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2부 5편)
삑―
7시.
재중은 흘깃 시계를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들어오는 사람은 하루 종일 기다렸던 바로 그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서 단 1분도 틀리는 일이 없
다. 재중은 의자에서 일어나 짐짓 쾌활하게 미소를 지었다.
“ 어서 오세요. ”
윤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옷장으로 가서 타이와 양복을 벗기 시작한다.
“ 물 받아놓을까요? 씻겠어요? ”
재중의 질문에 윤호는 대답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 식사는 했나? ”
“ 점심을 많이 먹어서 안 먹어도 괜찮아요. ”
냉큼 대답했지만 윤호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팔짱을 끼고 재중을 바라보았다.
“ 룸서비스를 시킬까 아니면 나갈래? ”
“ 안 먹고 싶은데요…… ”
“ 넌 먹어야 해. 비쩍 마른 상대처럼 싫은 게 없어.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말라가는 것 같은데,
제대로 먹긴 하는 거야? ”
하긴, 그렇구나. 난 그에게 있어서 섹스 상대일 뿐인데 형편없이 말라버리면 안기 싫겠지.
가뜩이나 여자와는 틀려서 부드러운 구석이라고는 없을 텐
데 딱딱한 데다 마르기까지 하면…… 하지만 이제 막 퇴근한 윤호를 끌고 밖에 나갈 수는 없었다.
피곤할 텐데 식사까지 신경쓰게 만드는 것은 싫은
탓이다.
“ 룸서비스로 할게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윤호가 전화를 들어 이것저것 지시를 한다.
몸에 배어있는 지배자의 언동에 재중은 가끔씩 경외심을 느낄 때가 있다. 그를
숭배하니까, 더욱 그렇겠지. 피식 웃자 때마침 전화를 끊었던 윤호가 묻는다.
“ 왜 웃지? ”
재중은 별 것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 하루동안 당신이 너무나 보고 싶었어요,
라고 말하면 이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 쓸 데 없는
소리는 그만 둬. ” 라고 말할까, 아니면 고개를 내저어버릴까. 상상 속에서만이라도
다정하게 나를 보아줬으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그의 차가
운 연인은 그것조차도 냉정하기 그지없다. 역시나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상상 속의 그에게
크게 실망해버린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깊
이 한숨을 내쉬었다.
“ 왜 그러지? ”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윤호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신경쓰게 해버렸구나,
하고 생각하며 사과하려던 재중은 문득 윤호의 굳게 닫혀진 입술
을 키스로 열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달라붙어서 입술을 맞대면 어떻게 될까.
혀를 밀어 넣어서 입술을 열고, 당혹해하는 혀를 감아서……
“ 이봐. ”
윤호는 재중의 끝없는 상상을 저지하려는 듯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한마디했다.
“ 그렇게 젖은 눈으로 보지 말라고, 참기 힘들어 지니까. ”
에…… 내가? 놀라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윤호가 쓴웃음을 짓는다.
“ 많이 늘었는데. 곤란해. ”
때마침 들려온 벨소리에 윤호가 돌아서며 말했다.
“ 다른 곳에 가서 그런 표정은 짓지 마. ”
여전히 눈만 깜박이고 있는 재중을 남겨둔 채 윤호는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어주었다.
주문한 것을 실어온 보이에게 팁을 주고 둘은 식사를 시작했
다. 이것저것 두서없이 말을 나누긴 했지만 그다지 불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자 윤호는 욕실로 향한다. 재중은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함께 씻어도 좋은데, 하고 생각하며 슬쩍 도발해볼까 생각하는
자신이 무척 음탕하게 여겨졌다. 벗고 들어갈까 아니면 바
스 가운을 걸치고 들어갈까. 젖어있는 그의 몸에 비누를 발라주는 것만으로도 꽤나 자극적인 일이 될 것 같다.
이것저것 상상이 부풀어올라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는데, 애석하게도 물소리가 끊겨 버렸다. 에, 벌써? 놀라 시계를 보니 20분이 지나 있다.
이런, 아까는 그렇게도 안 가던 시계가 어쩌면
이렇게 빨리 달려갈까. 무정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좋아, 침대에서 기다려야지.
재중은 그가 나오기 전에 냉큼 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갔다. 자는 척을 할까 아니면 “ 어서 들어오세요 ”
라고 유혹을 해볼까. 잠시 망설이며 누워있었
지만 정작 ‘달칵’ 하고 문소리가 들렸을 때는 온갖 생각이 다 달아나 버렸다.
얼떨결에 자는 척을 해버린 재중은 일부러 조금 깊은 숨소리를 내며 실눈
으로 눈치를 살폈지만 윤호는 흘끔 재중을 보더니 곧장 창가로 가 앉는다. 이런, 어서 들어오세요, 로 하는 건데!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었다. 재중은 가끔은 자는 사람 깨워서 하면 좀 어떤가, 하고 윤호를 원망했다.
찰칵, 하는 라이터소리에 이어 흐릿한 담배향이 퍼진다. 익숙한 윤호
의 담배향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생각해보니 윤호가 자신을 피한지 꽤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윤호는 왠지 거리가 느껴졌다. 언제나 시간에 맞춰 돌아
오지만 일상적인 대화나 일들 말고는 거의 접촉을 하려하지 않았다. 왜일까. 왜 나를 안아주지 않을까.
나한테 질려버린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나
가라고 하지 않을까. 윤호의 태도는 이상했다. 며칠에 한 번은 안을 때도 있었지만
그닥 내켜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하다. 행위도 그다지 열정적이지
않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불안해하며 생각을 굴리던 재중은 한참만에 윤호가 일어나는 기척을 깨닫고
서둘러 다시 자는 척을 했다. 윤호의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심장도 그에 비례해 더욱 격렬하게 뛰어댔다.
이윽고 침대 한 쪽이 기울어지고 시트가 올려진다. 등으로 찬 바람이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윤호가 자신의 허리를 안아 키스해주지 않을까, 하고 헛된 바램을 품었던 재중은 조용히 옆에 누워
등을 돌리고 잠을 청하는 윤호에게 다
시금 실망했다. 잠시 후 윤호는 잠이 든 듯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재중은 새벽이 가까울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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