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25)
창민이 데려간 곳은 시내의 화려한 고급 아파트였다.
익숙한 손짓으로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간 창민은 코트를 벗어 소파에 던져놓더니 곧장 다이닝룸으로 들어갔다.
재중은 응접실에 서서 창민을 기다렸다. 깔끔한 실내.
지나치게 정돈이 되어 있어서 마치 모델 하우스나 호텔같은 이미지마저 주고 있는 집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재중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 앉아. ”
빙글거리는 얼굴로 다시 돌아온 창민의 손에는 두 개의 글래스가 들려 있었다.
글래스를 내밀며 말한 그에게 재중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말했다.
“ 용건을 말씀해 주세요. ”
창민은 여전히 웃으며 턱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 앉아서 얘기하자니까. 뭐가 그렇게 급하지? ”
“ 시간낭비하는 것이 싫을 뿐입니다. ”
“ 이렇게 서서 실갱이 하는 편이 더 낭비라고 생각지 않아? 우선 앉으라구. 편하게 얘기하고 싶어. ”
먼저 소파에 털썩 앉아서 잔을 내려놓는 그에게 경계의 눈빛을 내보이며 재중은 떨떠름한 얼굴로 맞은 편에 앉았다.
“ 이건 내 장기야. 마셔 봐. 맛이 괜찮을 걸. ”
“ 앉았으니까 그만 용건을 말씀해보세요. ”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차가운 음성으로 내뱉는 재중을 보며 창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 이런, 기껏 만든 칵테일을 시식조차 해주지 않다니. ”
“ 당신하고 이렇게 말장난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용건이 없다면 가겠어요. ”
결국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난 재중에게 창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나는 작은 사업체를 하나 가지고 있지만 주력하는 것은 사채업이지. ”
재중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몸을 경직시켰다. 창민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한다.
“ 얼마 전에 어느 회사에 사채를 빌려주었다가 크게 낭패를 본 적이 있어.
그대로 달아나 버렸거든. 아이들도 있어서 쉽게 그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수였지. ”
뭔가 굉장히 안 좋은 얘기를 들을 것 같다 재중은 점차로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창민의 경쾌한 음성이 계속된다.
“ 그 회사 이름이 아마 봉화물산이었지. ”
방안이 한순간 일그러지면서 크게 한 바퀴를 회전해버린 것 같다.
재중은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소파에 주저앉아버렸다. 창민은 재중의 반응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덧붙였다.
“ 네 아버지지? ”
재중은 문득 하얗게 질려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자신의 손을 보고 서둘러 두 손을 맞잡아
떨림을 멈추기 위해 깍지를 껴 꽉 틀어쥐었다.
“ 그렇게 놀란 얼굴 할 거 없어, 마음만 먹으면 사람의 뒷조사쯤이야 쉬운 일이니까 말이야.
게다가 내가 거래를 하는 곳은 행동도 빠르고 정보도 정확하지. 하지만 네가 그 아들일 줄이야,
세상은 정말 좁다니까. ”
즐거운 듯이 킥킥거리며 말하는 그를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노려보며 재중이 겨우 입을 열었다.
“ 아버지는 아버지고 저는 저예요. 전 미성년자니까 상관없을 텐데요. ”
창민이 작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 이런, 이래서 어린애들은… ”
창민은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빚이라는 건 말이지, 꼬마야. 본인이 사라지면 그 가족이 연대책임을 지지.
가족이 사라지면 그 친척이 받게 되어 있어. 그래서 무서운 거야.
너의 경우는 네가 미성년이라고 해도 빚은 그대로 남아있어.
물론 네가 좀 더 자란 후에 갚겠다고 하면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이자는 계속해서 불어날 걸. ”
모르고 있었다. 재중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려버렸다. 계속해서 천장이 돈다.
그럼 얼마나 되는 걸까, 그 빚이라는 게. 도저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
창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차갑게 얼어있는 재중의 옆에 앉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 몸으로 갚을 수도 있는 거니까. ”
“ 비켜요…! ”
창민의 손이 재중의 교복 타이를 푸는 순간, 재중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창민을 뿌리치고 넘어질 듯 휘청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창민은 여전히 여유있는 얼굴로
웃으며 천천히 뒤를 쫓아왔다. 재중은 현관으로 쫓아가 문을 열려고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 카드키를 통과시키지 않으면 나가지 못해. ”
창민은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내 보이고 낮게 깔린 음성으로 웃으며 속삭였다.
재중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의 손잡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열어보려 애썼으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게 좋을 텐데. ”
“ 싫어, 이거 놔!! ”
어깨를 붙잡는 창민의 손을 사납게 뿌리치고 창민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창민은 가볍게 몸을 피하고,
뻗쳐나간 팔을 붙잡아 그대로 재중을 바닥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재중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지고, 창민이 그 위를 덮쳐온다.
등을 그대로 내리 누른 창민은 달아나기 위해 마구 휘젓는 재중의 두 손을 억지로 잡아당겨
한 손으로 손목을 붙잡았다.
“ 정말이지 성가시게 만드는군. ”
“ 비켜…! ”
재중은 창민에게서 빠져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창민이 낮게 혀를 차더니
넥타이를 풀어 그 때까지 잡고 있던 손목을 뒤로 묶어 버렸다.
바닥을 헤엄치듯 두 손을 묶인 채로 안간힘을 쓰던 재중의 머리를 잡아 누르고
다른 손으로 곧장 버클을 열어 바지를 끌어내린다. 창민의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듯 크게 울려왔다.
“ 싫어…!! ”
재중이 비명을 지르고 동시에 다리가 열리며 창민이 질러 들어왔다.
그 순간, 마치 플래쉬처럼 강렬하게 재중의 머릿속에 윤호의 무표정한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