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2부 6편)
아침에 일어났을 때 윤호는 없었다. 고 3보다 일찍 나가는 회사원이라니, 하고 재중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옷을 갈아입고 호텔을 나왔다. 버스를 타고
서도 재중은 내내 윤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요즘 윤호의 태도가 특히 더 무심해져서 재중은 그다지 기분이 안 좋았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그러면
말을 해주면 좋을 텐데 왜 그럴까. 질려서라면 이미 쫓아냈을 텐데. ……
혹시 내가 갈 곳이 없다는 걸 아니까 동정해서 그나마 있게 해주는 거라면 어
떻게 하지. 가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주어진다.
그래도 곁에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해야할까.
하지만 상상은 계속해서 나쁜 쪽으로만 향해간다. 종내는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약혼녀를 데려와
자신의 눈앞에서 관계를 갖는 것까지 생각했을 때,
마침 내리려는 정류장에 닿아서 재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안녕.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저 쪽에서 걸어오던 민철이 재중을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재중은 중얼거리듯 인사를 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앞서서 걸어갔다.
“ 재중아? ”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
나, 그러고도 그 사람 곁에 있을 수 있을까. 참을 수 있는 걸까. 울면
서 매달리기라도 하면 그는 나를 받아줄까. 다시 전처럼 안아줄까.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좋지.
“ 너, 몸파는 애지? 주제를 알고 덤벼야지. 어디서 함부로 까부는 거야? 웬만큼 상대했으면
다른 손님 찾아가란 말이야. 왜, 윤호씨만큼 많이 주는 물
주 잡기 힘들어? 그럼 내가 소개시켜줄까? 너 같은 애한테 딱 맞는 변태한테 말이야.
너 따위가 어떻게 감히 윤호씨같은 사람을 물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주제파악하고 당장 나가. 너 같은 거 내 눈앞에 숨쉬고 있다는 것조차 불쾌하니까. 뭐해? 당장 나가란 말이야! "
날카로운 비명같이 할키우던 그녀의 음성이 생각났다.
“ 빌어먹을 남창새끼같으니, 죽여버릴 거야!!! "
어떻게 하지. 그는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가버리려는 거야. 더 이상 내가 잡고 있을 수 없는 거야. 어떻게 하면 좋지.
탁―!
그 순간 재중은 누군가에게 부딪혀 걸음을 멈춰버렸다.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재중은 부옇게 흐려진 시야 때문에 서둘러 고개
를 숙이고 걸음을 빨리해 총총히 걸어가 버렸다.
“ 새끼, 입이 붙었나. 사과도 안 해. 저거 4반의 그 새끼지? ”
재중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던 건우에게 옆에 있던 패거리놈이 말했다.
“ ……영철이가 노리는 놈이라고? ”
건우가 물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재중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그래. 한 번 깔아보겠다는 그 새끼 있잖아. 왜, 너도 낄래? ”
건우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재중의 뒷모습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 언제 할 건데? ”
“ 이 새끼, 관심 없는 척 하더니. 보니까 역시 동하지? 아랫도리가 후끈하지 않냐?
저 새끼 한 번 깔고 나면 며칠은 자급자족할 수 있겠어. ”
키득거리는 놈을 보며 건우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울고…… 있는 것 같았는데……
건우는 턱을 쓰다듬던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혀를 찼다.
“ 무슨 상관이야. ”
전날 자신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그가 오늘 이렇게 마음을 들쑤셔놓는다는 것을 건우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영철이놈들이 하는 말처럼 한 번 상대하
고 나면 이 열은 식어버릴까. 사내의 욕정이 대개 그렇듯, 발정하고 나면 끝나버리는 걸까.
“ 그런 거라면 좋겠는데. ”
왠지 썩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그를 상대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에게 접촉을 하고 나면 다시는 손을 놓을 수 없을 것 같은 분명한 예감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이성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감정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모든 감각을 휘저어놓는 그에 대한 기억으로
치달아가기만 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