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2부 14편)
“ 사인이 빠졌습니다, 사장님. ”
윤호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서류철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 사인이 빠졌다고? ”
“ 네, 여기와 여기. 그리고 여기도. ”
윤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신경질적으로 사인을 갈겨쓰고 나자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비서가 한 마디 한다.
“ 퇴근하시겠습니까? ”
“ 뭐야? ”
버럭 성질을 내자 벌써 몇 년 째 자신의 측근으로 일을 도맡아 오고 있던 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 그렇지 않으시고 계속 사무실에 앉으셔서 저에게 히스테리를 부리신다면 특별수당을 청구하겠습니다. ”
“ 청구해. ”
버럭 내지른 윤호의 말에 비서는 여전히 무뚝뚝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 제 아내에게 긁힐 바가지도 함께 청구하겠습니다. ”
“ 자네, 언제 결혼했었지? ”
“ 삼일 전에요. ”
시원시원한 대답에 윤호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 청첩장을 받은 일이 없는데? ”
“ 집안에서 냉수 떠놓고 했기 때문에 굳이 오실 일은 없었습니다. ”
저런 목석 같은 남자도 짝이 있군, 하고 윤호는 생각했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 그걸로 만족하던가? 여자들은 바라는 게 많을 텐데. ”
“ 사랑만 있으면 되지 절차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
말은 잘 하는군, 하고 생각하면서도 윤호는 내심 마음이 씁쓸해졌다.
“ 어제는 사무실에서 주무셨지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혹시 약혼녀분에게 쫓겨나기라도 하셨습니까? ”
“ 잘 알고 있군, 외람된 말이야. 조용히 해. ”
이를 갈며 내지른 윤호에게 그는 거의 억양이 들어가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 다 자란 성인이 욕구불만에 쌓이는 것도 꼴불견입니다. ”
“ 정 희태― ”
성을 붙여 이름 석자를 그대로 말한다는 것은 몹시 심사가 불편하다는 증거다.
꽤 오래 그를 옆에서 보아온 비서로서는 이럴 때 재빨리 사라지는 것
이 상책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비서가 눈치 빠르게 냉큼 나가버린 후 윤호는 짜증스럽게 이마를 문질렀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얼굴을 보면 안고 싶어질 텐데.
지금 난 그걸 바라는 게 아니야. 그런 것쯤은 누굴 상대로든 풀 수 있어.
내가 정말로 바라는 건……
여기까지 생각했던 윤호는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야.
난 절대로 그런 것 원하지 않아.
난 결코 바라지 않을 거야……
거대한 창 너머로 보이는 고층빌딩이 시야에 사로잡힌다. 윤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탁해, 난 결코 맹세를 깨는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던 생각이 순간 멈춰버렸다. 윤호는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다짐할 수 있어? 그 녀석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도 참겠다고 정말 다짐할 수 있어?
윤호의 깍지낀 손에 힘이 들어가 금세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났다.
지금이라도 그 녀석을 놓아주면 모두 다 없었던 일로 끝날 거야.
윤호의 가늘고 긴 눈매가 서늘하게 굳어졌다.
그러면 더 이상 이렇게 고민할 일도 없겠지. 모두 잊고 없었던 일로 끝날 테니까.
그게 가장 최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