 새로운 상대이기라도 한 건가? ”
아마 건우도 본 것 같았다. 그가 어디에서 우릴 봤을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재중은 입가에 떠오른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 이제는 직업을 바꿔서 스토커가 되기로 한 모양이지? ”
철썩―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눈앞이 환해진다. 통증이 느껴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재중은 자신이 뺨을 얻어맞았다는 사실에 놀라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
다. 창민이 죽일 듯이 재중을 노려보며 말했다.
“ 너 때문이야. ”
어이가 없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재중의 어깨를 난폭하게 붙잡은 창민이 이를 갈았다.
“ 너 때문에 나는 미쳐버린 것 같아. 알아? 네가 나를 미치게 한다구! ”
재중은 창민의 손을 억지로 뿌리치고 소리쳤다.
“ 내가 그랬다고? 억지 쓰지 마, 제멋대로 나를 망쳐버린 건 오히려 당신이잖아?!
나야말로 당신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아! ”
“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한다는 거야? 말했잖아, 너를 가지고 싶다고! 너를 원한다고 하지 않았어?
더 이상 뭘 바라는 거야?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해줘
야 하지? ”
“ 바라는 것 따위 없어, 알아? 당신이 내 앞에서 사라져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날 좀 내버려 둬! "
침묵이 흘렀다. 창민과 재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건 네가 처음이야. ”
“ 안 됐군. ”
비꼬듯 말한 재중의 앞에서 창민이 갑자기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전화로 가 스피커폰을 켰다.
메모리를 누르자 몇 번의 신호 후 여자의 음성이 이어
진다.
“ 여보세요. ”
거만하게 들려온 그 음성은 귀에 익은 것이었다.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칠했다.
창민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
“ 나야, 심창민. ”
“ 무슨 일이야? 갑자기. ”
귀찮다는 듯이 이어진 여자의 음성에 창민이 말을 계속했다.
“ 미안해, 신 지영. 난 이 일에서 손떼겠어. ”
“ 뭐라고? ”
단숨에 내지른 그녀의 고함소리에 창민은 말했다.
“ 생각이 바뀌었어. 난 윤호한테서 이 녀석 뺏고 말 거야. 결심했어. 하지만 네가 이 녀석 건드리는 꼴은 못 봐.
그러니까 이제 너도 손 떼. ”
“ 무슨 소리를…… ”
그녀는 계속해서 새된 비명소리를 질러댔지만 창민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재중은 갑작스러운 창민의 행동에 놀라 멍하니 입만 벌린 채 그를 바라보
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재중에게 말했다.
“ 이제 믿겠어? ”
재중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다가 한참만에 겨우 소리를 내어 말을 했다.
“ 당신,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거야? ”
“ 말했잖아, 너에게 미쳐버렸다고. ”
어이가 없다. 재중은 망연자실한 채 그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 그런다고 해서 내가 당신에게 좋아라 뛰어들 거라고 생각한다면…… ”
“ 정상참작에 도움은 되겠지. ”
그리고 창민은 재중이 더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돌아섰다.
그가 뭘 하려는 건지 불안해하며 보고 있던 재중은 돌아선 그의 손에 들려진 수갑을 보
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 상관없어, 쉽게 보내주지는 않을 거니까. ”
“ 싫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
재중은 소리치며 급히 침대에서 구르듯 달려나왔지만 손쉽게 창민에게 붙잡혀 다시 침대로 내던져졌다.
매트리스에 부딪힌 몸이 크게 튀어 오른다.
그 사이 창민이 재중의 손을 붙잡아 수갑을 채우고 침대에 묵었다.
“ 빌어먹을 새끼, 이거 안 풀어! ”
재중이 악에 받혀 고함을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창민은 보란 듯이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재중의 위로 올라왔다.
“ 말로 해서 안 들으면, 남은 길은 하나뿐이잖아. ”
재중이 이를 악물고 창민을 노려보았다.
“ 당신이 이럴수록 나는 당신에게 더 염증이 날 뿐이라고. 모르겠어? ”
“ 괜찮아, 이렇게라도 너를 가질 수 있으면. ”
“ 차라리 날 죽여서 시체를 끌어안고 교미하지 그래. ”
한껏 비꼬아 말하는 재중을 보며 창민이 말했다.
“ 포기하게 만들어 줄 거야. ”
“ 닥치고 이거 풀어……!!! ”
재중이 고함을 질러댔지만 창민은 듣지 않았다. 다리가 벌어지고 난폭하게 삽입이 이루어졌다.
재중은 통증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창민은 거칠
게 몸을 부딪혀왔다. 전날 윤호와의 행위로 예민해져있는 내부가 금새 아우성을 친다.
재중은 화끈하게 번져오는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이내 신음을
삼켜야 했다. 그만 둬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에 재중은 통증으로 잔뜩 찌푸렸던 눈을 겨우 뜨고 창민을 노려보았다.
“ 저질…… 이야, 완력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려 하다니. ”
창민이 다시 몸을 질러와서 재중은 숨을 들이키고 입술을 깨물었다.
“ 그렇게라도 굴복시킬 수 있다면 좋았을 거야, 너에게도 나에게도. ”
알고 있어, 하고 재중은 생각했다. 당신은 알고 있어. 결코 내가 당신에게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걸.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 무모한 행위를 하
는 걸까. 이럴수록 당신은 더 내 심장을 차갑게 만든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 아, 아아…… ”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겨우 삼키며 재중은 어떻게든 그의 행위가 빨리 끝나주기만을 바랬다.
창민이 재중의 목덜미에 이를 세워 진한 멍자국을 만들
었다. 행위 중간 중간 몸 곳곳에 새겨진 그의 자취가 재중의 마음을 더 산란하게 만들었다.
이를 악물고 견디던 재중의 얼굴로 뭔가 따스한 것이 떨어
졌다. 놀라 눈을 뜨자 창민이 젖은 눈으로 재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 때 너를 붙잡았어야 했는데…… ”
탄식처럼 창민이 중얼거렸다.
“ 처음 그 때, 너를 붙잡았더라면 너는 나를 보아줬을까? ”
재중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창민이 키스를 하려 했지만 그것을 피하는 것이 전부였다.
더 이상 창민에게 심한 말을 할 수가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지
만 막상 그의 젖은 얼굴을 보고 차마 그를 더 이상 상처입힐 수는 없었다.
“ ……그래도 결국 현실은 변하지 않아…… ”
한참만에 재중은 겨우 그 말만을 했다. 창민이 웃는다. 하지만 입술이 잔뜩 흔들리고 있어서,
그가 정말로 웃고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 같
았다. 창 밖으로 어둠이 내려앉는다. 재중은 계속되는 그의 거친 행위 속에서 몸도 마음도 지쳐 눈을 감아버렸다.
욱씬거리는 몸의 통증이 억지로 정신을 깨운다. 재중은 힘겹게 눈을 떴다. 아아, 그래. 창민에게 억지로 끌려왔었지……
창 밖은 벌써 아침이었다. 시계를 보니 8시가 넘어있다. 그는 출근했겠구나……
재중은 멍하니 생각하고 눈을 깜박이다가 수갑이 풀려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어디에 있는 거지……?
조금만 움직여도 비명을 질러대는 몸을 겨우 일으켜 주변을 보자 침대에 기대어 바닥에 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창민을 볼 수 있었다.
“ 미안해. ”
그에게서 처음 듣는 사과의 말에 재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나는 최저야. 네 말이 맞아. 난 미쳤어. ”
“ …… ”
재중은 고개를 파묻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더 이상 그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기운 없이 늘어진 어깨와 외로운 등이 애처로워 보일 정도
여서, 차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창민이 길게 떨리는 한숨을 내뱉더니 고개를 들었다.
“ 바래다줄게…… 앞으로 오지 않아도 좋아. 이제 이런 일은 없을 거야. ”
재중은 그 때까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창민이 고개를 돌려 재중을 바라보았다.
재중은 그의 창백한 얼굴에 비친 절망감에 마음이 아파왔다.
이건 동정이야.
재중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힘겨운 몸을 겨우 움직여 그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역시, 당신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틀리지 않아.
그가 참을 수 없이 안타깝게 여겨져서, 재중은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 미안해요. ”
당신을 사랑했다면 더 쉬웠을지 몰라. 아마 이렇게 마음 아프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사람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더 마음아프
니까…… 당신을 택할 수는 없어.
창민은 물끄러미 재중을 바라보다가 재중의 머리를 끌어당겨 입에 키스를 했다. 재중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창민이 데려다주겠다는 것을 억지로 거절하고 택시를 탔다.
재중은 운전수에게 호텔 이름을 말하고 피곤한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틀어놓은 라디오 방송에서 시끄럽게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느 도로에서 사고, 다리에서는 교통 체증,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보도, 아침에 좋은 식이섬유등.
쏟아지는 뉴스들을 한 귀로 흘리며 재중은 멍하니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