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26)
재중은 바닥에 쓰러진 채 멍하니 샤워소리를 듣고 있었다.
창민은 행위를 마치고 나서 탈진해버린 재중의 손목을 풀어주고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마치 지금까지의 행위가 무척이나 더러웠다는 듯이 빨리도 사라져버린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재중은 뒤늦게야 두 손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물소리에 섞여 아련하게 휘파람소리가 들려온다. 재중은 조금씩 이성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겨우 몸을 움직여보았다. 온 몸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토하는 것 같다.
재중은 이를 악물고 일어나 서둘러 옷과 가방을 대충 챙기고 절뚝거리며 현관을 향해 갔다.
아, 카드키…
몇 발자국 가지 않고 다시 돌아와 창민의 옷을 뒤진다.
손이 마구 떨리고 있는 것은 왜인지 알 수가 없다. 겨우 카드를 찾아 현관으로 향했다.
행여나 그 사이에라도 창민이 나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통증을 무시하고 급히 몸을 움직였다.
아까는 그리도 굳건했던 문이 카드를 통과시키자 야속하리만치 간단히 열려버린다.
재중은 현관에 카드를 던져놓고 겨우 밖으로 나가 급히 문을 닫았다.
그가 쫓아 나오지 못하게 막기라도 하듯. 어서, 어서 돌아가야 해…
머릿속은 온통 윤호의 귀가시간뿐이다. 허겁지겁 엘리베이터에 올라 대충 거울을 보고 몰골을 추스렀지만
역시 강제적인 정사후의 모습은 그다지 상쾌하지는 못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다행히 만원짜리가 몇 장 있다.
큰 길로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호텔로 향하는 얼마 안 되는 시간동안,
재중은 몇 번씩이나 뒤를 돌아보며 창민의 차가 보이나 안 보이나 불안해해야 했다.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다행히도 윤호가 귀가하기 전이었다. 급히 방으로 들어가 등뒤로 문을 닫고 나서야
비로소 그 때까지 몸을 경직시키던 긴장이 빠져나가고 대신에 온 몸이 후들거리기 시작한다.
씻어야지… 씻지 않으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주저앉아버린 재중은 가방을 끌고
겨우 무릎걸음으로 기어서 침대까지 갔다. 호흡이 거칠게 새어나온다. 가방을 놓고 다시 기다시피
욕실로 간 재중은 주저앉아 욕실벽에 기댄 채 옷을 벗기 시작했다.
습관적으로 타이를 풀려던 재중은 목이 허전한 것을 느끼고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며 생각했다.
타이, 교복타이가… 없다. 아마 두고 온 모양이었다. 마구 떨리는 손을 움직여 겨우 단추를 풀어 셔츠를 벗는다.
교복바지를 벗으려던 재중은 문득 그것이 젖어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바지를 살폈다.
붉은 것과 흰 것이 섞여 굉장히 지저분해져 있는 그것을 보고 얼굴은 무섭도록 창백해진다.
서둘러 욕조에 물을 받아 셔츠와 바지를 던져버렸다. 샤워기를 틀어 뜨거운 물을 온 몸에 받아내면서,
아직 남아있는 남자의 손자국을 어떻게든 지워보려 애썼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윤호는 그로부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돌아왔다. 겨우 시간에 맞추어 욕실에서 나와 자는 척 침대에 기대어
누워있던 재중은 시트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다가 윤호가 들어와 불을 켰을 때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호는 침대가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듯 했으나 짐짓 잠든 척 깊이 숨을 몰아쉬자 다시 걸음을 옮겨 멀어져갔다.
끼익, 하고 작게 옷장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바스락거리며 옷을 벗어 정리한 윤호가 이번에는 욕실로 향했다. 욕실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들린 후에야 비로소 재중은 경직시켰던 온 몸의 긴장을 풀고 떨리는 한숨을 토해냈다.
들키면 어떻게 하지. 다시금 불안이 엄습한다.
행여나 다른 남자에게 억지로라도 당했다는 걸 안다면.
윤호는 자신을 쫓아낼 것이다. 계약은 끝나는 것이다. 말하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게 된다면 그 즉시로 윤호와는 끝이라고. 어떻게 하지. 재중은 이제 치밀어오르는 공포로 이빨이 맞부딪힐 것만 같아 서둘러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좀 더 반항해볼 걸. 아니, 아파트에 쫓아 들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아니 뭐라고 해도 처음에 교문에서 그를 만났을 때부터 거절하고 돌아오는 거였는데…
…윤호나 창민이나 다를 게 뭐지…?
문득 재중은 생각했다. 어느 쪽이나 내 몸만 바라는 건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왜 이 쪽은 되고 저 쪽은 안 된다는 거야? 게다가 이 쪽과의 관계가 끝날 것조차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면서. 윤호와의 관계가 끝나면 창민에게 가면 되잖아. 난 어차피 남창이니까. 그러기로 이미 결심한 거였잖아, 처음 윤호에게 몸을 주었던 그 때부터 난 이미 결심한 거였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눈치를 살피며 불안해해야 하는 거지?
…나는…
동시에 물소리가 그치고 윤호가 샤워를 끝냈다.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재중은 시트로 몸을 감싼 채 크게 떠진 눈으로 깨달았다. 당신이 아니면 안돼.
문소리가 들린다. 윤호가 욕실에서 나와 다시 방을 가로질러 언제나 그렇듯 창가로 향한다. 이제 곧 담배향기가 나겠지.
그래, 그래서였다. 내가 그토록 온 힘을 다해 그에게 반항했던 것은, 당신을 잃게 될까봐 였어. 당신의 여자에게 그런 위협을 받고도 여기서 나가지 못하는 것은, 갈 곳이 없어서가 아니야.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사실은, 당신 곁을 떠나기가 싫어서였어. 아무리 비참해도, 당신이 나를 어떻게 대해도, 나를 어떻게 생각한다 해도, 단지 단순한 섹스의 상대라고 해도, 당신에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테지만, 그것만이라도 좋아서, 그렇게라도 당신 곁에 있고 싶어서,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엷은 담배의 향내가 났다. 윤호가 애용하는 말보로의 향기. 그러나 그것이 재중의 심장을 이토록 아프게 하기는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