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30)
재중은 열에 들뜬 피로한 눈을 깜박여 겨우 주변을 둘러보았다. 흐린 담배향기가 난다. 전면창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햇빛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 재
윤호는 담배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었다. 조금 머리를 뒤척이자 금새 윤호가 고개를 돌린다.
“ 아, 일어났나. 뭘 좀 먹어야지? ”
특유의 무감정한 음성으로 말한 그는 곧장 걸어와 전화기를 들어 룸서비스를 시켰다.
“ 수프가 좋아 아니면 죽이 좋겠어? ”
재중은 침대에 누운 채 그를 바라보며 겨우 입을 열었다.
“ 뭐든 좋아요. ”
당신이 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문득 행복한 얼굴을 해보인 것 같다. 윤호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저 표정은 뭐지? 당혹스러움? 성가심? 그것도 아니면 무엇? 재중이 미소를
지우고 멍하니 생각을 하고 있는 새 윤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주문을 했다.
그가 죽을 말하는 것을 들으며 재중은 이불을 코까지 덮고 연신 새어나오
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이런 아침이라면, 가끔은 아픈 것도 좋을 것 같아…
윤호가 전화를 끊고 다가와 이마에 손을 짚었다.
“ 어제보다는 좀 내린 것도 같은데… 오늘은 나갔다 오면서 체온계를 사와야 겠군. ”
윤호의 서늘한 손이 이마에 닿는 것이 좋다. 재중은 손을 꺼내 이마를 짚은 윤호의 손을 붙잡아
손바닥에 입술을 문질렀다. 윤호가 얼굴을 찌푸린다.
“ 아… 미안해요. ”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 버렸다. 서둘러 손을 빼내고 이불 사이로 고개를 푹 파묻었다.
어쩌지. 자제가 안돼. 살짝 손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도 너무나 기뻐서 참을 수가 없어. 어떻게 하지. 너무 좋아해. 너무 좋아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 앓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에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에…?
윤호가 재중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 어리광도 좋지만 그만 일어나도록 해. 몸이 땀에 젖은 것 같으니까. 씻지 않으면 더 열이 오를 거야. ”
재중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이불 밖으로 차마 내밀지 못하고 눈만 겨우 내비쳐 고개를 끄덕였다.
“ 조, 조금만 더 있다가요… ”
“ 안돼, 지금 일어나. 안 그래도 지금 늦었어. ”
윤호가 자신의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가 다 되어간다. 순간 재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 잊고 있었다. 오늘 열 두 시였
지…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재중은 서둘러 일어나려다가 갑작스러운 빈혈을 일으키고
그대로 앞으로 다시 넘어져 버렸다. 윤호가 낮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어라…?
갑자기 몸이 둥실 떠오르는 감각에 재중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바로 지척에 윤호의 얼굴이 보인다.
윤호는 재중을 안아들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수
찬은 다시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윤호는 그런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재중을 안은 채로 욕조의 물을 틀더니
그를 벽에 기대어 앉히고 무심한
손길로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단추를 푸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윤호의 단정한 이목구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자, 마침 단추를 다 푼 윤호가 고개를 들고 재중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여 바로 앞에 놓여있는 윤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윤호는 황당
한 표정으로 멀거니 재중을 바라볼 뿐이었다. 재중은 그런 그를 마주보며 웃고 싶었지만
가슴 한 구석은 에일 듯 저려 왔다.
나, 다른 사람한테 안기러 갈 거예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속삭였다.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하고 자러 갈 거예요.
윤호는 전혀 그런 그의 속마음은 알지 못한 채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재중을 안아 바지를 벗기고
욕조에 앉혀 주었다. 부드러운 타올을 물에 적셔
몸을 닦아준다. 재중은 자신이 앞으로 할 일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자신에게 친절히 대해주는 윤호를
차마 마주 볼 수 없어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은
채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밖에서 문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부산히 움직이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룸서비스가 도착한 모양이다.
대충 땀에 젖었던 몸을 어느 정도 씻어낸 것 같
아 재중은 말했다.
“ 어지러워요… ”
물론 어지러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보다도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윤호의 친절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버거워 재중은 아쉬운 마음을 애써 눌러야 했
다. 윤호는 쉽게 수긍하고 재중을 다시 안아들려 했다.
출렁…
재중이 몸을 움직여 윤호의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맞대었다. 부드러운 윤호의 입술이 느껴진다.
더운 호흡이 새어 들어가 그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
다.
나는, 당신과 키스를 해. 섹스가 아니야. 난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과 키스를 해…
…당신에겐 이것조차도 섹스일지 모르지만.
천천히 입술을 떼고 윤호를 놓아주었다. 윤호의 눈에 비친 자신이 슬프게 웃는다.
“ …빌어먹을. ”
윤호가 살짝 흘러내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욕설을 내뱉었다.
“ 이봐,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모르겠어? 난 참고 있단 말이야. 이런 식으로 자꾸 도발하지 마.
난 병자는 취급 안 해. ”
더 이상 그에게 다가가면 정말로 불같이 화를 낼 것 같은 기세였다. 하긴 평소라면 벌써 화를 내고도 남았겠지만.
나름대로는 봐주고 있는 건가. 재중
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은 잔뜩 흐려져 있었다.
“ 미안해요. ”
재중은 중얼거리듯 사과의 말을 했다. 윤호는 다시금 낮게 욕설을 지껄이더니 결국 입을 다물고 재중을 안아들었다.
차가운 공기가 몸에 닿자 온 몸
에 소름이 돋는다. 윤호는 재중의 몸에 커다란 수건을 들어 몸을 감싸주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재중을 눕혀주고 난 윤호는 몸을 돌려 옷을
찾는다. 향긋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 차 있었다. 재중은 물기 어린 시선으로 윤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가 건네준 옷을 얌전히 꿰어 입었다.
그리고 둘은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고,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윤호는 방에서 나갔다.
“ 일이 밀려서 나가 봐야 해. 일찍 올 테니까 그 동안 쉬고 있어. 약 시간 맞춰서 먹고… ”
몇 가지 사소한 당부를 한 윤호는 휭하니 방에서 나갔다. 잠시 재중은 그가 사라진 문만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윽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천천히 나갈
준비를 했다. 병을 핑계로라도 안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전혀 그럴 상대가 아닌 것이 유감이었다.
그냥 무시해버리고 윤호를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그럴 용기는 없었다. 어쩔수 없이 재중은 윤호가 사준 코트를 입고 주머니에 키를 넣은 채
방에서 나왔다. 흐린 겨울하늘이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것 같은 이른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