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짓말-18화 (18/123)

거짓말 - (18)

윤호는 언제나 그렇듯 시계를 맞추지도 않은 채 정해진 시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앞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다.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른다.

결이 좋은 머리칼에 살짝 입술을 묻어 키스를 했다. 하지만 재중은 낮게 코를 골 뿐 전혀 깨어날 기미라고는

안 보인다. 한동안 팔에 안겨 있는 재중을 고양이를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쓰다듬던 윤호가

재중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 야옹, 하고 울어봐. ”

낮은 코골음이 멈추는가 싶더니 잠시 침묵이 흐른다.

“ …야옹… ”

잠결에 중얼거린 재중을 보고 윤호는 쿡쿡 낮게 웃었다.

간밤의 거친 행위로 잔뜩 부어있는 입술에 살짝 키스를 하고 천천히 일어났다.

팔베개를 해주던 팔을 빼자 재중이 한 쪽 눈썹을 찌푸리며 뭐라고 웅얼거렸다.

잠자코 보고 있자 재중은 움칠거리며 천천히 몸을 뒤척이더니 윤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조금 기분이 나빠진다. 윤호는 그런 재중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다시 얼굴을 자신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윤호의 얼굴은 여전히 찌푸린 채였다.

“ 덩달아 유치해지는 군. ”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다시 재중의 얼굴을 돌려놓지는 않았다.

윤호는 침대에 앉은 채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흐린 담배연기가 눈앞에서 흩어진다.

문득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자 미간에는 깊게 주름이 새겨진다.

토해내는 담배연기가 마치 한숨과 같다.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 언제나 냉정하던 그녀.

단 한 번도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던. 나의 최초의 고백에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젠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지만. 의미없이 타들어가던 담배가 손가락사이를 뜨겁게 달군다.

윤호는 담배를 끄고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 때까지 재중은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재중은 나른한 눈을 겨우 들어올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룸이 시야에 차오른다.

전날 윤호가 하도 혹사를 시켜서 정말 꿈도 안 꾸고 잤다. 욕실에서만 2번하고 또 나와서 한 것 까지는 기억나는데…

욱씬거리는 몸을 축 늘어뜨리고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다. 학교는 물 건너 갔구나,

하고 멍하니 생각했던 재중은 뒤늦게 놀라 벌떡 일어나려다 자지러지며 다시 쓰러졌다.

청소시간이 지나 있는 것이다. 설마 오늘은 안 했던 건가?

그 시끄러운 아줌마들의 목소리를 못 들었을 리는 없는데.

안 왔겠지. 재중은 억지로 믿으려 애쓰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안 왔을 거야. 안 왔어야 해.

“ 에구구구구구구구… ”

할머니 굽어진 허리 펴듯 힘겹게 몸을 일으킨 재중은 심호흡을 하며 잠시 앉아있었다.

아직 윤호가 올 시간은 멀었으니 좀 쉬다가 씻고 룸서비스나 시켜야겠다.

그 때 테이블에 놓여있는 과일과 과도가 눈에 들어왔다. 어라, 저건 뭐지. 어젠 없었는데.

아마도 윤호가 시켜주고 간 것 같다. 그럼 누군가 이미 내 모습을 봤다는 얘기일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볼을 타다닥 쳤다. 윤호가 문 앞에서 받아서 갖다 뒀겠지, 그랬을 거야.

애써 그렇게 생각했지만 절대 그럴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담배나 피우며 신문 보면서 저기다 놓고 나가, 정도나 되었겠지. 제기랄.

그나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버릇이 있어 다행이긴 하지만.

고민만 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씻기나 하자, 하고 정작 욕실을 돌아보았던 재중은 그러나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자연스러운 연상작용으로 지난 밤의 기억이 떠오르자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윤호의 팔안에서 거칠게 내뱉던 호흡과 신음소리가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 우와아앗~ ”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며 재중은 허공을 향해 혼자 비명을 질렀다.

느껴버렸다. 남자를 상대로, 그것도 뒤만으로 가버렸다. 완벽하게, 처음으로.

나, 호모가 되어버린 건가.

입살이 보살이라고 전날 윤호를 향해 바보같이 웃으면서 “ 전 호모잖아요 ”라고 얘기했던 자신이 떠오르자

재중은 울컥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입을 퍽퍽 치다가 부어오른 입술이 터지는 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입을 움켜쥐었다. 한심하다. 너무 너무 한심하다.

하지만 윤호가 다른 때하고 다르게 지나치게 사람을 몰아부치니까 그렇게 된 게 아니냔 말이다.

한참 예민한 청소년을 이렇게 다루다니. 재중은 여전히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윤호에게 욕을 퍼부으며

앉아 있었다.

삐--

신호음에 윤호는 여전히 시선을 서류에 고정시킨 채 손을 뻗어 스피커폰을 눌렀다.

“ 무슨 일이지? ”

건너편에서 익숙한 가라앉은 음성이 대답한다.

“ 신지영씨 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

“ 돌려보내. ”

대답을 마치자마자 건너편에서 새된 비명이 들려온다.

“ 5분이면 될 텐데 찾아온 사람을 어떻게 문앞에서 돌려보낼 수 있어? 윤호씨 정말 이럴 거야? ”

윤호는 잔뜩 눈썹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 들어와.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고 지영이 척척 걸어 들어왔다. 윤호는 흘깃 시계를 보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 5분이랬지. 빨리 말해. ”

지영은 익숙한 그의 태도에 끓었던 화를 식히며 조금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 아버지가 윤호씨 본 지 오래 됐다고 오늘 저녁에 봤으면 좋겠대. ”

“ 선약이 있다고 얘기했잖아. ”

윤호의 서늘한 거절에도 지영은 계속해서 고집을 부렸다.

“ 누구랑 약속인데? 우리 아버지 거절할 만큼 중요한 사람이야?

내가 아버지한테 얘기해서 다음으로 약속잡게 하면 되잖아. ”

윤호는 처음으로 지영에게로 눈을 돌렸지만 표정은 극도로 험악하게 굳어 있었다.

안경 너머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윤호가 입을 열었다.

“ 내 약속은 내가 취소해, 넌 그럴 권리 없어. ”

지영은 순간 움칠해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시작했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취조하는 듯한 기색으로 윤호를 노려보았다.

“ 이미 스케줄 봤어, 윤호씨. 오늘 저녁은 비어 있던데 무슨 소리야? ”

때를 같이 해 노크소리가 들려오고 비서가 커피를 가져왔다. 윤호의 비서는

190이 넘는 근육질의 무뚝뚝한 남자였다. 그런 그가 몸집이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게 들고

섬세하게 들어오는 커피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윤호는 자신의 앞에 그것을 내려놓는 비서를 향해 말했다.

“ 허락없이 스케줄을 아무에게나 보여주나? ”

윤호의 불쾌한 음성에 비서가 입을 열기 전에 지영이 대꾸했다.

“ 약혼녀인 내가 어째서 당신의 스케줄을 보지 못한다는 거지? 도대체 누구야?

스케줄에도 없이 약혼녀나 장래 처갓댁의 초대를 거절할 정도로 중요한 사람은.”

윤호는 이제 만면에 조소를 지으며 지영을 향해 말했다.

“ 지금 나를 만족시켜 주고 있는 베드파트너지. ”

챙그랑―

침묵이 흘렀다. 윤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로 옆 벽에 부딪혀 깨져버린 커피잔의 조각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지영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깔끔하던 셔츠는 커피가 얼룩져 군데군데 흉하게 물들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