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29)
삐―
재중은 고개를 돌려 단정한 걸음으로 들어오는 윤호를 바라보았다.
“ 어서 오세요. ”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윤호는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받는다.
“ 이제 좀 기운이 나는 모양이지. ”
전날 자는 척 했던 것을 몸이 안 좋아서 그랬던 것으로 오해한 듯 윤호가 말했다. 재중은 어렵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예. 어제는 조금 감기기운이 있었던 것 같아요. ”
윤호는 타이를 풀다가 말고 얼굴을 찌푸렸다.
…에…? 윤호는 방을 가로질러 걸어와 재중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 아직 열이 남아있는 것 같은데. 꽤 뜨겁잖아. 약은 먹었어? ”
열이 있었나?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반응에 재중은 당황해버렸다.
“ …아니오, 괜찮을 거 같아서… ”
윤호가 얼굴을 찌푸린다.
“ 누워. 약이라도 사가지고 올 테니까. ”
“ 그럴 필요는… ”
재중은 다시 코트를 걸치는 윤호를 말리려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윤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침대에 눕자 그제야 윤호는 던져두었던 카드키를 다시 들고 성큼성큼 방에서 나갔다.
몸살인가… 재중은 멍하니 생각했다. 쉽게 열이 오르는 체질은 아니었는데. 꽤 스트레스가 쌓이긴 했던 가봐…
내일 12시까지 가야 하는데… 깨닫고 나니 더 몸이 안 좋게 느껴진다. 잔뜩 물을 먹은 스폰지처럼 가라앉는 무력감에 재중은 눈을 감았다. …열이 오르고 있는 건가.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마를 짚는 서늘한 체온을 느끼고 재중은 겨우 눈을 떴다. 한 손에는 약을 들고 다른 손에는 컵을 든 윤호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쳐진다.
“ 종합 감기약이야. 잠깐 일어나서 먹어. ”
침대가에 앉아 말하는 윤호의 모습을 재중은 한동안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윤호를 안아버렸다. 갑자기 품에 안겨드는 재중 때문에 균형을
잃은 듯 윤호의 손에 든 컵이 흔들려 물이 요란하게 출렁였다.
“ …왜 그래? ”
윤호는 놀란 듯 물었다. 재중은 대답대신 윤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몸에 팔을 두른 채 힘껏 안고 있었다.
“ 약을 먹어야 하잖아. 아프니까 안 하던 짓을 하는군. ”
성가시다는 듯 윤호가 말했다. 뒤늦게 재중은 서둘러 몸을 떼었다.
“ 미, 미안해요… 미안해요. ”
“ 괜찮아, 빨리 약이나 먹어. ”
다시 약을 내미는 그에게서 묵묵히 약을 받아넘긴다. 재중은 열이 올라 붉어진 눈으로 윤호를 바라보다가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 저, 저어… 나를… 안아주지 않겠어요? ”
당신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 당신에게 안기고 싶어.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니까,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니까, 그러니까 당신한테…
하지만 재중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윤호는 고개를 저었다.
“ 넌 아프잖아, 무리하지 말고 일찍 자. ”
재중은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고개를 저었다.
“ 괜찮아요. 저, 저기… 감기가 옮을까봐 그러는 거라면 키스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
나를 안아줘요.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재중은 서둘러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윤호가 낮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더 이상 매달리면 나를 싫어할지도 몰라. 단지 간혹씩 그가 내보이는 작은 친절함으로 나를 대해준 것뿐인데, 이렇게 애원하면 나에게 질려버릴 거
야. 나를 거절할 거야.
숨이 막히도록 치달아 가는 절망적인 생각 속에서 갑자기 윤호가 손을 뻗어 재중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는다. 곧장 치열을 가르고 열에 들
뜬 입안으로 윤호의 혀가 질러온다.
그와 나는, 키스를 한다.
누군가 말했었지. 섹스의 상대와는 키스하지 않는다고.
그럼 그와 나는, 단지 섹스 파트너인 것만은 아닌 걸까.
열정적으로 파고드는 키스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면서 재중은 생각했다. 마침내 윤호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재중은 극심한 허탈감을 느끼며 그를 바라
보았다.
“ 기운 없이 늘어져 있는 상대는 기분이 안나. 나와 하고 싶다면 빨리 감기나 낫도록 해. ”
윤호는 말을 마치고 문득 흘러내린 재중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힌다. 재중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바짝 말라버린 입술을 혀로 핥자, 갑자기 윤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 먼저 자라. 난 이만 할 일이 있으니까… ”
하지만 재중은 그를 그대로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멀어지려는 그를 붙잡기 위해 재중은 서둘러 손을 뻗어 그의 셔츠단을 잡았다.
“ …뭐야? ”
재중은 간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 부탁이에요, 나를 안아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제발 옆에 있어줘요… ”
윤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찌푸려진다. 재중은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흐느낌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말했다.
“ 제발, 이제 다시는 이런 부탁하지 않을 테니까, 오늘만… 아니 이번만 제발… ”
윤호는 한참동안 재중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재중의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행여나 그가 거절할까봐 두 눈 가득히 두려움이 배어있다.
윤호가 자신을 붙잡고 있는 재중의 손을 떼어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
침묵이 흐른다. 재중은 그의 눈을 마주보며 잠시 갈등에 휩싸였다.
얘기할까. 어떻게 할까. 사실을 털어놓을까.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는 나를 버리게 될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능성 없는 도박에 승부를 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재중은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저었다.
“ 아무 일도 없었어요… ”
윤호는 그러고도 한참동안 재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중은 고개를 푹 숙이고 당장이라도 그에게 다시 매달리고 싶은 두 손을 자제하느라 필사적으
로 참고 있었다. 이윽고 윤호가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돌아섰다.
가는구나.
재중은 여전히 시트를 꼭 쥐고 있는 두 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생각했다.
내 곁에 머물러 주지 않아, 그는. 절대로.
왜냐면 그와 나는…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침대 한 쪽이 기울어지며 재중이 쥐고 있던 시트가 당겨졌다. 놀라 고개를 들자 윤호가 침대에 올라앉으며 말했다.
“ 컵을 테이블에 두고 왔어. 행여나 깨기라도 하면 위험하니까. ”
“ 그래요… ”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멍하니 말한 재중에게 윤호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 이리 와. ”
잠시 멍하니 윤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재중은 어쩌면 나는 하룻동안 이 때만을 기다린 게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끌려가
듯 재중은 두 팔을 넓게 벌린 윤호에게 다가갔다. 윤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익숙한 체취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
“ 아프면 어리광이 심해지는 모양이군. ”
짜증스러운 것도 아닌, 그렇다고 해서 불쾌한 것은 더더욱 아닌 뭔가 미묘한 음성으로 윤호는 말했다. 그렇게 윤호의 품에 안겨 누운 재중은 겨우 편
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규칙적인 심장소리가 기분을 가라앉힌다. 이윽고 재중은 깊은 숨을 내쉬며 편안히 잠들어 버렸다. 그 때까지 재중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던 윤호가 손을 멈추고 재중의 머리에 입을 맞대었다.
…사랑하지 않아.
윤호는 눈을 감았으나 얼굴에는 피할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결코,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윤호는 그 날 새벽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