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27)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윤호는 없었다. 재중은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깜박이다가 다시 감았다. 다행이다. 윤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나갔다. 윤호가 일찍 일어나 출근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반가운 적이 없었다. 재중은 봄방학에 접어든 첫날임을 생각해내고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욕실로 가 몸을 비춰보니 꽤 자국이 사라져 있다. 다행히도 창민은 말 그대로 행위에만 전념해서, 키스라던지 과도하게 몸을 만진다던지 하는 일은 없었다. 세심하게 몸을 곳곳이 훑어본 재중은 손목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붉은 자국외에는 그다지 이상한 곳이 없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삐―
가느다란 카드의 체크소리가 들린다. 어라, 누구지? 조용한 걸 보니 청소는 아닌 것 같은데. 서둘러 목욕가운을 갖춰입고 욕실에서 나왔던 재중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 야아, 좋아 보이는데. ”
싱글거리며 웃는 창민의 얼굴을 보고 재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창민이 계속해서 말했다.
“ 걱정이 돼서 말이야. 어제 그렇게 달아나다니 너무하잖아. 나 상처받았다구. ”
재중은 아무 말도 못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창민을 노려보기만 했다.
“ 어제 그렇게 뜨겁게 사랑한 사인데, 그런 눈으로 바라보다니 심하지 않아? ”
재중은 당장이라도 질러 나갈 것 같은 주먹을 틀어쥐고 계속해서 창민을 노려보았다. 창민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 좋아, 넌 급한 성격인 것 같으니 용건을 얘기하지. ”
“ …… ”
“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네 앞으로 된 빚이라는 게 한 번으로 갚을 수 있을 만큼의 금액이 전혀 아니어서. ”
“ …… ”
“ 남은 금액을 받으러 왔어. ”
“ …나가… ”
결국 한참만에 재중은 이를 갈 듯이 겨우 말을 내뱉었다.
“ 당신의 빚이라는 거, 얼마든지 갚을 거야. 평생이 걸려도 갚고 말 테니까,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난 죽어도 당신하고 그런 짓, 더 이상 하지 않을 거니까. ”
“ 이런, 이런. ”
창민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 별 수 없군. 이건 정말 얘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야. ”
“ …… ”
“ 나와 윤호는 꽤 오래 사귄 사이지. 서로 경쟁도 하고 싸우기도 했지만 단 하나, 서로에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어. ”
“ …… ”
“ 네가 정 싫다고 하면, 나야 매번 너를 잡아가서 억지로 눕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야.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대신에 윤호에게 말할 거야. 난 네 상대와 잤다, 라고 말이야. ”
재중의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창민은 계속해서 웃으며 말했다.
“ 윤호는 말이지, 자신의 상대가 자신을 상대할 때 다른 놈이랑 구르는 걸 가장 싫어해. 아마도 얘길하면 그 즉시로 너와는 끝날 걸. ”
“ …증거가 없어. ”
마른 침을 삼키고 겨우 말하자 창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 물론 증거는 없지. 하지만 나와 윤호는 그간 쌓은 신뢰라는 게 있단 말이야. 내 말과 네 말 중에서 누구 말을 믿을 것 같아?
“ …… ”
“ 길에서 우연히 만난 남창의 말과 십년지기 친구의 말 중에서 말이야. ”
재중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있다가 한참만에 겨우 입을 연 재중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 …당신은 어떻게 친구의 상대를 뺏을 수 있다는 거지…? 십년지기라면서. ”
“ 윤호와 나 사이에는 룰이 있지 서로의 상대는 건드리지 않아. 다만… ”
창민이 씨익 웃는다.
“ 윤호와 너는 계약관계고, 나와 너는 채무관계지. 이건 또 얘기가 다르잖아? 너와 나는 빚청산을 하자는 것뿐이니까 말이야. ”
편리한 사고방식이군. 재중은 분노와 모멸감으로 온 몸을 미세하게 떨면서 창민을 노려볼 뿐이었다.
“ 이봐, 너한테도 나쁜 얘기는 아니라고. 나를 상대하면서 빚도 갚을 수 있고, 또 윤호에게는 비밀로 해줄 테니까 일거양득 아닌가. ”
재중은 그러고도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재중은 입을 열었다.
“ 정말… 비밀로 해줄 건가? ”
창민은 웃었다.
“ 말했잖아, 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
다시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재중은 더할 바 없이 창백한 얼굴로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말을 잘 알아듣는 아이라서 기쁘군. ”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재중이 말했다.
“ 단, 조건이 있어. ”
“ 어떤? ”
“ …여기서는 싫어. 당신 아파트로 내가 갈 테니까… 그러니까 다시는 여기로 찾아오지 말아 줘. ”
윤호와 함께 쓰는 침대에 다른 남자와 뒹굴고 싶지는 않았다. 절대로. 여기는, 이 방만큼은 윤호와 재중의 공간이다. 절대로 누구에게도 내어줄 수 없는 단 하나의 성역. 재중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그러나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창민을 노려보았다. 창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 그 정도야 좋겠지. 그럼 내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오라구. ”
옆 테이블의 펜과 메모지를 집어 간단히 주소를 써주며 창민은 덧붙였다.
“ 12시까지 와. 나는 식사 전에 하는 걸 좋아하니까. ”
묵묵히 쪽지를 받아드는 재중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창민은 싱긋 웃었다. 방을 가로질러 재중의 바로 앞에 선 창민이 고개를 기울여 귓가에 속삭였다.
“ 기대하고 있을게. ”
의미심장하게 가운위로 엉덩이 사이를 손가락으로 슬쩍 문지른 후 그는 낮은 음성으로 웃었다. 그리고 재중은 창민이 방을 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우뚝 서있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