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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21화 (21/123)

거짓말 - (21)

치이이익. 치이이익.

커피포트의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부드러운 커피의 향내.

재중은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잔뜩 부어있는 눈덩이가 무거워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인 후에야 겨우 반정도 눈을 뜰 수 있었지만.

반쯤 버티칼이 처져 있는 전면창에는 담배를 입에 물고 바지 주머니에 한손을 찔러 넣고

다른 손으로 커피를 잔에 따르고 있는 윤호의 모습이 있었다.

재중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가 너무나도 멍해서 마치 술에 잔뜩 취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일어났나? ”

윤호가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다가 문득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고 말을 걸었다.

재중은 일어나야 할까 어쩔까를 고민하다가 그냥 누워있기로 했다.

“ 일찍 일어나셨네요… ”

출근 전의 그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라 아침에 보게 되면 할 말이 없다.

겨우 끄집어낸 아침인사에 윤호는 입가를 일그러뜨리고 웃는다.

“ 벌써 10시야. ”

어라, 그렇게 됐나. 너무 오래 자버렸네…

재중은 본의 아니게 또 학교를 빠져버린 것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학기말이라지만 이건 심하군…

“ 너야말로 잘 잤어? 피곤해 보이는데. ”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며 자신을 외면한 채 말하는 윤호에게 재중은 한동안 시선을 멈추었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 …머리가 아파요. ”

솔직히 말하고 나니 그는 한동안 담배만 피우고 있다가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밖에 나갈까. ”

“ …에… ”

뜻밖의 말에 눈을 뜨고 다시 시선을 향하자 윤호가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말했다.

“ 항상 안에만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너, 학교 가는 거 빼고는 내내 혼자 여기 있지? ”

“ …… ”

“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네 나이 때는 다들 놀고 싶어서 안달이잖아. ”

내 나이 또래의 아이들과는 이미 난 다르다고 얘기하면 저 사람은 이해할까.

저 사람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겠지.

남창은 다를 수밖에. 빌어먹을 남창새끼같으니, 죽여버릴 거야!

“ 쿡… 쿡쿡쿡… ”

재중은 시트에 엎드려 팔에 얼굴을 묻고 웃어버렸다.

윤호가 의아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채 재중을 바라본다. 눈가가 다시 더워진다.

난 울지 않을 거야. 재중은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이제 절대로, 그 누구 앞에서도 난 울지 않을 거야.

“ 이봐, 괜찮은가? ”

윤호가 담배를 입에 문 채 다가와 침대가에 앉아 재중의 어깨를 붙잡았다.

재중은 사납게 그것을 뿌리쳐 버렸다. 정적이 흐른다. 재중은 이를 악물고 엎드려 있다가

여전히 시선을 향하지 않은 채로 겨우 입을 열었다.

“ …미안해요, 나 오늘 그다지 컨디션이 좋지 못해서 그만 둘래요. ”

윤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재중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재중은 계속되는 침묵에 어깨가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얕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윤호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진다. 그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다시 창가로 갔다.

슬쩍 고개를 돌려 훔쳐보니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끄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윤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겨 옷장으로 갔다. 문이 열리고 옷장을 뒤적이는 모습이 부산하다.

나가려는 건가. 하긴, 이 시간까지 있는 게 이상한 거지. 멍하니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뭔가 부드러운 것이 푹, 하고 떨어졌다.

“ 입어, 나갈 거니까. ”

재중은 놀라 자신의 머리 위로 집어던져진 옷을 헤치고 고개를 들었다.

“ 나, 안 나간다고… ”

“ 내가 나가자고 하면 나가는 거야, 잔말말고 갈아입어! 내가 입혀줄까? ”

버럭 화를 내며 소리치는 윤호의 무서운 얼굴을 보고 재중은 엉겁결에 일어나 서둘러 셔츠에 팔을 꿰었다.

“ 옷이 커요… ”

손가락까지 내려오는 소매를 보여주며 한 말에 윤호가 내지르듯 대답한다.

“ 당연하지, 내 옷이니까. ”

“ 하 하지만 나는… ”

“ 네 옷 어제 내가 다 갖다 버렸어. 그런 넝마 같은 걸 가지고 있으니까 밖에도 안 나가고 방에만 처박혀 있지. ”

“ 뭐라구요? ”

재중도 열이 올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윤호는 남의 말따위 듣는 성격이 절대로 아니었다.

“ 어서 입어, 나가서 새로 사주면 될 게 아니야. ”

“ 그, 그렇게… 함부로 남의 것을… ”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가는 재중을 보며 윤호가 눈썹을 찌푸렸다.

“ 뭘하는 거야?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어. 새로 사주겠다고 했잖아.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정말로 화낼 테니까. ”

뭐야, 그럼 아까 성질부린 건 화낸 것도 아니라는 말이야?

나쁜 놈.

재중은 속으로 욕을 퍼붓고 있었으나 허리에 손을 얹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윤호의 위압감에 질려

몸은 어느새 옷을 걸치고 있었다. 아아, 나의 이 저주스런 반사신경.

스스로를 저주하면서 재중은 단추를 모두 채우고 서둘러 바지를 입었다. 다행히 바지는 교복바지다.

서둘러 욕실로 가서 급히 세수를 하며 슬쩍 거울을 보니 헐렁한 셔츠에 교복바지를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기 그지없다. 저 놈은 취미가 남 광대만들긴가. 욕설을 퍼부으며 다시 방으로 나오자 쪽지가 남겨져 있다.

로비로 내려와. 재중은 안 내려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맞는 것도

시간문제라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에에, 엘리베이터가.

아직 덜 깨인 몽롱한 머리로 기억을 더듬으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간 재중은 ‘땡’하고 울리는 엘리베이터

도착음을 듣고 서둘러 달려갔다. 그 성격에 늦게 가면 정말 죽음이겠다, 하는 걱정때문이었다.

퍽―

“ 우왓! ”

“ 엇! ”

재중은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박아버리고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 이런, 괜찮아? ”

코를 감싸쥐고 서둘러 일어나려는데 누군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문득 고개를 드니 눈매가 웃음으로 굳어져 살짝 기울어져 있는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깔끔한 고급슈트로 몸을 감싸고 있는 꽤 잘 다듬어진 얼굴의 남자는 아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 눈에도 알 수 있는 부를 온 몸에 안고 있었다.

“ 앞을 보고 달려야지. 아니면 달려야 할 상황이었나? ”

재중의 몰골이 우스운지 남자는 키득거리며 재중을 일으켜 주었다.

“ 고 고맙습니다. ”

남자의 손을 의지해 일어나면서 재중은 또 한번 윤호에게 욕을 퍼부었다. 당신이 나를 이 꼴로 만들었잖아! 하고.

“ 실례했습니다. ”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지만 남자는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재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사람을 훑어보고. 실례잖아.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묵묵히 입을 다물고 언제 엘리베이터가 오려나,

하고 재중은 속으로 불안해하며 숫자를 세었다.

“ 얼마야? ”

에에?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하고 고개를 돌리자 남자는 빙긋 웃으며 재중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 손님과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이지. 얼마야? 후하게 쳐줄게. ”

재중은 기가 막혀 한동안 멍하니 입만 벌린 채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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