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22)
남자는 여전히 빙글거리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재수 없어.
재중은 속으로 남자에게 욕설을 지껄이며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 무슨 소리신지 모르겠군요. ”
하지만 남자는 의외로 끈질긴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
“ 두 배 주지. ”
“ 이보세요… ”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말했지만 남자는 여전히 변함없는 태도로 말을 계속했다.
“ 왜, 굳이 나가서 새 손님 찾을 것 없이 좋잖아. 세 배 줄께. ”
재중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 초면에 실례가 아닌가요. 농담도 상대를 봐가며 하시죠. ”
남자는 그제야 조금 미소가 가신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 어라, 초면이라고? 본 적이 없던가? ”
당신따위 본 일 없어, 하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재중은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 초면입니다. ”
“ 그래? …이상하군. 난 사람 얼굴은 잘 안 잊는 편인데… ”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맑은 종소리를 울렸다. 재중은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막 엘리베이터가 닫히려 하는데 남자는 다짜고짜 쫓아와 문에 손을 기대어 닫히려는 문을 막아섰다.
“ 무슨 짓입니까. ”
자신도 모르게 날카롭게 새어버린 음성에 남자는 다시 미소짓는 얼굴로 말했다.
“ 뭐 어때, 어쨌거나 상관없잖아? 초면이건 아니건. 비싸게 구는데, 꽤 고급만 상대하는 모양이지?
내 쪽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한번 시험해 보라니까? ”
“ 비켜요! ”
순간 재중은 이 끈질긴 남자에게 버럭 화를 내며 주먹을 내질러버렸다.
퍽―
갑작스러운 공격에 남자가 형편없이 나가떨어지고, 재중은 재빨리 엘리베이터의 닫힘버튼을 눌렀다.
뒤늦게 몸을 일으킨 놀란 얼굴의 남자에게 닫히는 문 사이로 뻑큐를 만들어 보이면서,
재중은 입가를 잔뜩 일그러뜨리고 웃었다.
바보자식. 저렇게 황당한 얼굴이라니. 얼얼해지는 손을 쥐었다 펴 위 아래로 흔들며 재중은
다시금 속으로 생각나는 욕을 죄다 지껄여댔다. 어라,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기억이…
문득 재중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깨를 으쓱하고 머리를 젓는데 때마침 문이 열렸다.
로비로 나와 잠시 두리번거리자 커다란 화분 뒤 소파에 앉아있는 윤호의 모습이 보였다.
서둘러 달려가 앞에 서니 그 때까지 로비의 잡지를 보고 있던 윤호가 고개를 들더니 안경너머로 눈썹을 찌푸렸다.
“ 늦었어. ”
“ 엘리베이터가 늦었어요. ”
사실대로 얘길하면 이 남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갑자기 예전에 본의 아니게 당할 뻔 한 후
윤호의 반응이 떠올랐다.
아무에게나 페로몬 뿌리고 다니지 마. 불쾌하니까. 아아, 그랬지. 네 몸 정도는 네가 스스로 지켜, 인가.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왜 이렇게 뭔가가 허전할까.
“ 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와. ”
언제 저만큼 갔는지 회전문 앞에 서서 말하는 윤호를 보고 재중은 서둘러 달려갔다.
윤호의 차를 타고 한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호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조금 지난 옛날 노래가 흘러나온다.
너무 힘이 들땐 실컷 울어 눈물 속에 아픈 기억 떠나보내게 내 품에서…
멍하니 노래를 따라 중얼거리고 있는데 때마침 전화벨소리가 들렸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윤호가 낮은 음성으로 대답을 했다.
“ 창민인가. 무슨 일이야? 거기 없던가? …그럼 왜 전화를 했지? ”
사무적인 음성으로 필요한 말을 뱉어내는 그의 목소리는 가수의 청량한 목소리와 극단적인 갭이 느껴졌다.
재중은 전방을 주시하며 전화에 신경을 쏟고 있는 듯한 윤호의 옆모습을 힐끔 보았다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 …그래?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지. 네 사촌이잖아,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네가 어떻게 해봐. …안돼,
시간 없어. 데이트 중이거든. ”
인사도 없이 전화를 퍽 끊어버리는 그를 보고 재중은 황당한 얼굴로 눈만 깜박거렸다.
뭐, 데이트? 나랑 말이야? 아니면 다른 사람을 말하는 거야?
상대가 누구든 ‘데이트’라는 고전적이면서도 낭만적인 단어가 저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재중은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윤호가 낮게 욕설을 지껄이더니 갑자기 핸드폰을 들어 뒷좌석으로 던져버렸다.
퍽.
핸드폰은 차의 뒷유리에 정확하게 명중한 후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아니 받기 싫음 끄던가 하면 되지 부수긴 왜 부숴? 재중은 입을 쩍 벌린 채 핸드폰의 화려한 종말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 가는 길에 머리도 좀 잘라. 너희 학교에서는 잘도 그렇게 다녀도 괜찮군. ”
툭 내뱉는 말에 힐끔 백미러를 보니 더부룩한 머리가 꽤 길다. 그러고 보니 정말 용케 지적을 안 당했네.
묵묵히 앉아있는 동안 차는 미끄러지듯 시내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 야, 김재중. 오랜만이네. ”
반갑게 다가와 말을 거는 민철을 재중은 슬쩍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 머리 잘랐네? 어라, 염색도 한 거야? ”
싫다고 했는데도 윤호가 부득이 우겨서 한 염색을 보고 민철이 놀란 음성으로 말한다.
생전 처음 해보는 거라 어색하기 그지없다. 세피아빛의 머리칼을 어색하게 어루만지며 재중이 얼굴을 붉혔다.
“ 응… 잘 안 어울리지? ”
시선이 마주친 민철의 얼굴이 발갛게 물든다.
“ 아니야, 좋은데. 너 졸업하면 빨강머리 해봐라. 짱이겠다. 넌 얼굴도 하야니까. ”
“ 됐어… ”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아 가방을 대충 풀어놓았다. 다시 자리에 앉은 민철에게 옆자리에 앉은 놈이 말을 건다.
“ 저 자식 왜 안 왔었대? ”
“ 모르지 뭐. 안 물어봤는데? ”
힐끔 재중을 바라본 그는 민철에게 한층 소리를 낮춰 말했다.
“ 저 자식, 집 망했다 그러지 않았냐? ”
“ 응… ”
말끝을 흐리는 민철에게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 그런데 이상하지. 전혀 아무렇지 않잖아. 최소한 기가 죽거나 얼굴이 어둡거나 하면 모르겠는데,
목 꼿꼿이 세우고 한껏 콧대 솟아있는 게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아 보이는 걸? ”
“ 재중이가 언제 그랬어. ”
기분이 상해 말한 민철에게 그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 혹시 돈 많은 싸모라도 구한 거 아니냐? 저 새끼 얼굴은 반반한 게 여자들이 좋아하게 생겼잖아.
아줌마라도 물었으면 또 모르지. ”
“ 말 함부로 하지 마. 잘 알지도 못하면서. ”
따끔하게 한 마디 했지만 놈은 전혀 물러서는 기색없이 대꾸했다.
“ 그럼 넌 저 놈에 대해 뭐 아는 게 있냐? 너도 마찬가지잖아? ”
할 말이 없었다. 민철은 입을 다물고 힐끔 재중을 바라보았다. 재중은 책을 펼쳐들고 어느 새 독서삼매경이다.
괜찮겠지, 모레부터 봄방학이고 반도 틀려지니까. 재중이는 내가 자신과 같은 반이라는 걸 알까.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쩌면, 전혀 신경 써주지 않을지도.
민철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점점 더 멀어지는 재중에 대해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삑--
재중은 카드키를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비어있는 방으로 들어간 재중은
가방을 한 쪽에 내려놓고 옷장을 열었다. 빼곡이 들어있는 옷들을 보자 한숨부터 나온다.
2-3벌이면 된다고 했는데도 윤호는 막무가내로 온갖 종류의 옷을 사대더니 현재 이 상태다.
교복도 새 것으로 두 벌이나 맞췄다. 이제 1년만 있으면 졸업인데 도대체 무슨 낭비인지 모르겠다.
그 중 가장 편하고 가격이 낮은 것을 고르고 골라 들고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면서 재중은 머릿속으로 3학년의 진도표와 계획표를 천천히 짜맞추기 시작했다.
만약에 윤호가 자신을 쫓아내게 되면 얼마나 줄까. 지금까지 준 돈은
주말에 인찬이를 만날 때말고는 거의 쓰지 않고 있어서 모아둔 게 꽤 된다.
지금이야 이렇게 호화스러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도 언제든 윤호가 나한테 질려버리면 쫓아낼 텐데.
그 때의 대책을 미리 생각해두면 좋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굴리던 재중은 문득 창백한 얼굴로 생각했다.
그 전에 그 여자한테 죽을 지도.
자신한테 과도를 휘둘러대던 무시무시한 그녀를 기억해내고 재중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 전에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당장 갈 곳 없어서 버티고 있긴 하지만 나중에
그 여자가 나 아직 안 나간 거 알고 정말 죽이겠다고 쫓아오면 어떡하지. 골치 아프다.
나중에 생각난 것이었지만 그녀는 분명히 저번에 인찬이를 찾아갔을 때 본 여자다.
정확하게는 카페의 유리 너머로 본 것이었지만. 분명히 그 때 윤호와 키스하고 있었지.
연인인 걸까.
어떤 사이지?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며 달려올 정도면 꽤 가까운 사이 같은데. …어쩌면 결혼할 사이일지도…
여기까지 생각했던 재중은 잔뜩 얼굴을 찌푸려버렸다. 도대체 나는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뭐지?
당장 목숨에 위협을 받을 만큼 그런 큰 일을 겪었으면 나도 웬만큼 알 권리는 있는 게 아닌가.
설령 죽더라도 왜 죽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게 아니야.
“ 좋아, 오면 당장 물어봐야지. ”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재중은 때마침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화들짝 놀랐다.
어라, 벌써 들어왔나?
서둘러 샤워기의 물을 끄고 수건으로 허리를 두른 채 급히 뛰어나갔다.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 인사가 끝나자마자
그 일에 대해 얘기하고 물어봐야지, 하고 결심하면서. 하지만 밖에 나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재중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 꽤 자극적인 모습으로 맞아주는군. ”
윤호의 전혀 색기나 장난기라고는 없이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은,
그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남자때문이었다.
“ …어… ”
남자는 재중을 보고 역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으나 곧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변해버렸다.
재중은 눈에 띄게 얼굴이 창백해졌다. 윤호가 재중의 얼굴을 보고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고는 남자에게 말했다.
“ 아는 사이야, 창민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