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14)
“ 앗… 앗앗… ”
더운 신음소리가 벌컥벌컥 쏟아진다. 재중은 숨을 헐떡이며 어떻게 해서든 호흡을 조절해보려 애썼다.
다리 사이에 들어와 있는 윤호가 귓가에 숨결을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 꽤 능숙해졌잖아, 너. 이제 조금 느끼는 모양이지. ”
느낄 리 없잖아, 바보―하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날 파티장에서 무참하게 당하고 난 후 하루 기본이 3-4번이었는데 익숙해지지 않으면 어쩌란 말이냐.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흩어지는 것도 B까지만이다. C까지 가버리면, 도저히 좋은 기분따위는 들지 않는다.
게다가 벌써 이 남자는 재중에게 3번이나 사정을 한 상태였다.
이 쪽은 지칠대로 지쳐있는데도 불구하고 윤호는 전혀 물러서는 기미가 아니었다.
물론 처음처럼 창자가 비어져 나온다거나, 토할 거 같다거나, 죽을 거 같은 기분은 좀 나아졌다.
어떠한 상황에서건 몸은 적응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좀 더 적응해서 느끼게 된다면 좋겠는데,
역시 나는 골수까지 호모는 아닌 모양이야, 하고 재중은 멍하니 생각했다.
“ 아얏! ”
갑자기 쿡, 하고 깊은 곳을 찔러오는 바람에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버렸다.
윤호의 찡그린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 행위 중에 다른 생각을 하다니, 예의가 없군. ”
재중은 자신이 알고 있는 윤호에 관한 프로파일링에 하나를 더 추가시켰다.
성질드럽고 돈많고 행위 중에는 상대의 마음도 읽는 변태. 전 날 윤호는 아예 호텔로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와 멋진 밤을 보내는 건가, 하고 생각하며 오랜만에 느긋한 휴식을 취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밤은
그러나 생각외로 길기만 했다. 다음날 언제나처럼 청소를 하러 오는 아줌마들을 습관처럼 피했던 재중은
스스로를 한심해했다. 바보같이. 어제는 아무 일 없었으니 옷 단정히 입고 인사해도 됐을 텐데.
하지만 빈 호텔방에 혼자 앉아있는 소년 A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다지 좋지 못할 것 같았다.
분명히 아줌마들의 다분한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물어볼 텐데, 거짓말에 그다지 능숙하지 못한 자신으로서는
꼬리가 밟히고 말 것이다. 물주야 돈 많은 모양이니 잘 해서 나오겠지만 잘못하면 자신은 퇴학이다.
숨길 잘했어, 그럼, 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던 재중은 아줌마들이 방을 다 치우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욕실에서 나와 그 날 하루는 종일 TV만 보며 지냈다. 그리고 저녁 늦게 돌아온 윤호는 씻자마자 말 그대로
짐승처럼 달려들더니 곧장 재중을 침대에 눕히고 짧은 전희(前戱)를 마치자마자 단번에 능숙하게 밀고 들어왔다.
어제 여자가 그다지 별로였던 모양이지.
윤호의 빠른 행위를 쫓아가려 애쓰며 재중은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그 정도로 숙달되지는 못한 탓에 호흡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다.
호흡곤란에 헐떡이는 소리를 오해했는지 윤호가 했던 말은 뻔뻔스럽기까지 하다.
몸 안에 들어와 있는 윤호의 일부를 느끼면서 재중은 문득 얼굴을 찌푸렸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이 남자의 행위는 지나치게 긴 경향이 있다.
대부분 남자의 스태미너가 얼마라더라.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같은 남자로서 생각하기에,
혼자 자위를 해도 끝은 그렇게 찜찜할 수가 없다. 사정을 하고 나면 남자라는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기분이
불쾌해진다. 게다가 심한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끝없이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귀찮을 정도로. 그런데 이 남자는 어떤가. 하룻밤에도 몇 번이고 지치지도 않는다.
도리어 당하는 쪽이 한참이나 먼저 지쳐서 제발 그만 둬달라고 울며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정한다고 언제나 들어주는 건 아니었지만, 정말 지쳐서 나가떨어지겠다 싶으면
신기하게도 그는 행위를 멈추곤 했다. 어쩔 때는 1번도 제대로 안 하고 내려온다.
일말의 양심은 있는 거겠지, 라고 생각도 했지만 나름대로의 배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근래에 든 것이다.
오늘같이 종일 잘 먹고 뒹군 날은 그 대가라도 되는 것처럼 하룻밤사이에 몇 번이나 당하게 마련이었지만.
“ 핫― ”
자신의 몸 깊숙이에 퍼져 들어오는 뜨거운 것을 느끼면서 재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오늘의 일과는 이렇게 끝이구나…
“ 저, 일주일 뒤가 개학이에요. ”
윤호는 입에 물었던 담배의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신 후 천천히 내뱉으며 재중을 바라보았다.
재중은 침대에 엎드려 자신의 옆에 역시 벗은 채로 베개에 기대어 반 정도 앉아있는 윤호에게로
시선을 향하며 말을 이었다.
“ 봄방학까지 이주일 정도 다니고 나면 열흘정도 쉬었다가 다시 학교 다니려구요… ”
윤호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떼며 특유의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나갔다 오겠다는 거냐 아예 나가겠다는 거냐. ”
일전에도 이 사람은 같은 질문을 했었다. 재중은 여전히 엎드린 채로 대답했다.
“ 나갔다 올 거예요. ”
갈 곳이 없거든요, 하고 속으로 덧붙였지만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호는 한 쪽 입가를 일그러뜨리고 시니컬한 미소를 지었다.
“ 꽤 성실한 모양이야. 학교를 다니다니. ”
하긴, 이 사람이 보기엔 잘해야 날라리 고삐리 정도였을 테니까. 재중은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 저, 2학년 때는 학생회장 후보에도 올랐었어요. 1학기 때 반장했거든요.
뭐 인덕이 없어서 결국 미역국 먹었지만. ”
“ 흐응… ”
윤호가 새삼스레 재중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재중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 의외죠? ”
“ 그래. ”
쉽게 수긍하는 윤호를 보며 재중은 미소를 지었다.
“ 저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꿈같아요. ”
윤호는 담배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재중은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엎드려 있자니 왠지 눈물이 나온다. 재중은 눈물이 흘러내리기 전에 서둘러 눈을 감았다.
차분히 기분을 가라앉히고 눈물샘을 그러모았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바람에
재중은 서둘러 머리를 베고 있던 팔에 얼굴을 묻었다. 때를 같이 해 눈물이 흐른다.
어떻게 해서든 흐느끼지 않기 위해 숨을 참고 있는데 커다란 손이 머리를 짚었다.
“ 울지 마라, 우는 건 질색이니까. ”
언제나처럼 서늘한 음성이 머리위에서 들려왔다. 재중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꾸했다.
“ 안 울어요, 누워 있으니까 수분이 몰려서 그래요. ”
“ 그런가. ”
믿는지 아니면 믿는 척 해주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윤호는 짧게 말한 후 손을 치웠다.
문득 재중은 아쉬움을 느꼈으나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느샌가 고른 숨을 몰아쉬며 잠들어 버렸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다. 재중은 전날 호텔 세탁소에 맡겼던 교복을 갖춰 입었다.
언제나 일찍 일어나는 윤호는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재중은 꾸벅 인사를 하고 말했다.
“ 다녀오겠습니다. ”
“ 이거 가져가. ”
쳐다도 보지 않는 주제에 잘도 지갑을 꺼내 수표를 내민다. 재중은 이미 전과가 있었던 탓에 감사의 말만
중얼거리고 돈을 받아 방을 나왔다. 등뒤로 문을 닫으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지만 윤호는 신문만 보고 있을 뿐
재중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뭔가 조금 서운하다. 재중은 한숨을 내쉬고 호텔의 긴 복도를 걸어나왔다.
겨울의 아침해가 부산스럽다. 손을 들어 햇살을 가리며 전철역을 향해 걷는 재중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만은 못했다.
“ 김재중, 잘 지냈냐? ”
교실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놈이었는데 잘도 다가와 말을 건다.
재중은 자신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무신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럭저럭. ”
“ 어디서 지냈어? 전화라도 좀 하지. ”
이번에는 민철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묻는다. 민철이마저 무시할 수는 없어서
재중은 내키지 않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 전화할 상황이 되지 못 했어. 아는 사람 집에서 지냈거든. ”
“ 그랬구나, 걱정 많이 했어. ”
사람 좋은 얼굴로 말하는 민철을 마주 보며 재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이제 정말로 괜찮으니까. ”
문득 반에 긴장이 흘렀다. 민철은 놀라 재중의 얼굴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재중은 급작스럽게 달라진 반의 분위기가 자신때문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가방을 대충 풀고 자리에 앉았다.
“ 왜 그래, 더 할 얘기 있어? ”
고개를 들어 아직 주춤거리고 있는 민철에게 말을 걸자 민철은 허둥지둥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응, 괜찮다니 다행이다, 그래. ”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말을 중얼거리던 민철은 역시나 급히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재중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가져온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눈을 내리깔고 집중하기 시작하자 주변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좋다, 이 완벽한 격리감.
재중은 때때로 자신의 집중력이 정말 감사할 때가 있었다.
남들보다 몇 배는 뛰어난 집중력 덕분에 어떠한 곳이라도, 어떠한 분위기라도 자신은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럴 때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의 중요한 얘기를 종종 놓칠 때가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 날도 다르지 않아서, 재중은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아이들의 음성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 저기, 저 자식 원래 저랬던가? 내가 잘못 봤나? ”
“ 아냐, 저 봐, 분위기가 묘하게… ”
“ 전하고 굉장히 다른 것 같아. 무슨 일 있었나? ”
“ 집이 망하면 저렇게 되는 거야? 하지만 저 자식은 힘들거나 초라해 보인다기 보다는 뭐랄까… ”
차마 결정적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다른 얘기만 수군거리는 애들을 보면서 민철은 문득 불안해졌다.
분명히 재중은 변했다. 기운없어 보이지 않는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저 변해버린 분위기는 또 좋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민철은 불길한 예감에 연신 재중의 눈치를 살폈지만
정작 재중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