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16)
카드키로 익숙한 호텔방에 들어간 재중은 언제나 그렇듯 비어있는 방앞에서 잠시 망연히 서있다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며칠만 더 참으면 봄방학이니까…
그러고 나서 학년 바뀌면 반도 갈리니까 괜찮겠지.
누군가에게 이러쿵 저러쿵 얘기를 듣는 것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
게다가 충고라니, 우습게도. 그들이 뭘 알아서.
주말에는 할머니 댁에 가야 하니까 미리 얘길 해 둘까, 하고 재중은 생각하며 씻고 혼자 이른 저녁을 먹었다.
시간이 흘러 밤이 되자 카드키의 체크소리가 들려오고 윤호가 들어온다.
“ 어서 오세요. ”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윤호는 흘깃 테이블에 놓인 참고서에 시선을 주었다.
“ 식사는? ”
“ 했어요. ”
윤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낮의 일이 생각난다.
여자애들을 싫어하지는 않았었는데. 아까는 왜 그리도 짜증이 나던지.
이렇게 또래 애들에게 흥미가 없다가는 나중에 정말 연상의 여자와 불륜에 빠지게 되는 건 아닐까.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 그러고 보니, 나 미팅도 한 번 못해 봤구나… ”
역시나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윤호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한다.
“ 이봐, 혼자 웅얼거리지 좀 말고 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기운없이 늘어져 있는 녀석이나 비굴한 녀석이 난 제일 싫어. ”
재중은 버럭 내지른 윤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놀라 소리쳤다.
“ 미팅도 못 해봤다구요! ”
윤호가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재중을 바라본다.
“ 유치하기는. ”
그러니까 누가 당신한테 한 얘기였냐고? 난 혼잣말이었단 말이야! 왜 뭐냐고 물어보고서 또 짜증을 내?
“ 여자가 좋은가 보지? ”
재중은 윤호의 심드렁한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뒤늦게 자신이
그에게 스스로가 남창이라고 속였던 것을 떠올리고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 설마, 난 호모잖아요. ”
윤호가 물끄러미 재중을 바라본다. 저렇게 뚫어져라 바라볼 때는 섬뜩섬뜩하다.
꼭 다 안다는 듯이 노려보는 것 같은… 윤호가 가는 은테안경 너머로 미소를 지었다.
“ 그래, 그랬군. ”
때를 같이 해 날카로운 벨소리가 울려 퍼진다. 윤호는 느릿하게 다가가 스피커폰을 눌렀다.
“ 네, 정윤호입니다… ”
맑은 여자의 음성이 건너편에서 울려나온다.
“ 윤호씨, 나야. 내일 바빠? 나 점심 사달라고. ”
윤호는 전화기 옆에 놓여있는 담배를 집어 입에 물고 불을 붙인 후 말했다.
“ 약속 있어. ”
“ 그럼 저녁은? ”
집요하게 묻는 여자에게 윤호는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무심히 대꾸했다.
“ 돈이 없으면 비서한테 얘기해. 구좌로 넣어주라고 할 테니까.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건너편에서 새된 비명소리가 날아왔다.
“ 내가 돈이 없어서 사달라고 하는 거야? 도대체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어떻게 약혼녀를 이렇게 취급해? ”
윤호는 깊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 그런 거 이미 알면서 나랑 약혼한 거 아니야? 뭐가 불만이야? 성가시게 굴지 않겠다고 얘기했었잖아?
그러지 못하겠으면 지금이라도 그만 둬. 시끄러운 여자는 질색이야. ”
말문이 막힌 듯 여자가 입을 다문 사이에 윤호가 말을 이었다.
“ 끊어, 귀찮게 하지 말고. ”
막 폰을 끊으려고 하는 윤호에게 여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 자, 잠깐! 귀찮게 하려던 거 아니야. 그럼 모레는? 모레는 시간 있어? 스위트 룸 예약해뒀단 말이야. ”
윤호는 창백한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달력을 바라보았다.
“ 안돼, 이번 주는 모두 꽉 찼어. 애인 많잖아? 다른 놈이랑 가.
그리고 볼 일이 있으면 미리 비서한테 연락해서 약속을 잡아. 제멋대로 전화하지 말고.”
“ 윤호씨… ”
삑―
날카로운 신호음이 방안에 가득히 울려 퍼진다. 윤호는 스피커폰을 꺼버리고
의자에 앉아 깊숙이 담배연기를 들이마셨다. 재중은 물끄러미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옆에 있으면 닮는다더니. ”
흩어지는 담배연기를 바라보고 있던 윤호가 고개를 돌렸다.
“ 아무 것도 아니에요. ”
더러워지느니 성질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재중은 다시 의자에 앉아 펼쳐두었던 참고서를 들여다보았다.
윤호는 담배를 거의 다 피우고 난 후 그것을 재떨이에 비벼끄며 입을 열었다.
“ 씻어야겠군. ”
의자에서 일어나는 그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데 윤호가 얼굴을 찌푸린다.
“ 너는? ”
“ 저 학교 다녀오자마자 씻었는데요. ”
“ …… ”
“ 저, 또 씻을래요. 씻고 싶어졌어요!"
무언의 압력에 밀려 서둘러 소리치자 그제야 윤호가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인다.
먼저 욕실로 들어가는 윤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부 껍질 벗겨 지겠구나, 하고 재중은 막막해하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