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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47화 (47/123)

거짓말 (2부 13편)

그 날 윤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윤호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재중은

멀리서 해가 뜨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가

외박을 했다는 사실을 가슴아프게 인정해야했다.

다른 상대에게 간 걸까.

멍하니 침대에 앉아서 붉은 하늘을 바라보던 재중은 생각했다.

이제 정말로 내게 질려버려서, 다른 상대에게 가버린 걸까.

전날 얼토당토않게 돈 얘기가 나와버려서, 나한테 질려버린 거야.

나라도 돈만 밝히는 남창 따위 하나 미련 없을 테니까……

전날 너무 많이 울은 탓인지 두 눈이 뻑뻑해서 도무지 눈물이 나질 않았다.

머리는 무감각하게 버릇처럼 익숙한 행동을 지시한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시간표를 챙기고 가방을 어깨에 메자 자연스럽게 발걸음은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눈이 아파……

엘리베이터에 고정된 거울을 흘깃 보자 두 눈이 발갛게 익어있다.

그것이 수면부족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재중은 알 수가 없었다. 그

는 늘어지는 발걸음을 겨우 움직여 학교로 향했다.

그 날 하루종일 재중은 수업에 열중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딴 생각이 가득해서

도통 다른 것을 떠올릴 수가 없다. 하지만 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이라는 것도 전혀 앞뒤를 분간할 수 없이 떠돌아다니기만 해서 정작 자신의 머리가 뭘 떠올리고 있는 건지

재중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

다.

“ 재중아, 누가 찾아왔는데. ”

꺼림칙해하는 민철의 음성에 고개를 돌렸던 재중은 뒤늦게 벌써 점심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부산하게 오고 가는 아이들 틈으로 교실 문에 기대어

선 건우가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일부러인 듯 활짝 웃으며 크게 팔을 휘저었다.

“ 어이, 아직 식사전이지? 선약 없으면 같이 어때? ”

난감해하는 민철의 얼굴이 보였다. 재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할까. 어느새 건우가 들어와 바로 옆에 섰다.

“ 실은 친구녀석들에게 버림받았거든. 혼자 밥 먹는 건 정말 싫어서 말이야. 이 불쌍한 녀석을 동정해주지 않겠어? ”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 동정 받는 게 좋아? ”

“ 뭐가 어때서? 필요할 때는 당연히 받아야지. ”

“ …… ”

“ 굳이 자존심 세울 거 없잖아. 어차피 바라는 거라면. ”

그렇지. 왜 나는 이 녀석처럼 솔직하지 못할까. 그에게 동정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부탁한다고 매달려보기라도 할 걸.

재중은 한숨을 내쉬었다.

“ 항상 같이 먹는 친구가 있어. ”

“ 이 녀석? ”

마침 옆에 있던 민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건우를 보며 재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

건우는 피식 웃는다.

“ 그럼 어쩔 수 없지. ”

보기보다 포기가 빠르구나, 라고 재중은 생각했지만 그것은 보기좋게 빗나가 버렸다.

“ 셋이 먹자. ”

“ …… ”

민철과 재중은 어이가 없어 멍하니 건우를 바라보았다. 건우는 혼자 뭐가 그리 신나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 지금 시간이면 식당에 자리 없겠는데. 어떻게 할까? 15분 정도만 있다가 내려가도 자리는 충분할 텐데. 급해? ”

재중은 민철을 바라보았다. 민철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 난 괜찮아. ”

“ 그럼 여기서 셋이 기다리지 뭐. ”

건우는 마침 비어있는 옆자리의 의자를 꺼내 털썩 앉았다. 꽤나 넉살이 좋은 성격이다.

어디 가도 굶지는 않겠군. 재중은 속으로 생각하며 입을 다물

고 있었다. 다리를 넓게 벌려 의자 등을 안고 앉은 건우가 말했다.

“ 나 아직 네 이름 몰라. ”

“ …… ”

“ 나는 이 건우고, 9반이야. 어제 봤다시피 그런 친구들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건실하게 살고 있다고. ”

“ …… ”

“ 키하고 몸무게도 얘기해줄까? ”

재중은 그가 웬만해서는 쉽게 물러나줄 것 같지 않아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 김재중. ”

“ 재중아. ”

냉큼 이름을 부르는 건우의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그가 웃었다.

“ 아니, 불러보고 싶어서. ”

“ …… ”

실없는 녀석, 하고 재중은 입을 다물었다.

“ 정의의 기사, 넌 이름이 뭐냐? ”

화제가 민철에게로 돌려지자 그는 허둥지둥 대답했다.

“ 차 민철이야. 재중이랑은 2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고. ”

“ 지금 반장? ”

“ 그래. ”

“ 인덕이 좋은 모양이네. ”

감탄하는 기색으로 말한 건우에게 민철이 말했다.

“ 너도 성격은 좋아 보이는데. ”

건우는 손을 깍지껴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 성격은 좋은데 성적이 나빠서. ”

민철은 웃었지만 재중은 여전히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건우가 재중의 무뚝뚝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난폭하게 머리를 붙잡고 헝

클어뜨렸다.

“ 아얏! 뭐하는 짓이야? ”

소리를 지르며 손을 뿌리치자 건우가 웃는다.

“ 너무 반응이 없어서. 눈 뜬 채로 조는 줄 알았지. ”

“ 헛소리에 일일이 반응하고 싶지 않아. ”

“ 아아, 무정한 아도니스. ”

재중은 정말 확 후려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건우의 너스레를 상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탓이다. 하지만 건우는 재빨리 일

어나더니 재중의 뒤를 냉큼 쫓아오며 말했다.

“ 어이 차 민철! 밥 먹으러 가자! ”

왜 이렇게 반갑지도 않게 꼬여드는 인간들이 많을까, 하고 재중은 앞서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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