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15)
개학을 하고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재중은 무료하다시피 평범한 학교생활을 그럭저럭 견뎌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자신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도무지 아이들과 어울릴 수 없이 혼자만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을 때가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학교보다 오히려 호텔에 혼자 있거나 윤호와 있을 때가 오히려 더 편안하다.
가출을 하는 심정을 알 것 같군.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인데, 역시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하는 건가 봐…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던 재중은 그 날도 멍하니 학교가 끝나기만 기다렸다가 종례가 끝나자마자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 재중아! 벌써 가? ”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민철을 바라본 재중이 심드렁한 음성으로 말했다.
“ 종례 끝났으면 가야지 그럼? ”
생각보다 쿨한 반응에 민철은 조금 당황했다. 방학 동안에 잠시 자신의 집에 있었던
재중은 저렇게 쿨한 느낌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동생의 일이라든지 집안일이라든지
이것저것 고민은 많았지만 그래도 꽤나 낙천적이었다고 기억하는데. 민철은 겨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아니, 별 일 없으면 같이 가자. 나 용돈 받았거든. 뭐 먹으러 갈래? ”
민철의 말은 거절을 할 수가 없다. 싫다고 말을 하자면 언제나 그의 집에서 기거했던 자신의 지난 일이
생각나는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함부로 신세를 지면 안되는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 재중은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
민철은 내켜하지 않는 것이 명백한 재중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용케 거절의 말을 하지 않는 것에 의문이 생겼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거절하지 않으면 다행인 거지, 뭐.
내심 자신의 집에서 쫓아낸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던 민철은 언제나 재중이 자신을 원망할 거라 생각하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다시 본 재중은 묘하게 변해 있어서,
전과는 다르게 말을 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오늘 함께 다니며 속을 좀 떠봐야지, 하고 민철은 굳게 다짐했다.
“ 런치세트 시킬까? 응? ”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연신 떠들어대는 민철에 비해 재중은 시큰둥한 얼굴로 대꾸했다.
“ 너 좋은 걸로 시켜. 나 닭 별로 안 좋아해. ”
이렇게 냉담한 반응이 나오면 대개 질려하기 마련인데 민철은 무안한 기색도 없이 웃으며 말했다.
“ 그래? 난 좋아하는데. 그럼 너 뭐 먹을래? 햄버거가 좋으면 딴 데 가고. 파파이스는 햄버거가 별로 맛없어서. ”
“ 다 마찬가지야. 들어왔으니까 그냥 시켜. 아무거나. ”
이거나 저거나 마찬가지라 여전히 무뚝뚝하게 말한 재중에게 민철은 ‘에에 그러면’
하고 몇 개 메뉴를 고르더니 다시 말했다.
“ 내가 가져갈게 넌 먼저 가서 기다려라. ”
“ …그래. ”
방학 사이의 평일은 꽤나 붐빈다. 게다가 이런 시내의 패스트 푸드 점은 더욱.
때마침 일어나는 여자애들이 있어서 재중은 발걸음을 그 쪽으로 향했다.
쓰레기를 들고 가방을 메던 여자애들은 다가간 재중을 보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빨리 갈 것이지.
인상을 찌푸리고 옆에 서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말했다.
“ 왜요, 우리한테 볼 일 있어요? ”
재중은 짐짓 새침하게 말하는 여자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 자리 때문에. 가려는 것 같아서. ”
짤막하게 말하자 여자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 어머, 별 꼴이야, 우리 안 가요. ”
자존심이 상했는지 여자애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다른 여자애들도 눈치를 살피다가 엉거주춤 자리에 앉는다.
재중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때마침 다른 쪽에 자리가 보여서 몸을 돌렸다. 뒤에서 수근거리는 음성이 들려온다.
“ 웃겨, 얼굴 좀 반반하면 단가. ”
“ 저 학교 어디니? 교복 많이 봤는데. 그래도 쟤 정말 잘 생겼다. 키도 큰 편이고. ”
“ 넌 자존심도 없니? 얼굴만 잘 나면 성격은 안 봐? 저런 스타일 난 질색이야. ”
가서 한 마디 해줄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유치해서 그만 뒀다.
가방을 내려놓고 앉자 때마침 민철이 주문했던 것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 이 쪽. ”
손을 한 번 크게 흔들자 두리번 거리던 민철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 미안, 많이 기다렸지? 주문이 밀려 있어서. ”
재중은 아무 말 없이 가져온 콜라에 스트로우를 꽂아 입으로 가져갔다.
수다스러운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온다.
“ 어머 남자애들 둘이 왔나 봐. 궁상스럽긴. ”
이봐, 다 들린다고. 아무리 여기가 시끄럽다고 해도 그렇게 크게 얘기하면 다 알아.
재중은 아무래도 아까 한 마디 해주고 올 걸, 하고 문득 후회했다.
“ 왜 그래? 맛이 없어? ”
콜라가 맛이 없어봐야 콜라일 텐데,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민철을 보며 재중은 피식 웃었다.
여자애들과의 자리에 관한 얘기는 전혀 모르는 일이니 떠들어대는 것이 나에 관한 얘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하겠지. 그런데 뭐가 저렇게 조바심나는 얼굴인 걸까.
“ 별 거 아냐. ”
간단히 말하고 나서 포테이토를 집어 깨작거리며 씹었다. 입안에 기름이 넘쳐나는 것 같다.
재중은 맛없는 표정으로 느릿하게 포테이토를 씹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민철은 계속해서 이것저것 잘도 떠들어댄다.
대꾸도 없이 묵묵히 듣기만 하던 재중은 조금 짜증이 났다.
“ 너, 나한테 할 말 있어? ”
잠시 민철이 콜라를 먹기 위해 말을 멈췄을 때 재중이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민철의 얼굴에 뜨끔하는 기색이 스친다. 내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 저렇게 정직하게 표정이 드러날까.
나 역시 저럴까. 문득 재중은 궁금해졌다. 역시나 민철은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 으, 으응… 실은… 저기, 내가 할 얘기는 아니지만 말이야,
혹시 너 방학 동안에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닌가 해서… ”
“ 왜? ”
대답도 없이 짜증스럽게 내뱉는 재중에게 민철은 더더욱 당황해서 말했다.
“ 저, 저기 그러니까… 너 굉장히 묘하게 변해버려서… 뭐랄까, 분위기가 말이야… ”
무슨 상관이야,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재중은 콜라를 조금 마시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했다.
아무 말 안 하는 재중을 보며 민철은 이것저것 말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 아, 저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저번에 화장실에서 들은 건데, 네가 굉장히 느낌이 묘해졌다고… ”
재중은 아무 말 없이 잔뜩 얼굴을 찌푸려보였다. 뭐야, 그런 얘긴가.
민철이 어렵게 말을 돌리고 있지만 무슨 얘긴지 훤하게 알 것 같다.
재중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며 말했다.
“ 그러니까, 뒤 조심하라고? ”
직선적으로 내뱉은 재중의 말에 민철은 얼굴이 삶은 문어처럼 새빨개졌다. 재중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그런 얘기잖아, 결국은. 아니야? ”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쉽게 얘기해버리면 어렵게 종일 고민해서 말을 꺼낸 나는 뭐가 된다는 거냐.
민철은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뻔뻔할 정도로 잘도 말하는 재중이 원망스러워졌다.
재중은 여전히 냉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 네가 걱정해 줄 것 없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
“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몇 명이나 되는 상대를 너 혼자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
“ 몇 명이나 된다고? ”
불끈 해서 말해버렸지만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민철은 자신을 향해 눈을 깜박이고 있는 재중을
마주 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영철이 패거리들이 말하는 걸 들었단 말이야. ”
좀 심각하게 얘기를 받아들여줄까, 하는 민철의 기대는 깨끗하게 어긋나 버렸다.
재중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빈정대듯 이렇게 말한 것이다.
“ 반장은 오지랍도 넓지. ”
민철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박거렸다. 재중은 계속해서 이죽거리듯 말했다.
“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요컨대 뭐야, 불우 청소년 탈선의 길로 들어설까봐 걱정해 주는 거야?
아니면 너한테 내가 좀 신세졌다고 너 아니면 안 될 거 같아? 그도 아니면 나한테 은혜라도 베풀고 싶어?
안타깝게도 그런 거 마음에 담아두고 감사할 만큼 섬세한 성격은 되지 못하는데. ”
“ 그럴 리가 없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이제 불쾌해진 민철이 버럭 화를 냈다.
“ 나는 순수하게 너를 걱정해서 하는 소리야, 너는 내 친구니까!
게다가 네가 힘들 때 난 제대로 도움되지도 못했고… ”
“ 그러니까, 미안해서? ”
조금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한 재중이었지만 민철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재중은 화가 나 얼굴이 벌겋게 익어있는 민철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 불필요한 친절이야. ”
왜 네가 나에게 미안해할까. 전혀 남인데. 친척이라고 이름붙여진 사람들조차 내게 관여하지 않고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데, 왜 유독 너는 그렇게 죄책감에 가득한 얼굴로 나를 걱정할까. …
그래서 사람이 너무 좋으면 안 되는 거야. 때마침 여자애들의 거슬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 어머, 몰상식하게 이제는 싸우기까지 하네. ”
“ 그러게, 공공장소에서. ”
“ 사랑싸움인가. ”
“ 어머, 그거 호모라고 하는 거지? 어쩐지 생긴 것도 꼭 같드라. ”
키득거리는 것이 거슬린다. 재중은 잠자코 민철의 너머로 그녀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재중의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그들은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민철은 겨우 분을 삭힌 듯 조금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 내 말을 들어준다고 뭐가 나빠? 난 걱정이 되니까… 야, 김재중? ”
민철은 갑자기 스트로와 뚜껑을 빼낸 후 반 이상 남은 콜라를 들고 일어나는 재중을 보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중은 전혀 망설이는 기색 없이 민철의 곁을 스쳐 성큼성큼 걸어갔다.
때마침 까르르 거리던 여자애들 중의 하나가 문득 고개를 든다.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할 겨를은 전혀 없었다.
촤악―
“ 꺄아아악!! ”
비명소리가 쏟아지고 시끄럽던 패스트푸드점은 한순간 소란을 멈추고 시선을 집중시켰다.
여자애들은 콜라를 뒤집어쓰고 벌떡 일어나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재중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패닉에 빠져있는 여자애들에게 한 마디 했다.
“ 시끄러워, 이 기집애들아. ”
그리고 재중은 가방을 들고 민철에게 던지듯 말했다.
“ 잘 먹었어. ”
조용히 가라앉은 패스트푸드점을 가로질러 걸어간 재중은 문앞의 휴지통에 컵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여자애들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온다.
“ 기, 기가 막혀서! ”
“ 거기 안 서? 이 빌어먹을 자식! ”
“ 어떻게 해, 난 몰라! ”
쳇, 하고 재중은 낮게 욕설을 내뱉은 후 큰 걸음으로 사람들의 홍수에 휩쓸려 걸어갔다.
추운 겨울의 오후가 그의 곁을 스쳐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