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19)
“ …이게 무슨 짓이야? ”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음산하게 흘러나온다. 그러나 지영은 전혀 기죽지 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무슨 소리야? 내가 네 눈엔 그렇게 만만해 보여? 네가 나를 이따위로 취급해?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
그 사이에 비서는 날렵하게도 흩어진 조각들을 치우고 윤호에게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셔츠를 내밀었다.
윤호는 난폭한 손짓으로 셔츠를 찢듯이 벗더니 다짜고짜 지영의 얼굴을 향해 집어던졌다.
“ 꺅! ”
아직 젖어있던 셔츠는 지영의 몸에 맞고 바닥으로 추락해버린다. 윤호가 지영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너 다시 한 번 내 앞에서 이렇게 날뛰면 나야말로 가만히 안 있어. 어디 한 군데 부러질 줄 알아. ”
맞받아 소리치려던 지영은 순간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삼켰다.
윤호가 셔츠를 갈아입는 사이 보게 된 등의 상처때문이었다. 무수하게 그어져 있는 손톱자국.
그러고보니 윤호가 자신과 최근에 만났던 건 한달도 전의 일이었다. 그 때도 윤호는 호텔에 묵고 있었지.
윤호는 섹스할 상대를 찾게 되면 집에 데려가지 않고 항상 호텔로 간다.
그리고 그 상대와 결별하게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데, 대개 그것은 2주일이 한계였고 빠르면 3일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한달이 넘다니. 어떻게 된 걸까. 윤호는 아직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영의 예감이 경종을 울려왔다.
“ 그건, 뭐야? ”
음성이 요란하다 싶을 정도로 떨려나온다. 윤호는 역력히 화가 난 얼굴로 지영을 비웃었다.
“ 뭐겠어? 격렬한 정사의 흔적이지. ”
지영은 하얗게 변색된 얼굴로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온 몸에서 분노의 불길이 뻗쳐 나오는 것 같다.
이윽고 지영이 잔뜩 억눌린 음성으로 윤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 …알았어. ”
그리고 그녀는 등을 돌려 들어왔을 때보다 더욱 빠른 걸음으로 이내 자취를 감췄다.
“ 빌어먹을. ”
거칠게 내뱉은 윤호는 그 때까지 한 쪽에 서 있던 비서에게 화가 난 얼굴로 내질렀다.
“ 또 뭐야? ”
비서는 언제나처럼 뭔가를 내밀며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 와이셔츠 청구서입니다. 비싸게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
윤호는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 던지듯 내려놓았다.
비서는 그것을 받아들고 역시 지갑을 뒤져 잔돈을 꺼내놓은 후 인사를 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셔츠를 들고
방에서 나갔다. 점심시간이 되면 나가서 여벌의 셔츠를 다시 사 놓아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콰당―
재중은 갑작스레 들려온 커다란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다시 침대에 쓰러져 잠들어 있었던 그는 잠깐동안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못 보던 것이 익숙한 배경 사이에 하나 끼어 있다. 눈만 깜박이며 어리둥절해 있던 재중은
어딘지 그녀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달음에 문에서 침대까지 쫓아들어와
재중의 앞에 팔짱을 끼고 서서 거만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 너, 뭐하는 애야? ”
갑작스러운 질문에 재중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구지? 어떻게 카드키를 열고 들어왔을까? 프론트에서 키를 준 건가?
대체 이 여자가 어떤 여자길래? 그런데 왜 갑자기 들어와서 저런 걸 물어보는 거지?
게다가 저렇게 화난 얼굴로. 한 마디도 못하고 침대에 앉아만 있는 재중을 향해 지영은 계속해서
이를 갈 듯 말했다.
“ 너, 몸파는 애지? 주제를 알고 덤벼야지. 어디서 함부로 까부는 거야?
웬만큼 상대했으면 다른 손님 찾아가란 말이야. 왜, 윤호씨만큼 많이 주는 물주 잡기 힘들어?
그럼 내가 소개시켜줄까? 너 같은 애한테 딱 맞는 변태한테 말이야.
너 따위가 어떻게 감히 윤호씨같은 사람을 물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주제파악하고 당장 나가.
너 같은 거 내 눈앞에 숨쉬고 있다는 것조차 불쾌하니까. 뭐해? 당장 나가란 말이야! "
소리를 내지르며 테이블 위에 핸드백을 집어던지고 그 때까지 재중이 뒤집어쓰고 있던 시트를
걷었던 지영은 더더욱 표정이 험악해졌다.
“ 이게 뭐야? ”
온 몸에 잔뜩 남아있는 키스마크를 보자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이성이 아예 날아가버린 듯
지영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재중은 그렇게 화가 난 사람은 처음 봐서 공포에 질려버렸다.
갑자기 지영이 테이블로 손을 뻗어 과도를 집어들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칼날에
재중은 너무 놀라고 무서워 경기를 일으킬 것 같았다. 도망가려고 했지만 몸도 불편하고
그 전에 이미 덮쳐온 지영 때문에 그대로 침대에 엎어져 버렸다.
지영은 재중의 벗은 몸 위에 올라앉아 한 손으로 목을 조르고 칼을 높이 들어 격렬하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 너 같은 거 때문에 내가 이런 꼴을 당했다는 거야? 네까짓 게 뭔데?!
빌어먹을 남창새끼같으니, 죽여버릴 거야!!! "
“ 우와아아앗!!! ”
내리 꽂히는 과도를 보고 재중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퍽--
둔탁한 소리가 귓전에 울려퍼지고 그 순간 재중은 뇌속이 하얗게 변색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이상하다.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최소한 따끔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적막한 방안에 거친 호흡소리만이 흩어졌다. 재중이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자신의 목에 여전히 한 손을 조르고 가쁜 호흡을 쏟아내는 지영이 시야에 담겨졌다.
두려운 듯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이자 자신의 귀 바로 옆에 꽂혀 있는 과도와 그것을 쥐고 있는 지영의 손을
볼 수 있었다.
“ 오늘만 살려준 거야. ”
여전히 거친 음성으로 지영이 말했다.
“ 당장 여기서 나가. 안 그러면 다음엔 이걸 밖으로 꺼내줄 거야. ”
위협하듯 목을 쥐었던 손을 옮겨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이 위치한 곳으로 가져가 의미심장하게
그 자리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던 지영은 경멸하듯 재중을 노려보았다.
“ 퉷. ”
얼굴에 침을 뱉아버린 후에야 비로소 지영은 재중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
재중은 덩달아 일어나 앉았지만 너무나 공포스러워 그녀에게 덤비지도 못하고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지영이 던졌던 핸드백을 들고 돌아섰다. 그녀는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도도하게 허리를 펴고 똑바로 걸어갔다.
“ 난, 두 번 경고는 안 해. ”
문앞에서 돌아서서 마지막으로 덧붙인 지영은 다시 한 번 무서운 시선으로 재중을 노려본 후 밖으로 나갔다.
쿵--
문이 닫히고 나서도 재중은 한참동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내가 꿈이라도 꿨던 걸까,
하고도 생각해봤지만 자신이 쓰러져 있던 곳에 아직 그대로 꽂혀있는 과도는 그것이 현실이었음을 실감하게 했다.
무섭다, 하고 재중은 생각하며 이를 덜덜 마주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서운 경험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하지.
그 여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 죽인다면 어떻게 죽일까. 온 몸을 난도질해서?
아니면 산 채로 심장을 꺼내어? 다른 때 같으면 농담처럼 지껄일 말이 이렇게 현실로 와닿을 수가 없다.
무섭다. 무서워서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가 없다. 재중은 극도의 공포에 휩쓸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