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13)
“ 더 먹어, 인찬아. ”
시켜 놓은 피자가 무색하게 몇 입 잘라먹지도 않고 휘적거리기만하는 동생을 보며 재중이 입을 열었다.
인찬은 아무 말 없이 계속 피자만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재중은 참을성있게 다시 말을 걸었다.
“ 피자 맛 없어? 다른 거 먹으러 갈까? ”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인찬을 보고 종내 재중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 인찬아, 형 오랜만에 봤는데 그러고 있으면 형도 마음이 안 좋잖아. ”
재중의 말에 인찬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 형, 또 갈 거야? 나 할머니댁 있는 거 싫은데, 나만 두고 갈 거야? 형도 나랑 같이 있음 안돼?
할머니는 아침마다 오늘은 데리러 오는 거냐고 나한테 화를 내는 걸.
전주댁 아줌마는 항상 밥도 안 차려주고 내가 밥 안 먹는다고 했다고 할머니한테 거짓말 해.
나 방청소 열심히 해도 할머니 한 번도 칭찬 안 해주고, 친구도 없단 말야… ”
울먹거리며 눈물을 훔쳐내는 동생을 보며 재중은 애써 따라 울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했다.
“ 인찬아, 그만 울어. 1년만 참아. 형 학교 졸업하고 나면 형이 인찬이 데리러 올게. 응, 기다릴 수 있지?
형 믿지? 할머니한테는 형이 잘 말할게… ”
넓은 피자집에서 애들 둘이 마주 앉아있는 것도 눈에 띄는데 한 애는 통곡을 하고 다른 애는 달래고 있으니
시선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재중은 남은 피자를 싸달라고 얘기한 후 냅킨을 집어 동생에게 건네주었다.
“ 인찬아, 뚝 그쳐. 남자는 그렇게 쉽게 우는 거 아냐. 인찬이는 훌륭한 대한남아잖아.
그렇지? 형이 뭐랬어? 남자는 태어나서 3번 운다 그랬지? 인찬이 이렇게 많이 울면 나중에 울지도 못하겠다. ”
“ 하지만, 형이, 나 버리고, 가니까, ”
흐느낌사이로 딸꾹질을 하며 인찬이 말했다. 재중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인찬아. 우리 인찬이를 누가 버려? 형이 이제 주말마다 만나러 올게.
그러니까 꿋꿋하게 울지 말고 있는 거야. 알았지? 자꾸 울고 그러면 할머니가 미워하잖아.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얌전히 있어야지. 알았지? ”
그제야 인찬은 겨우 눈물을 멈추고 딸꾹질을 계속하며 말했다.
“ 정말, 주말마다, 오는 거지? ”
재중은 인찬이 울음을 그친 것에 기뻐하며 미소지었다.
“ 그래, 토요일이면 항상 너네 학교로 마중갈게. ”
“ 약속. ”
내밀어진 작은 손가락에 약지를 마주 걸고 도장을 찍었다.
“형 말대로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하게, 있을게. ”
“ 그래. ”
재중은 당장 인찬에게 알려줄 연락처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 흔한 PCS는커녕 BP도 없으니…
있는 돈은 일단 아껴서 저금해 두는 게 좋겠지만… 재중은 때마침 가져다준 포장된 피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자, 나가자. 인찬이 이제 어디 가고 싶어? 이제 학년 올라가니까 학용품 사줄까? ”
이제 5학년이 되는 인찬은 벌써부터 세상일에 달관한 듯 어른스러웠다.
코가 빨개지고 조금 흐느낌이 남은 것을 제외하고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의젓하게 동생은 말했다.
“ 괜찮아. 쓰던 거 아직 많이 남아 있어. 그 돈 모아서 집 사야지. ”
재중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인찬아. 어차피 이 돈으로는 집 못 사. 그러니까 인찬이 학용품 사자. ”
“ 그럼 싼 걸로. 집 앞에 까르푸 있으니까 거기 가면 싸. ”
고집을 부리는 동생을 향해 쓴웃음을 지으며 재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렇게 하자. ”
계산을 하고 한 손에는 피자를, 다른 손에는 동생의 손을 맞잡고 걸어가던 재중은 이것저것 근간의 일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 그, 뭐라더라. 너하고 친하게 지내던 친구 있잖아. 이름이 진규였던가. 걔는 어때? 전화하니? ”
“ 아니, 전화 안 했어. ”
“ 왜? ”
“ 놀릴까봐, 창피해서. 우리 학교에 경헌이라고 있는데, 걔가 그 녀석하고 친하거든. ”
솔직하게 털어놓는 동생에게 재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 왜, 친하면 안돼? ”
“ 경헌이는 나쁜 자식이야. 집 좀 잘 산다고 굉장히 잘난 척 해. 우리 집 망한 거 알면 또 까불거야. ”
“ 그렇구나… ”
아이들은 때로 지독하게 잔인할 때가 있다. 아직 초등학생인데도 저런 생각을 해야 하다니.
뭔가 서글퍼져 깊이 한숨을 내쉬었던 재중은 신호등에 걸려 걸음을 멈췄다.
“ 인찬아, 호빵 먹을래? ”
편의점의 유리사이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빵이 먹음직스럽게 비쳐졌다.
“ 난 야채호빵. ”
“ 나도. ”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안으로 들어가 호빵을 사가지고 나오던 재중은 문득 바로 옆에 있는 카페의 간판에
시선을 주었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웰링턴.
어라, 아는 카페던가. 왜 낯이 익지. 그 말에 대한 해답은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어두운 유리 너머에 보이는 말쑥한 차림새의 남자는 꽤나 낯이 익었다.
물론 테이블 너머로 몸을 일으켜 그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남기는 여자는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 어머 정말 창가에서 저러고 싶을까. ”
누군가 투덜거리며 옆을 스쳐지나갔다. 재중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 형, 뭐해? ”
동생이 손을 잡아끈 후에야 비로소 재중은 신호가 바뀐 것을 깨닫고 서둘러 길을 건넜다.
뭐야, 사귀는 여자가 있으면서… 조금 짜증이 났다. 재중은 인찬의 손을 붙잡고 달리다시피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 형, 걸어도 돼. 아직 신호등 남았어. ”
동생이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지만 재중은 듣지 않았다. 왜 이렇게 내가 비참해지는지 모르겠다.
열등감. 당신의 돈을 쓰면서 거리를 다니는 동안에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
어떻게 해서 번 돈인지 실감하게 되잖아, 빌어먹을.
기분이 나빠졌다. 재중은 오랜만에 보내게 된 동생과의 시간을 이런 기분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기분을 바꿔야겠는데…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재중은 멀리서 누군가 소리치며 달려오는 바람에
시선을 멈추었다.
“ 야, 김재중. 웬일이냐? 너 집 이 근처였어? ”
최악. 같은 반의 녀석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재중은 어렵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할머니댁 놀러온 거야. ”
“ 그렇구나. 동생이야? 너 닮았다. 몇 학년이야? 정말 귀엽네. ”
언제나 느끼던 것이었지만 특히 수다스러운 녀석이다. 여자들에게 인기있는 걸 보면 여자들은
저 수다스러운 면에 반하는 건지 반반한 얼굴에 반하는 건지 감이 안 잡힐 때가 있다.
재중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초등학교 5학년 올라가. ”
“ 안녕하세요. ”
때를 맞춰 고개를 갸우뚱하며 인사를 한 인찬을 보고 그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어쩔 줄을 몰라했다.
“ 우와 씨발, 나도 이렇게 귀여운 동생 하나 있으면 정말 좋겠다! 내 동생도 같은 나인데 어쩌면 이렇게 다르냐. ”
씨발은 뭐냐, 남의 귀여운 동생을 앞에 두고 욕을 하다니. 재중은 짜증이 나서 조금 쌀쌀맞은 음성으로 말했다.
“ 어디 가던 길 아냐? ”
이제 그만 가, 라는 말을 돌려서 한 건데 놈은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알면서 능청을 떠는 것인지 크게 웃으며 말했다.
“ 어, 할 일 없어서 놀러 나온 거였어. 넌 어디 가냐? 별 거 없으면 같이 놀러 갈래? ”
“ 다음에. 동생이 있어서. ”
“ 같이 가면 되잖아. ”
“ 초등학생이라니까. ”
“ 뭐 어때? ”
그제야 재중은 뭔가 의심스러워져 눈썹을 찌푸렸다.
“ 얘, 남자애야. ”
“ 알아. ”
어라, 잘못 짚었나. 재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가 다시 말했다.
“ 어쨌거나 우린 볼 일이 있어서. 다음에 보자. ”
“ 오락실 갈 건데 같이 안 갈래? 아니면 스케이트장은 어때? 참, 그래. 두타 갈까? ”
재중은 문득 한심스레 놈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우린 정말로 볼 일이 있는 거니까. 다음에 보자. ”
“ 그래… ”
못내 아쉬운 듯 놈은 인찬을 바라보다가 씨익 웃었다.
“ 다음에 꼭 보자, 꼬맹아. ”
볼 일 없어, 하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재중은 돌아섰다. 한숨이 나온다.
동급생의 녀석이 이렇게 자신을 진땀나게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한동안 걸음을 옮기던 재중은 무심결에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주변을 오고 가는 사람들 중에는 나이 또래가 꽤 많이 섞여 있었다.
화난 표정으로 걸어가는가하면 뭐가 그리 우스운지 연신 깔깔거리며 구르듯 달려가는 아이들까지.
그런데 그들은 왜 이다지도 멀게 느껴지는 건지. 자신은 동떨어진 세상에 홀로 격리되어 그들을 관찰하는 것처럼.
그 순간 재중은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평범한 고교생이 아니었다. 이미 자신은 그들과 동화되기에 너무도 빨리,
또한 너무도 멀리 와버린 것이다. 쉽게 맺어졌던 육체관계가 이렇게 자신을 격리시키는 결과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것은 정상적인 관계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남자에게 몸을 팔았으니까.
그렇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경험을 하고 나서 거리에 다시 나온 지금 이 순간,
같은 거리를 오고 가는 아이들이 어쩌면 그다지도 유치하고 어려보일 수 있는지!
“ 형? 왜 그래? ”
인찬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재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재중은 어렵게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겨우 웃었다.
“ 아니야, 인찬이 학용품 사러 가자. ”
재중은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인파를 헤쳐 나갔다. 저 멀리서 급속도로 바래져가는 자신의 소년기를
서글픈 눈길로 접어버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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