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짓말-34화 (34/123)

거짓말 - (34)

“ 어서 와. ”

빙긋 웃으며 문을 열어준 창민을 올려다본 재중은 그를 스쳐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거실을 지나 그의 방으로 간 재중

은 역시 아무 말 없이 옷을 벗기 시작한다.

“ 아, 그 전에 말이야. ”

막 바지를 벗으려 하는데 들어온 창민이 뭔가를 내밀었다. 손에 들려 있는 약을 보고 재중이 얼굴을 찌푸린다.

“ 약은 싫어. 안 먹겠어. ”

하지만 창민은 여전히 웃으며 약을 내밀었다.

“ 이번만 먹으라고. 좀 색다른 게 하고 싶으니까 말이야. ”

재중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창민을 노려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전혀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중은 이를 악물고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런 식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어서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다.

막 입에 약을 털어넣기 전에 재중이 한 마디 덧붙였다.

“ 다음에는 절대로 먹지 않을 거야. 이번에는 하겠지만, 또 이런 식이면 돌아가 버릴 거니까. ”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약을 한 번에 털어넣고 물을 삼키는 재중을 보며 창민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 물론이지. 나 역시 다음에는 안 쓰고 싶어. ”

재중이 창민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창민은 사이드 테이블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수갑을 보고 재중은 다시금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저런 것까지 하나. 창민이 재중의 두 손을 붙잡아 위로 올린다.

침대 기둥사이에 걸쳐진 수갑이 두 손목에 차갑게 자리잡았다.

“ 기대해, 오늘은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해두었으니까 말이야. ”

창민이 말하며 히죽 웃었다. 재중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민은 뭐가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재중의 바지를 벗겼

다. 무엇도 걸치지 않은 맨 몸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은 꽤나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빤히 재중의 몸을 훑어보고

있는 그의 시선에 재중은 성급하게 소리쳤다.

“ 뭐하는 거야, 빨리 해. ”

창민은 재중의 말에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 아아, 미안. 그만 넋을 잃고 말아서. 지금까지 제대로 네 몸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하도 네가 보채서 일찍 끝내느라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감상

하겠어? ”

손가락으로 가슴을 거쳐 아랫배까지 천천히 선을 그어 내려가던 창민이 말했다.

“ 그러니까 오늘은 천천히 즐겨보자고. ”

“ 그럴 시간이… ”

말을 하려다 말고 재중은 입을 다물었다. 정신이 조금씩 몽롱해진다. 힘이 빠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건 어떤 약일까.

“ 이제 약 기운이 도는 모양이군. ”

창민은 웃음이 실린 어조로 말하고 재중의 다리사이로 들어왔다.

재중은 평소처럼 그가 다리를 가르고 곧바로 삽입을 할거라 예상했지만 그는 그렇

게 하지 않았다.

“ 무슨 짓… ”

갑자기 창민이 재중의 것을 손에 쥐는 바람에 놀란 재중이 소리쳤다. 창민이 히죽 웃는다.

“ 말했잖아, 새로운 걸 해보자고. ”

“ 싫어… ”

몸을 비틀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창민은 느긋하게 재중의 것을 어루만지며 흥분을 유도해냈다.

약 때문에 그런지 금새 허리가 지끈거린다. 싫다. 윤호이외에 느끼는 건 싫어. 아무리 약 때문이라고 해도 싫어.

재중은 이를 악물고 새어나오려는 신음을 억눌러 참았다.

“ 어린 애가 참을성이 너무 많으면 그것도 곤란하지. ”

창민은 말하며 재중의 것을 어루만지던 손에 조금 힘을 주어 문질렀다. 순간 재중이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 싫어… 그만 둬. ”

이를 악물고 말했지만 창민은 웃을 뿐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허리아래쪽으로 뻗치던 전류가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것 같다. 하지만 재중은 새어

나오려는 신음소리를 애써 죽이며 참고 있었다. 창민이 귓가에서 속삭인다.

“ 이렇게 성의를 다하는데, 예쁜 소리쯤은 내주면 어때? ”

그와 동시에 창민은 재중의 것을 크게 그라운드 시켰다. 머릿속에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 같다.

거칠게 숨을 들이키는 순간, 때를 같이 해서 갑자기 벨

소리가 들렸다.

딩동―

재중은 잔뜩 열이 오른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문쪽을 바라보았다.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창민이 귓가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 신경쓰지 마. ”

그래도 역시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창민은 초조해하고 있는 재중을 보며 잔뜩 흥분이 되어 바르르 떨리고 있는

그의 것을 붙잡고 속삭였다.

“ 여흥은 이제부터라고. ”

말과 동시에 찰칵, 하고 문소리가 들려온다. 현관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온 것이다. 조용한 발소리.

문득 섬뜩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

찬의 눈이 커졌다.

“ 설마, 당신… ”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입을 연 재중의 말에 대답한 것은 창민이 아니었다.

“ 심창민, 집에 없나? ”

순간 재중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윤호의 목소리다. 창민이 하얗게 질린 재중의 얼굴을 보고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 어때? 스릴 넘치지? ”

때를 같이 해서 재중의 것을 붙잡아 끝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비명이 터져 나갈 것 같아 재중은 이를 악물었다.

창민이 뒤늦게 생각난 듯 친절하게

덧붙였다.

“ 참, 그러고 보니 말이야. 이 아파트는 다 좋은데 벽이 얇아서 말이지…

조금만 떠들어도 금새 밖으로 퍼져 나가버리거든. 아쉬운 일이야. ”

재중은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그를 잔뜩 노려보았다. 윤호는 아직 밖에 있었다. 어떻게 하지.

이런 모습을 들킬 수는 없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

까 이 남자는. 그렇게 경고했는데 이런 일을 벌이다니.

“ 심창민, 사람을 불러놓고 나가기라도 한 거냐? ”

짜증스러운 듯 소리친 윤호가 돌아서는가 싶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재중은 너무나 긴장해서 자신의 심장도 멎어버리는 듯한 착

각이 들 정도였다.

“ 예쁜 신음소리 하나 정도 내주면 그만 둘 텐데. ”

창민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재중은 여전히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 난 셋이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말이야. 너도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앞으로도 좋겠지? ”

재중은 그의 말 따위는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윤호가 어째서 걸음을 멈췄을까. 뭘하고 있는 걸까.

행여나 방으로 들어오는 건 아닐까. 들어

오면 어쩌지. 약 때문에 잔뜩 흥분해 있는 지금 모습을 봐버린다면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실수였다.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버티는 거였

는데. 온갖 상황에 대한 상상으로 머릿속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창민이 그런 재중을 보고 웃으며 대안을 제시했다.

“ 어때, 네가 지금 하나만 약속하면 나가서 윤호를 돌려보내지. 물론 너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겠어. ”

재중은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창민이 비열하게 웃었다.

“ 다음부터는 아가씨를 방해하지 말 것. ”

재중은 그 순간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뭐야, 그랬던 건가. 그것 때문이었나.

생각을 뒷받침하듯 창민이 말했다.

“ 남자가 여자의 앞을 가로막는 것도 꼴불견이잖아? 게다가 너도 알 텐데. 윤호와 그 아가씨가 어떤 관계인지,

네가 그런 짓을 해봐야 너한테 이득

은 없을 거라는 걸 말이야. ”

알고 있어. 알고 있단 말이야. 그런 것, 네가 지껄이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사람은 그래도 바라게 되어 있잖아. 아주 작은 거라도 바라게 돼. 그게 잘못이야? 그

녀가 그를 차지하는 아주 당연한 결론에,

아주 잠깐 내가 그의 일부를 간직하고자 하는 것이 이렇게 큰 잘못이라는 거야?

왜 나는 그 정도도 허용 받지 못하나. 어째서.

재중은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것을 애써 참고 가늘게 입술을 떨었다. 창민이 그를 비웃듯 말했다.

“ 사람이 욕심이 과하면 망하는 법이거든. ”

오르지도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마, 하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재중은 그를 노려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말로 해 봐. ”

그는 잔인하게 재촉한다. 재중은 흐느낌이 섞여버릴 것 같은 음성을 겨우 억누르고 말했다.

“ …다신 안 그럴게. ”

“ 좀 더 정중하게. 뭐라고? ”

재중은 수갑에 묶여있는 손이 저주스러웠다. 숨을 들이킨 후 그를 있는 힘껏 노려보며 이를 간다.

“ 다신 그런 짓 하지 않겠습니다… ”

“ 좋아. ”

창민은 씨익 웃으며 재중의 벗은 엉덩이를 쓰다듬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부터 그가 옷을 벗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이것이었다. 재중은 침대

위에 남겨진 채 창민이 방에서 나가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윤호에게 뭔가 말하는 것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잠시 후 문소리가 나고 발소리가 이어

진다. 문이 열리고 창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 ”

그는 웃으며 다가와 침대 옆에서 옷을 벗었다. 아직 약기운이 남아 현기증이 난다.

창민은 재중의 위로 몸을 겹치며 말했다.

“ 이제 마음껏 울려도 되겠군. ”

그리고 창민은 곧장 재중의 다리를 가르고 들어왔다. 욱씬한 통증이 온 몸으로 빠르게 퍼져 나간다.

재중은 이를 악물었지만 그것이 또한 쾌감으로

번져가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자기혐오에 가득 찬 뇌와는 반대로 몸은 더욱 강렬한 흥분을 원한다.

창민의 거친 행위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재중은 새어나오는 신음을 가까스로 참는 것이 전부였다.

행위가 끝나고 옆에 쓰러져 숨을 가다듬는 창민을 보고 재중은 지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풀어 줘. ”

창민은 팔을 뻗어 재중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 지독히도 무정한 연인이군. 아까 그토록 격렬하게 사랑을 했는데 말이야. ”

재중은 허리를 비틀어 그의 손을 거부하며 거친 음성으로 내질렀다.

“ 어서 놔, 돌아가야 하니까. ”

창민은 잔뜩 힘이 들어간 재중의 눈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사이드 테이블에서 열쇠를 꺼내 수갑을 풀어주었다.

팔이 저린다. 재중은 뒤늦게 피가 통

해 움칠거리며 붉게 변색된 두 팔을 겨우 움직여 옷을 입기 시작했다.

한참에 걸려 옷을 입는 동안 창민은 침대에 누워 머리를 손에 기댄 채 재중을 바

라보고 있었다.

“ 이봐,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겠어? ”

막 재중이 방문을 열었을 때 창민이 물었다. 돌아보자 창민이 히죽 웃는다.

“ 나와 하면 빚도 갚고 즐기기도 하고, 좋지 않아? 지금이라도 생각을 돌리는 게 좋을 텐데.

나도 섹스 상대에게는 후하다고. ”

재중은 대답대신 그를 한껏 노려본 후 방에서 나갔다. 발을 끌며 집을 나가는 재중의 발소리를 듣고 있던 창민이

혼잣말을 했다.

“ 이거야, 곤란하군. 정말로 반해버린 것 같아. ”

The Confession  -  참 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지상에 남아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는 나에게 “아이 따위 질색이야” 라고 말하며

경멸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녀는 아름다웠

다. 그녀는 여지껏 본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여자였다. 다만 자신 외에는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큰 결점이긴 했지만.

어릴 때의 나는 단 한 번도 누군가와 식사를 한 기억이 없다. 언제나 넓은 집안에 있는 것은 나 혼자였고,

역시 휑한 식탁에 앉아 묵묵히 밥을 먹는 동

안에도 나는 혼자였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저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주기를,

TV나 동화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다정한 한 마디를 건네

받기를 원했을 뿐이다. 언젠가 그것을 기대하고 조심스럽게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녀는 거울을 통해 나를 바라보며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 너를 낳은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손해를 봤어. 그런 것까지 신경 쓰게 만들지 말아라. ”

그리고 그녀는 휭하니 일어나 연인을 만나기 위해 나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각기 다른 연인이 있었다. 조금 더 컷을 때 안 일이었지만, 나의 부모님은 정략결혼이었다.

가문과 가문을 잇기 위한 것이 목적의

전부인 결혼. 때문에 아이를, 그것도 대를 이을 자식을 낳은 이상 어머니는 더 이상 집안에 머물러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독히도 바람기

가 심한 여자였는데, 단 한 번도 같은 상대를 대동하고 가쉽에 등장한 일이 없었다.

매번 바뀌는 그녀의 상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조금 더 자란 후였

지만, 그 때 이미 그녀는 세상에 없었기 때문에 이유를 묻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 나를 낳았을까, 당신은.

이유는 간단하다. 정략이니만큼 후계자는 더욱 필요했겠지. 어쩔 수 없이 낳긴 했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나를 안아준 적이 없었고 간혹 말을 할 때면

심한 말도 서슴치 않았다. 마치 그것에 상처받는 나를 보며 즐기듯이.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는 특히 보기 어려

웠는데, 어머니는 간혹 애인이 바뀌게 되면 집으로 돌아와 쉬다가 다시 집을 나가는 반면 아버지는

아예 거의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렇게 버림받은

동안, 나는 누구에게도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 말을 걸어와도 내게 친절하게 대해주어도,

그들은 돌아서서 언제나 말하곤 했다.

“ 저 애는 애 같지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

그들의 친절은 고의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고, 말은 마지못해 내뱉는 하나의 도구였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견고하게 나의 껍질 속에 파묻혀

들어갔다. 깊이, 더 깊이.

그 날은 어버이날이었다.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에게 색종이로 카네이션을 만들게 했다.

어렵게 종이를 오려 풀로 붙여 수수깡에 핀으로 고정을 시킨

다. 그 간단한 작업을 아이들은 오전 내내 해야했다. 나도 그 중의 하나여서, 그래도 꽤 몰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완성했을 때 내 카네이션은 다른

아이들보다 크고 잎도 몇 배는 많았다. 유치원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나는 그녀의 친절한 가르침을 덧붙여 들었다.

“ 이 카네이션을 부모님한테 드리고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거야. 그러면 아주 기뻐하실 거다. ”

그녀는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확신을 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시킨 거니까 해야하는 걸까,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나의 뒤에

서 보란 듯이 한 아이가 만든 카네이션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말했다.

“ 이런 거 집에 가져가면 엄마한테 혼나. ”

선생은 무안한 듯 서둘러 일어나 그 아이를 모른 척하고 돌아서서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나는 그 때까지 들고 있던 카네이션을 내려다보고 잠시 망설

였다. 어떻게 할까. 가져갈까 버리고 갈까.

한동안 고민하던 나는 나름대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선생님이 하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해야겠지.

그리고 나는 조금의 기대를 한 것도 같다. 조그만 유치원 가방 안에 망가지지 않도록 소중하게

종이 카네이션을 집어넣고 나는 선생에게로 향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어머니를 찾았다. 전날 그녀는 예전 애인과 헤어지고 집에 와있었다.

넓은 집을 가로질러 계단을 뛰어올라가 숨을 헐떡이

며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막상 문 앞에 서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나는 숨을 가다듬으려 애썼지만 급한 경주로 거칠어진 심장소리는 또 다른

두근거림으로 이어져 도무지 가라앉질 않았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용기를 쥐어짜 노크를 했다.

똑똑.

대답이 없다. 벌써 나가버린 걸까, 하고 불안해하며 조심스레 문을 열자,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 뭐야, 또 너니? 무슨 일이야? ”

성가시다는 듯이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한 그녀에게 나는 쭈삣거리며 다가갔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서 카네이

션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때마침 다 끝낸 화장을 접고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 이게 뭐지? ”

그녀가 가는 손가락으로 내게서 그것을 가져갔다. 나는 가슴이 또다시 두근거렸다.

미간을 찌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겨우 입을 열었다.

“ 저, 저어… ”

“ 지저분하게, 이런 건 집에 가져오지 마. ”

그녀는 나의 말을 가로막고 신경질을 내며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카네이션이 볼품없이 쓰레기통에 처박힌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나를 밀치고 방에서 나갔다.

“ 쓸모 없는 아이 같으니. ”

그녀는 마지막으로 내뱉고는 총총히 걸어갔다. 나는 묵묵히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나는

그녀의 모습이 멀어져 내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즈음에야 비로소 혼잣말처럼 조그맣게 속삭였다.

“ …사랑해요…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멀리서 문이 닫히고 차의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기운 없는 발걸음을 내 방으로 향했다.

그냥 버리고 올 걸.

뒤늦게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날 집을 나간 어머니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애인과 함께 탔던 자동차가 사고를 일으켜 그 자

리에서 사망했으니까.

장례식에서 나는 오랜만에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전혀 슬퍼하는 기색도 분통해하는 기색도 없이 조용히 장례절차를 밟았다. 사람

들이 떠들썩하게 다녀가고 한동안 집은 무척 어수선했다.

나는 묵묵히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검은 옷을 입고 한 쪽에 서있기만 했다. 아버지는 그 동

안 단 한번도 내게 시선을 주는 일이 없었는데, 차가워 보이는 이목구비가 웬지 섬뜩해서

나는 그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 먼저 잠자리에 들었던 나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났다가 아래층 거실에서 삼촌과

말을 나누는 아버지를 보았다. 걸음이 멈추게 된 것은

삼촌으로부터 내 이름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 윤호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재혼을 하려면 저 애가 걸릴 텐데. ”

어머니의 장례식날 아버지는 자신의 수많은 애인 중 하나와 재혼을 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대화를 엿듣고 있는 나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아버

지는 잔뜩 불만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 골치 아프군. 저 애는 존재 자체가 문제야. ”

삼촌이 웃었다.

“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지. ”

나는 그들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미쳐버렸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뭔가 알 수 없는

통증이 스쳐가는 것까지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존재 자체가 문제야.

차마 화장실에 가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온 내 귓가에 삼촌과 아버지의 대화가 끊임없이 리버스되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지.

그래서 그녀도 나를 그렇게 미워했을까. 단 한 번도 나를 안아주지 않고, 내게 친절한 말 한 마디도 건네지 않고,

그래서였을까.

나는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어 그날 밤 내내 뒤척이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선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3개월 후에 재혼을 했다. 새로 들어온 여자는 처음엔 내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척 했으나

곧 질린 듯 아예 나를 무시했다. 나 또한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든 나와 관계되지 않는 한은 관여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분이 나쁠 때면 언제나 내게 트집을 잡아 혼내는 것이 다

반사였기 때문에 나는 방안에 틀어박혀 문을 잠그고 며칠동안 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굶기 일쑤였지만 조금 머리가 크자 방안에 조그마한 냉장고

를 들여놓는 것으로 그것을 해결했다.

아버지의 세 번째 결혼상대는 나로 하여금 비디오와 텔레비젼을 함께 구비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특기가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부수는 것이었

는데, 그럴 때면 언제나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엔 오디오를 크게 트는 것으로

그녀의 히스테리를 무시해버렸지만 그것도 지겨워져

서 비디오와 텔레비젼으로 종목을 바꿨다. 그녀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집을 나가는 날 마지막으로

내 유선 안테나를 부서 버렸다.

아버지의 네 번째 결혼상대는 그나마 좀 나았다. 시끄러운 여자들에게 질렸는지

아버지는 이번엔 좀 조용한 여자를 들여왔는데, 대신에 그녀는 지나

칠 정도로 다른 이들에게 참견하기를 좋아해서 또다시 나를 방에 틀어박히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그녀는 방을 두드리면서 내

게 ‘밥은 먹었느냐’ ‘안에서 도대체 뭘 하는 거냐’ ‘넌 왜 그렇게 나한테 협조를 안 하는 거냐’

라고 혼자 떠들어대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는 내 방에 방

음벽을 설치했다.

아버지의 다섯 번째 결혼상대는 가장 괜찮은 여자였다.

그녀는 온갖 감언이설과 계략으로 나를 아예 집에서 나가게 도와주었으니까. 아버지는 오히

려 후련해하는 눈치였고, 나 또한 더 이상 아버지의 여자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어 안도했다.

신기하게도 그 많은 여자들에게서 아버지는

더 이상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 덕분에 점차 자랄수록 아버지는 조금씩 내게 가까워졌다.

물론 다른 집처럼 다정한 아버지를 연출해내지는 못했지만,

가끔은 말을 걸어주기도 하고 관심이 있는 척 연기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내게서 후계자의 모습만을 보고 있다는 것

을.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결격사유가 보이게 되면 그는 당장에 나를 내칠 것이다.

그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조건은 모

두 향유하고 싶었다. 내가 그 곳에 태어난 이상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당신들이 아무리 내게 그렇게 말해도, 나는 증명해 보이겠어.

난, 있어야 하니까 태어난 거야.

하지만 나의 필사적인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허사로 돌아갔다.

“ 좋아해. ”

나는 내 앞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잔뜩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고백을 한 여자애의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고백은 꽤 여러 번 받아봤지만 언

제나 한 마디로 거절해 왔었다. 이번의 상대는 같은 학생회 임원이자 온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 이 선화.

그 때까지 아버지 덕분에 여자라면 질릴 대

로 질린 상태라 결코 누구도 사귈 생각은 없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잔뜩 붉어진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며

꼭쥔 두 손을 가늘게 떠는 그녀의 모습에 웬

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 …뭐, 좋겠지. ”

“ 에? ”

선화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놀라 소리쳤다.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사귀겠다고, 너랑. ”

“ 저, 정말이야? ”

“ 그래. ”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가 서둘러 입을 막았다.

“ 기, 기뻐 정말로. 고마워. ”

“ 별 말을. ”

나는 웃었고 그녀는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그러나 기쁨이 완연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 저, 저어 그러면 이번 일요일에 혹시 시간이 되니? 같이 영화보지 않겠어? ”

“ 그래. ”

쉽게 승낙하자 그녀는 혹시 내 마음이 변할까봐 걱정이라도 하는 듯이 서둘러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는 달려가 버렸다.

고등학교 2학년. 벚꽃이 지기

시작하는 4월 초였다.

“ 벌써 왔어? ”

선화는 놀라 소리쳤다. 원래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가는 버릇이 있던 나는 그 날도 15분 정도 일찍 도착했고,

시간에 맞추어 5분 정도 일찍 도착한 선

화는 그런 나를 발견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원래 내가 좀 일찍 나와. ”

“ 그렇구나. ”

선화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처음 본다.

나는 지갑에서 미리 끊어둔 표를 꺼냈다.

“ 시간에 늦지 않게 들어갈까…? ”

“ 윤호 너, 사복도 멋지구나. ”

“ 응? ”

뜻밖의 말에 고개를 들자 선화는 온통 새빨개진 얼굴로 웃었다.

“ 응, 이렇게 멋진 사람과 사귀게 되다니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서. ”

“ 너도 귀여워. ”

선화의 얼굴이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올랐다.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겨우 입을 열었다.

“ 고마워. ”

시간이 늦기 전에 극장 안으로 향하면서, 나는 조금씩 선화가 더 마음에 들었다. 선화라면 괜찮을 것 같다.

어쩌면 이 여성혐오증도 고쳐질 지 모르지.

좋은 애니까. 기분이 가벼워진 나는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가 선화에게 물었다.

“ 음료수 먹을래? ”

영화가 끝나고 함께 밖으로 나오며 우리는 영화에 대한 짧은 논평을 나눴다. 주연이 어쨌다느니,

범인의 정체는 언제부터 알았다느니. 첫 데이트에서

범죄스릴러를 보는 것은 어딘지 우스웠지만, 우리는 꽤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 점심 먹으러 갈까? ”

조조를 보았기 때문에 시간은 많았다. 선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 패스트 푸드가 좋아 아니면 분식으로? ”

“ 뭐든 상관없어. ”

보통 집의 아이답게 그녀는 길에 서서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어디가 더 나을까 나름대로 고르는 기색이었다.

“ 네가 영화 보여줬으니까 내가 밥 살게. ”

“ …? 괜찮아, 내가 살게. ”

선화의 제의에 고개를 저었지만 선화는 막무가내였다.

“ 아냐, 1:1. 내가 사고 싶어. 저번 주에 아르바이트 한 페이 받았거든. ”

“ 아르바이트도 해? ”

학생회 임원에 성적도 상위권이면서 아르바이트까지 할 시간이 되나.

놀란 윤호에게 선화는 가슴을 펴고 으쓱하며 말했다.

“ 물론이지. 나 이래봬도 꽤 바쁜 사람이라고. ”

“ 꽤가 아니고 무지 바쁠 것 같은데. ”

여전히 놀라워하는 윤호를 보며 선화는 웃었다.

“ 됐어, 나말고도 아르바이트하는 애들 많은 걸 뭐. 그냥 용돈벌이니까. ”

“ 그런가. ”

아파트에 혼자 살면서 매달 생활비를 받고 있는 나였지만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에 관한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

다. 생소한 일들을 전해주는 선화를 신기한 얼굴로 보고 있는데, 선화가 말을 멈추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 그렇게 보지 마. 너는 집이 넉넉하니까 잘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용돈을 받는 고교생은 흔하지 않다고. ”

“ 하고 싶은 일이 있어? ”

“ 비밀이야. ”

혀를 비죽 내밀고 말했던 그녀는 다시 진지한 얼굴이 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 사실 너랑 잘 사귈 수 있을지 조금 걱정돼… ”

혼잣말처럼 작은 음성이었지만 나는 들어버렸다. 그런가. 그래서 불안한 건가. 그래, 그렇겠지.

생각이 다르면 의견도 맞지 않게 되어 있다. 하지만 나

는 선화의 불안을 없애주고 싶었다.

“ 벌써부터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누구나 다 맞춰가면서 사는 거잖아. ”

짐짓 어른스레 웃으며 말했지만 선화의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신호에 걸려 걸음을 멈추고 앞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나도 너 좋아해. ”

조용하게 내뱉은 말에 선화는 순간 놀라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그러니까 나는 좀 더 너와 진지하게 오래 사귀었으면 좋겠어. ”

지나가는 차들이 소란스럽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만 바라보고 멀거니 서있을 뿐이었다.

선화의 얼굴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기쁨의 미소가 지

어 졌다.

“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 ”

선화는 멋적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동시에 신호가 바뀌고, 선화는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듯

앞으로 달려나갔다.

“ 배고파, 빨리 밥 먹으러 가자! ”

나는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끼이이익―

신경을 거슬리는 마찰음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뭔가 퍽, 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놀

라 크게 뜬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 꺄아아아악! ”

비명소리가 온 거리에 퍼져 나간다. 나는 방금 전까지 내게 미소짓고 있던 선화가 발치에서

온통 피에 젖어 쓰러져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

다. 그녀는 더 이상 내게 웃어주지 못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선화의 장례식은 간단히 치러졌다. 보통 집안의 평범한 딸로 사랑 받으며 컸을 그녀의 앞에서

그녀의 부모는 목놓아 통곡했다. 아무도 내게 원망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무언의 압박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너와 같이 있었잖아. 넌 뭘 한 거야?

사고의 원인은 내 탓이 아니었어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는 선화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어두운 거실에 불도 켜지 않고 들어와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슬픔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

럴 수가 있나. 눈앞에서 그렇게,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너무 하잖아.

어머니, 제게 하룻동안 뭘 했느냐고 물어봐 주지 않겠어요…?

문득 떠오른 기억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그건 언제의 말이었지…? 언제, 누구에게 했던 말이었을까?

잠시 기억을 더듬던 나는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받았던 그녀가 생각이 났다.

너를 낳은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손해를 봤어. 그런 것까지 신경 쓰게 만들지 말아라.

나는 점차 얼굴에서 핏기가 가셔갔다. 한번 재생되었던 기억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되풀이 되었다.

지저분하게, 이런 건 집에 가져오지 마.

쓸모 없는 아이 같으니.

경멸하는 얼굴로 돌아선 그녀. 그녀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향해 중얼거려야 했던 나의 고백.

…사랑해요…

동시에 기억은 급선회하여 선화가 내게 부끄러운 얼굴로 고백하던 그 날로 되돌아갔다.

좋아해.

그 날 그녀는 뭐라고 했던가. 나는 무슨 말을 했던 거지? 내게 그녀는…

사실 너랑 잘 사귈 수 있을지 조금 걱정돼…

벌써부터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누구나 다 맞춰가면서 사는 거잖아.

대답과 함께 흐르던 침묵이 다시금 나를 내리누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최후의 말을 기억해냈다.

…나도 너 좋아해.

그리고 그녀는 그 직후 죽어버렸다.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이렇게 어이없이 되풀이되는 우연이 정말 있는 걸까. 나의 첫 고백을 받았던 그녀는

그 날 애인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나의 두 번째 고백을 들은 그녀 역시 내 눈앞에서 죽어버렸다.

골치 아프군. 저 애는 존재 자체가 문제야.

그래서일까. 내가 잘못한 걸까. …모두 내가 잘못한 걸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태어나 버려서, 살아있어서, 나는 벌을 받는 걸까.

손끝이 차가워진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럼 그들이 죽은 건 모두 내 탓인 걸까.

모두 나의 죄인 건가…?!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나는 진심으로 웃을 수가 없게 되었다.

즐겁게 소리내어 웃는 일 따위는 더 이상 내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 누구와도

필요이상의 친밀함을 가지지 않은 채로 나는 고교를 졸업해야 했다.

아직 밖은 어둡다. 손을 뻗어 시계를 확인한 윤호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옆에는 재중이 깊은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멈춘다. 그는 물끄러미 재중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그를 어루만지려던 손을 움직여 담배를 집었다.

어둠 속에서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간다. 깊이 내뿜는 연기가 한숨과도 같다.

윤호는 침대에 앉은 채로 그렇게 어둠 속에 남겨져 있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그는 존재하고 있을 그 어떤 절대자에게 속삭였다.

모두 제가 살아있는 탓입니다. 제가 잘못한 겁니다.

그의 고백은 계속되었다.

이제 앞으로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해주길 갈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윤호는 담배를 들고 있던 손에 얼굴을 묻으며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내게서 빼앗아가지 말아주세요.

저는 결코, 그를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The Confession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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