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2부 17편)
멀리 바다가 보였다. 여기가 어디쯤일까. 꽤 온 것 같은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배가 고픈데 얼마나 더 가야할까.
끼익.
차가 멈추고 윤호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차에서 내린 재중은 화려한 외관을 갖춘 커다란 레스토랑을 보고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이런 곳도 있
었나? 테마 스토리라고 쓰여진 간판이 흘깃 보였다.
성큼성큼 먼저 걸어 들어가는 윤호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재중은 몇 번씩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어서 오십시오. 겨울 층에 자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고 돌아선 웨이터를 따라 걸어가던 윤호가 재중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로 조용히 말했다.
“ 긴장하지 말고 이리 와. ”
어깨너머로 한 말에 재중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음이 놓인다.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손을 잡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층마다 분위기가 틀린 것이 꽤 색달랐다. 의자에 앉으면서도 두리번거리는 재중에게 윤호가 말했다.
“ 계절별로 층을 나눠놨어. 인테리어가 틀리지. ”
그렇구나, 하고 새삼 감탄했다. 하지만 하필 겨울이라니. 인테리어는 좋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계절은
뭐니뭐니해도 봄 아니면 여름
일 텐데. 선글라스를 상의 윗주머니에 찔러 넣고 메뉴를 고르던 윤호가 재중의 생각을 훼방놓았다.
“ 뭘 먹겠어? ”
재중은 사진과 함께 쓰여진 글자를 한참 노려보다가 요령있게 선수를 쳤다.
“ 뭐 드실 건데요? ”
“ 발레산 퐁듀. ”
“ 저두요. ”
윤호는 약삭빠르게 따라한 재중의 말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태도로 다시 물었다.
“ 음료는 뭘로 할거지? ”
“ 콜라요. ”
자세히 메뉴를 보지도 않고 그저 치즈라면 느끼하겠지, 생각하고 한 재중의 말에 윤호가 얼굴을 찌푸린다.
“ 소다수나 찬 음료는 좋지 않아. 따뜻한 걸 마셔. ”
“ 그럼…… 스패니쉬 커피. ”
“ 나는 보졸래 누보. ”
레드 와인의 이름을 익숙하게 읊어댄 윤호를 보며 재중은 저두 그거 마실래요!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조심해야할 것 같다. 입을 열
기만 하면 실수를 하는 분위기니. 그리고 몇 가지 지시의 말을 더 건네자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웨이터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 알겠습니다. ”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지고 사라진 후 재중은 입을 다물었다.
꽤 넓은 실내에 오도카니 둘만 남겨져 있자니 왠지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같이
식사를 한 지 꽤 오래 된 것 같다. 물론 생각해보면 며칠 되지 않았겠지만.
“ 어제는 어디서 주무셨어요? ”
잊고 있었지만 덕분에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던 질문을 겨우 입에 올려 묻자 윤호는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 사무실. ”
“ 에…… ”
왜요, 하고 놀라 물으려던 재중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사무실에서 자야할 정도라니. 재중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 저…… 다음에 돌아오지 않을 때는…… 전화를 해주면 안 될까요…… ”
그러면 빨리 체념할 수 있을 테니까, 하고 속으로 덧붙인 재중은 겨우 고개를 들어 윤호의 눈치를 살폈다.
윤호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재중을 보
고 있었다. 내가 어째서 너에게 그런 귀찮은 일을 해야하는 거지? 하고 묻는 것 같은 얼굴에 재중은 서둘러 덧붙였다.
“ 학교일 때문에 늦어질 때도 있으니까…… 미리 알려주시면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잖아요…… ”
그리고 재중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가 뒤늦게 눈을 크게 떴다. 윤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 탓이다.
왜 갑자기 저런 표정을 지을까, 하고 생각했지
만 윤호는 삽시간에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말했다.
“ 그렇게 하지. ”
윤호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면서 재중은 할 말을 잊고 망연히 앉아있기만 했다.
피리리리.
전화벨소리가 들렸다. 윤호는 재중에게는 익숙한 서늘한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 네. 정윤호입니다. ”
문득 그의 약혼녀나 또 다른 상대는 아닐까 내심 불안해했던 재중은 곧장 일로 넘어가는 그의 대화내용에
한편 마음을 놓았다. 그의 전화는 꽤 길어
져서, 얼마 후 식사가 나오고 나서도 끊어질 줄을 몰랐다. 강렬한 치즈의 향내를 맡으며
이제나 저제나 눈치를 보고 있는데, 윤호가 짜증스러운 얼굴
로 이마를 문지르더니 말했다.
“ 그 건에 관해서는 직접 해결하시라고 전해. 난 그 사업체는 처음부터 매각에 반대했었으니까
문제가 일어났다고 해서 내가 해결해야 할 이유는 없어. ”
그리고 그는 겨우 전화를 끊었다.
“ 사람이 없네요. ”
겨우 화제를 생각해내 꺼낸 재중의 말에 윤호가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 오늘 하루 빌렸어. 시끄러운 건 싫으니까. ”
어디가 아픈가?
재중은 기대감과 함께 문득 불안해졌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던데……
학교까지 온 것부터 이상했어. 갑자기 윤호가 기다란 포크
를 집어 보기 좋게 썰어진 빵을 찍어 건네준다. 얼떨결에 받아준 재중은 걱정스러운 한편 생각을 접고
그가 하는 행동을 잘 봐두기로 했다. 와인을 먼
저 마신 윤호는 빵을 뜨거운 치즈에 적셔서 입으로 가져간다. 냄새가 상당히 자극적이라 재중은 망설이다
조심스레 적신 빵을 입에 넣었다.
“ 입에 맞아? ”
윤호가 웃으며 묻는다. 재중은 입안에서 녹는 빵의 맛보다 그의 웃는 얼굴에 더 넋이 나가버렸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에 웃어봐야 비웃음, 또는 짧
게 미소짓는 것이 전부였던 그에게서 웃는 얼굴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재중은 오늘이 바로 자신의 행운의 날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다. 그것도 더블 스코어 당첨 복권에.
“ 맛있어요! ”
꿀꺽, 소리가 날 정도로 빵을 삼켜버린 후에 소리치자 윤호가 다시 웃었다.
“ 다행이군. ”
그리고 그들은 한동안 잠자코 식사만 했지만 재중은 그 침묵이 더 이상 버겁지 않았다.
신이 난 나머지 식사도 몇 배는 맛있었다. 재중은 어느 새 재잘
거리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나 민철이 얘기해 준 우스개 소리등을 떠벌여댔다.
들을 때는 하나도 재미가 없었는데 윤호에게 얘기를 하다보니 몇 배
는 재미있게 느껴졌다.
“ 그래서 말이죠, 벌로 물구나무를 섰는데 주머니에서 담배가 우수수 떨어지는 거예요…… ”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데 얘기를 들어주던 윤호가 갑자기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 이런, 빠져버렸군. ”
“ 네? ”
슬쩍 보니 치즈에 엉켜있는 빵조각이 보였다. 꺼내면 되지, 하고 생각했던 재중이 포크를 갖다댔을 때,
윤호가 웨이터를 불렀다.
“ 로손 무스캐고도가 있나? ”
웨이터는 냄비에 빠져있는 빵을 보더니 빙긋 웃었다.
“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
휭하니 사라졌던 그는 금새 돌아와 와인병을 내밀었다.
황금색이 감도는 와인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웨이터가 그것을 재중에게 내밀었다.
“ 예? 저요? ”
놀란 재중을 보고 웨이터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 냄비에 빵을 떨어뜨리면 남자분은 벌로 와인을 한 병 내게 되어 있습니다. ”
헤에, 하고 기뻐하며 병을 받아들자 웨이터는 다시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윤호가 와인을 먹는 것을 보고 한 번 먹어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하고 실실
웃으며 병을 따려고 하는데, 윤호가 말했다.
“ 그건 그냥 가져가지. ”
“ ……예? ”
재중은 와인과 윤호를 번갈아 보았다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주가 먹지 말라면 말아야지.
어차피 오늘은 먹는 것보다 그를 보는 것이
목적이니까. 다시 식사를 시작한 재중은 그의 말을 유도해내기 위해 이것저것 말을 걸기 시작했다.
“ 회사가 요즘 바쁘신가 봐요. ”
“ 아아. ”
“ 방금 전화는 비서인가요? ”
“ 그래. ”
“ 남자 목소리 같던데……? ”
“ 남자야. ”
“ 일은 잘 해요? ”
“ ……빠졌어. ”
“ 네? ”
빠지긴 뭐가? 하고 고개를 숙였던 재중은 냄비에 폭 절어있는 자신의 빵조각을 보고 말을 딱 그쳤다.
와인 한 병.
저거, 비쌀 텐데……
재중은 아까 받았던 화이트 와인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시 시선이 윤호에게로 향한다.
“ ……여기요. ”
받았던 와인을 다시 뱉어놓으며 재중은 윤호가 자신에게 먹지 말라고 충고해 준 것에 내심 감사의 인사를 했다.
하지만 윤호는 와인을 받을 생각은
하지도 않는 듯 말했다.
“ 키스. ”
“ 네? ”
윤호의 눈에 즐거운 기색이 스쳐갔다.
“ 남자는 상대에게 와인을 사고 여자는 키스를 해주지. ”
재중은 와인을 내놓지 않고 몸으로 때울 수 있다는 사실과 윤호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키스할 수 있다는 사실
중 어느 쪽이 더 기쁜지 잠시 판단을 하
기가 어려워졌다. 더블 스코어 따위가 아니다. 이건 트리플 최고 당첨 복권인 것이다.
재중은 마구 뛰기 시작하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의자에서 일어
나 테이블에 기대어 윤호에게 얼굴을 가져갔다. 정말 이런 기회는 죽었다 깨어나도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차마 윤호의 입에 키스를
할 용기까지는 없었다. 에라, 눈감고 그냥 박아버릴까.
그 그렇지만 그가 고개를 팩 돌려버리면 난 뭔가. 개망신. 개쪽. 그 짧은 순간동안 온갖 생각을
교차시킨 재중은 아까웠지만 할 수 없이 윤호의 얼굴에 키스하는 것으로 참아야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욕심이 지나치면 안돼 사람이. 만족할 줄 알아
야지. 이 정도도 나한텐 과분해.
윤호의 얼굴을 목표로 진격하기로 최종목표를 설정한 재중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셋, 둘, 하나!
“ …… ”
재중은 예상했던 느낌이 아니라 익숙한 또다른 감촉이 입에 닿는 것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윤호가 손을 들어 놀라 자신도 모르게
물러나려던 재중의 머리를 끌어당긴다. 입술을 열고 빠르게 혀가 질러 들어왔다.
재중은 한동안 자신에게 벌어진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만 깜박
이고 있었다. 이, 이것은! 이런 일이 정말로 있을 수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재중은 감격에 겨워
눈을 꼭 감고 익숙한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입안을 온
통 헤집어놓는 그의 감각을 얼마나 애타게 그리워했었는지.
몇 배로 급격하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쫓아 숨결이 거칠어진다. 키스만으로 이렇게 흥
분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신을 사랑해.
재중은 속으로 고백했다. 그의 열렬한 키스가 그 대답인 것처럼 스스로 착각하면서.
혀를 얽어 타액을 뒤섞어 넣던 그의 키스가 끝나고 입술이 떨어
졌을 때, 재중은 아쉬움과 함께 그보다 더한 것을 기대하며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윤호가 웃는다.
“ 웬만큼 식사는 끝난 것 같은데, 돌아갈까? ”
재중은 속마음이 들켜버린 것 같아 온통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고 겨우 끄덕였다.
윤호가 먼저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걸어간다. 재중은 그의 뒤를 따
라가려다가 뒤늦게 와인을 깨닫고 서둘러 그것을 챙겨 급히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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