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2부 9편)
드르륵.
말리려던 건우의 음성은 갑자기 들려온 문소리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민철은 그대로 굳어져 멈춰서고 말았다. 학교에서 소문난 패거리들에게 둘러싸인 채
바닥에 꿇어있는 것도 쇼킹할 텐데 재중
의 더럽혀진 입가라든가, 막 펠라를 하기 직전의 포즈라던가,
아직 붉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건우의 모습들은 그로 하여금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던 것 같다. 영철은 마침 좋은 시간을 방해받은 불쾌감에 그를 노려보며 내갈겼다.
“ 뭐야? 볼 일 있어? ”
기가 죽어 도망칠 거라 생각했던 재중의 예상과는 달리 민철은 보기보다 당당한 태도로 대답했다.
“ 그래, 다음 시간에 실험이 있어서 준비하러 온 거야. ”
영철이 피식 웃는다. 그런 속이 보이는 거짓말은 하지도 말라는 듯이. 민철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 정말이야. 시계 보면 알잖아. 이제 곧 종 칠 거라고. 나는 준비하러 미리 교실 나온 거란 말이야. ”
“ 그건 그렇군. 곧 종 칠 시간이긴 하지. ”
갑작스레 끼어든 구원의 음성에 재중과 민철은 같이 고개를 돌렸다.
건우는 어느새 매무새를 가다듬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말했다.
“ 일단 후퇴하지. 오늘은 원래 생각했던 날은 아니었잖아. ”
“ 씨발새끼, 너만 재미보고 끝내자고? ”
영철이 뇌까렸다. 약이 단단히 오른 모양이다. 건우는 그에 비해 웃는 얼굴로 말했다.
“ 일단, 이라고 말했잖아. 다음엔 좀 더 여유있게 계획을 짜보자고. ”
“ 시끄러워, 이 새끼 끌고 가버리면 그만이야. 장소는 많으니까. ”
그는 진심인 듯 잡고 있던 재중의 머리털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재중은 갑자기 끌려가 버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건우의 눈썹이 크게 꿈틀
거린다.
“ 그만 두라고 했어, 윤 영철. 아니면 지금 여기서 나랑 맞장뜰래? ”
영철은 갑자기 민감하게 나서는 건우를 보고 움칠했다.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눈매가 매섭다.
전혀 농담이라고는 자취를 찾
아볼 수 없는 그의 태도에 영철은 자신도 모르게 재중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 씨발. ”
영철은 건우의 기세에 밀려버린 자신에 대해 화가 나 거칠게 욕설을 내뱉고 돌아서 버렸다.
그의 뒤를 따라 패거리들이 한 마디씩 욕지꺼리를 하며
나간다. 가장 마지막에 남겨져 있던 건우는 재중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주더니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 싫은 일이었을 텐데 억지로 시켜서 미안. ”
“ ……. ”
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재중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 하지만 너도 사내니까 알 거 아니야? 그렇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 하고 있으면 누구나 건드려보고 싶어한다고.
……물론 네가 그런 걸 즐긴다
면 그걸 막은 내가 잘못한 거겠지만. ”
“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야. ”
날이 선 음성으로 내뱉은 재중을 보고 건우가 웃었다.
“ 거짓말쟁이. ”
“ ……. ”
“ 좋은데, 나 진심으로 너를 깔아보고 싶어졌어. ”
“ …… ”
“ 네가 스스로 좋다고 할 때까지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이래봬도 인내심은 꽤 있는 편이거든. 앞으로 잘 부탁해. ”
재중은 처음으로 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빌어먹을 새끼, 평생 기다려 봐라. ”
건우는 또 웃었다.
“ 기대해보지. ”
그리고 그는 그 때까지 붙잡고 있던 재중의 팔을 놓고 돌아섰다.
그 때까지 멀거니 서 있던 민철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며 그가 한 마디 덧붙였다.
“ 여, 정의의 기사. 오늘 아주 멋졌어. ”
재중은 휘파람을 불며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노려보았다.
“ 괜찮아? ”
민철이 말했다. 재중은 기운이 빠진 듯 벽에 기대어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민철이 서둘러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재중의 입가를 닦아준다. 재중은
잠자코 그가 하는 짓을 내버려두었다.
“ 수업준비 해야한다면서. ”
“ 거짓말이었어. ”
“ ……. ”
“ 어떻게 된 거야? ”
조심스런 민철의 질문에 재중은 피식 웃었다.
“ 네가 말했던 일이잖아, 영철이 패거리들. ”
민철은 창백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 저…… 다짜고짜 끌고 오든? ”
“ 어차피 반항해봐야 소용없으니까 내가 끌고 왔어. ”
민철이 놀랐는지 숨을 삼킨다. 조금은 반항할 거라 생각하기라도 했었는지. 재중이 피식 웃었다.
“ 난 원래 이런 놈이야. 너도 눈치깠을 거 아니야? 저번에 학교 앞에서 기다리던 그 새끼가 내 물주라고. ”
“ 넌 그런 애 아니야. ”
“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서? ”
따지듯이 달려든 재중의 말에 민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 만용은 좋지 않아. 스스로를 귀하게 여겨야지. 그리고 거짓말도 하지 말아. 결국 들통나게 될텐데. ”
“ 하지만 시간은 벌 수 있잖아? ”
홍당무에 나오는 대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며 대꾸한 재중을 보며 민철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일단 나가자. 종 쳤어. ”
“ 너나 나가. ”
“ 재중아…… ”
“ 혼자 있고 싶어…… ”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리자 민철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다가 천천히 일어나 실험실을 나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비로소 재중은 참아왔던 숨을 깊이 내쉬었다.
피곤하다.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긴 하루다. 아직도 시간은 2시를 좀 지났을 뿐이다. 갑자기 재중은 윤호의 음성이 듣고 싶어졌다.
숨막히도록 강렬한 그의 체
취를 느끼고 싶어졌다. 너무나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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