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32)
희미한 담배향이 코끝에 흐른다. 재중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윤호를 바라보았다.
방안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남아있는 태양의 자취로 그의 모습을
알아볼 수는 있었지만 꽤 어두워져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인지 불을 켜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언제나 그렇듯 조금 떨어져 있는 의자에 앉
아 담배를 피우며 벌써 어둑해진 밖을 보고 있었다. 재중은 천천히 그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단정한 얼굴에서 날이 선 코와 그 위에 얹혀진 가는 은테
안경을 거쳐 담배를 물고 있는 보기 좋은 입술로,
얼마 후 그 담배를 입에서 떼어놓는 마디가 긴 맵시 있는 손가락까지.
재중은 한참동안 멍하니 그의 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어딘가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이제껏 단 한 번도 그가 자신을
바라보아 주었던 일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재중을 외면하고 있었다.
언제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지. 건조한 두 눈으로 혼자만의 세계에 몰두해서 언제나, 항상.
그런 그를 나는 언제나 바라보고, 시선을 쫓고,
그가 나를 보아주길 기다리고.
어쩔 줄 모르고 그만을 기다리고…
때마침 윤호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재중은 바라보았다.
“ 일어났나. 뭐라도 먹겠어? 어제보다 더 기운이 없어 보이는군. ”
“ …약을… 잊고 먹지 못했어요. ”
윤호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신 물과 약을 가져다주었다. 재중은 일어나 약을 받아먹고
힘없이 웃었다. 하지만 윤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다. 재중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버렸다. 윤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중을 눕혀준 후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 밖을 바라보았다.
다시 그는 나를 외면한다. 재중은 윤호를 바라보며 쓰려오는 가슴 한 구석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약 기운이 퍼지는지 전신이 가라앉는다. 재중은 잠
시 후 깊은숨을 몰아쉬며 잠이 들었다.
윤호는 문득 들려오는 작은 코골음에 고개를 돌렸다. 재중은 잠들어버린 기색이었다.
윤호는 피로한 눈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손가락 안에서 묵묵히 타들어 가는 담배가 어둠 속에서 빨갛게 피어올랐다.
윤호는 담배를 든 채 고개를 숙여 손안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나는 전혀 알지 못해. 아무 것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아무 일도 일어날 리 없어.
나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다음 날은 전날보다 꽤 기운이 돌아와 있었다. 기분이 어떠나고 묻는 윤호의 말에 재중은 웃으며
“ 원한다면 당신도 업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라고 말했다. 때마침 식사를 마치고 약까지 다 먹였던 윤호는 그 말에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으며 대꾸했다.
“ 네가 나를 업을 일은 없으니까 다른 걸로 시험해보지. ”
순간 재중의 얼굴이 확 붉어지며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전날 씻고 그대로 누워 잠이 들었기 때문에
몸에 걸친 거라곤 얇은 목욕가운 뿐이다. 속
옷조차 입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잖아, 이런 모습이라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던 재중은
뒤늦게 생각했다.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윤호도 욕구불만이 쌓였던 걸까? 나를 상대로? 하지만, 하지만…
“ 저, 저어… 설마… 지금요? ”
어느 새 침대위로 올라와 재중의 얼굴을 마주본 윤호가 말했다.
“ 여지껏 참아 줬으면 됐잖아. 더 이상 쌓인다면 폭발해버릴 걸. 난 자위 따위는 싫어하는데
이 며칠동안 그거라도 해야할 지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
이 말은, 내가 아픈 동안 다른 곳에서 욕구를 해소하지 않았다는 얘길까? 재중은 더욱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쩌지, 너무 기뻐서 크게 웃어버릴 것 같
다. 단지 그가 다른 상대와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기분이 들뜨다니. 그는 지금 나와 있다.
그 여자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단
지 나와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 참으며 기다려준 것이다. 그라면 얼마든지 손쉽게 상대를 구할 수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재중은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덕분에 그는 평소보다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최초의 시도로 재중은 어색하게 팔을 뻗어 윤호의 목을 감쌌다. 다가
오는 그의 얼굴을 보며 눈을 감는다. 이어질 키스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재중은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삐리리리리릭-
순간 날카로운 전화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라 눈을 번쩍 뜨자 윤호가 뭐라고 욕설을 내뱉으며 재중의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재중은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한동안 멀어지는 윤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윤호가 계속해서 울려대는 전화기를 들고 입을 열었다.
“ ―지영인가? 무슨 일이야? ”
재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윤호는 자연스레 탁자 옆 의자에 앉아 전화를 계속했다.
재중은 엉거주춤 일어나 윤호를 기다렸지만 도통 통화는 끊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전화가 길어질수록 그는 점점 더 기분이 엉망으로 변해갔다.
뭐야, 하필 이럴 때.
재중은 그녀가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그와 함께 있는 건 나란 말이야. 당신이 아냐. 당신은 어차피 정당한 방법으로 그를 차지할 거잖아?
그런데 이 짧은 순간조차 당신이 빼앗아간다
는 건 너무해. 어차피 난, 그의 흥미가 떨어지면 버려질 텐데, 그 잠깐도 내게는 혀용 하지 못하겠다는 거야?
이미 재중의 머릿속에 이전에 그녀가 했던 협박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재중은 무서운 눈으로 윤호를 노려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 이 방에서만큼은 그는 내 거야.
윤호는 다가오는 재중에게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해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통화내용은 전혀 귀에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재중은 어떤 수를
써서든 그의 전화를 끊게 만들어 그를 자신에게 몰두할 생각으로 온통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다.
재중이 윤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다리 사이에 앉았
을 때까지도 윤호는 무심한 태도로 전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지익―
윤호의 무심한 음성이 순간 멎어버렸다. 재중은 그의 지퍼를 이빨로 물어 내린 후 윤호의 무릎을 붙잡은 채로
혀를 가져갔다. 민감한 그의 일부가 브리프 안에서 움칠한다.
재중은 이빨을 세워 그것을 살짝 물기도 하고 입술로 빨아들이기도 하면서 그를 흥분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그는 얄미울 정도
로 냉정하게 흔들림 없이 전화를 계속할 뿐이었다. 재중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손으로 그의 다리 안쪽을 더듬으며
입을 벌려 브리프 째 그의 것을 물었
다. 일부러 그의 것을 직접 빨아들이지 않은 채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유혹을 계속하자
여전히 냉정한 그의 음성과는 다르게 물건이 반응을 한다. 혀
끝으로 그것을 더듬어 장난을 쳤다. 조금만 더 하면 그는 조만간 넘어올 것이다. 재중은 자신이 생겼다.
막 입술을 붙여 더 세게 빨아볼까도 생각했을
때 갑자기 윤호가 재중의 머리를 붙잡아 떼어 냈다. 크게 실망한 재중을 보며 윤호가 말했다.
“ 전화 끊어, 바쁘니까. ”
그리고 윤호는 그녀의 항의를 받아주듯 한 박자 사이를 두고 말했다.
“ 지금부터 섹스할 거야. ”
놀란 재중의 얼굴을 마주 보며 윤호는 곧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의 선을 아예 빼놓으며 그는 재중에게 말했다.
“ 이걸 원했던 거 아니야? 성공했어. ”
아직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재중에게 허리를 숙여 눈을 마주하며 윤호가 말했다.
“ 꽤 많이 늘었는데. 예전처럼 서툴었다면 떼어내거나 무시해 버렸을 텐데 말이지. ”
재중은 뒤늦게 활짝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의자에 앉아 있는 거만한 그의 소유자에게
다리를 넓게 벌려 앉았다.
“ 오늘따라 상당히 자극적이군. ”
윤호의 말에 재중은 피식 웃었다.
“ 나도, 당신만큼 참았으니까. ”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대었다. 진한 키스가 이어진다. 넓게 벌려진 엉덩이 사이로 뜨거운 것이 질러 들어왔다.
순간 움칠했지만 재중은 참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고통조차도 달콤한 쾌락으로 변모해버리는 것이다. 상대는 윤호였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가 자신의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뻤으니까. 그 순간만큼은 재중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단지 윤호가 그녀의 전화를 끊고 자신을 받아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후의 일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