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12)
“ 형! ”
재중은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와 안기는 동생을 마주 안았다.
“ 인찬아아아! ”
이산가족의 심정을 알 것 같다.
“ 형, 형, 형!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 ”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동생을 끌어안고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는 재중도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 인찬아, 할머니한테 인사드려야지. ”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오자마자 달려나온 동생 때문에 제대로 주변도 살피지 못했던 재중은
그제야 할머니댁 식구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눈치채고 헛기침을 했다.
“ 어르신 안방에 계시네. ”
재중이 어릴 때부터 할머니댁에 올 때마다 보았던 낯익은 아주머니가 쌀쌀맞은 얼굴로 말했다.
“ 에… 에예… ”
엉거주춤 인사를 하고 안방 쪽으로 걸어가려던 재중은 쓴웃음을 지었다.
허리에 매달려 도통 떨어지려 하지 않는 동생의 머리를 통통 두드리며 재중이 말했다.
“ 인찬아, 형 할머니한테 인사드리러 가야 하잖아. ”
“ 같이 가. ”
행여 자신을 버리고 갈까봐 두렵기라도 한 듯 고집을 세우며 말하는 동생에게 재중은 고개를 저었다.
“ 안돼, 형 할머니 인사드리고 나와서 인찬이랑 놀아줄 테니까 기다려. ”
“ 정말이지…? ”
아직 불안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의심스레 묻는 인찬을 보며 재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이지. 언제 형이 우리 인찬이한테 거짓말했나? ”
동생은 한참동안 형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마지못한 듯 손을 떼었다.
재중은 다시금 인찬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할머니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 들어오게. ”
냉정한 음성. 재중은 한기를 느끼며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넓은 방 안쪽에는 고풍스러운 병풍이 둘러져 있고, 다른 벽에는 목재로 다듬어진 가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아하게 자수가 놓아진 방석 위에 앉아있던 싸늘한 얼굴의 노부인이 주춤거리며 들어오는 재중을
차가운 눈동자로 훑어보았다.
“ 안녕하세요. ”
용케 말을 더듬지 않고 인사말을 꺼냈지만 음성이 떨리는 것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바라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는 재중에게 할머니는 그제야 건조하기 그지없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게 앉게. ”
서둘러 맞은 편에 앉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아까의 아주머니가 새침한 얼굴로 차를 들고 들어왔다.
“ 전주댁, 이제 됐으니 나가 봐요. ”
“ 알겠습니다. ”
고개를 숙이고 돌아선 아주머니는 마침 시선이 부딪힌 재중을 경멸에 찬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난 후 차를 들어 입에 가져가며 할머니가 말했다.
“ 그래, 아이는 언제 데려갈 생각인가? ”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본론에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 아이가 계속 집에 있는 거, 부담스럽다는 거 모르지는 않겠지? 그러면 하루라도 빨리 데려가야 할 게 아니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도대체 얼마동안이나 아이를 맡아달라는 게야? ”
재중은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달싹여 말을 꺼냈다.
“ 제가 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
할머니의 눈살이 확, 하고 찌푸려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속사포처럼 말이 쏟아져 나온다.
“ 염치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는 게 아닌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너무하는군,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키운 건지,
원! 니 에미 에비는 예의라는 게 뭔지도 가르치지 않더냐?… ”
속이 끓어올랐지만 재중은 주먹을 움켜쥐고 한사코 참았다. 지금 화를 내게 되면 정말 쫓겨난다.
전혀 수가 없는데 쫓겨나면 어떻게 하나. 자신이야 윤호의 호텔에 간다고 해도 인찬이는 어떻게 할건가.
게다가 자신도 당장 윤호에게 언제까지 신세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는데.
결국 계속되는 할머니의 날이 선 훈계를 피하기 위해 재중은 속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난 니가 싫어졌어 우리 이만 헤어져 다른 여자가 생겼어…
지오디의 노래를 나레이션도 해봤다 노래도 불러봤다 하다보니 조금씩 화가 가라앉는다.
재중은 할머니의 말이 끝난 틈을 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1년만 기다려 주세요. 졸업하자마자 취직해서 인찬이 꼭 데려갈께요… ”
할머니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매달리는 재중에게 혀를 끌끌 차더니 고개를 픽 돌린다.
재중은 한동안 눈치를 보며 앉아 있다가 조심스레 인사를 했다.
“ 그럼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시 찾아뵐께요. ”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허리를 숙인 후 돌아서자 뒤에서 할머니가 혼잣말-치고는 상당히 큰 음성으로-을 했다.
“ 책임을 못 지겠으면 애를 낳질 말던가, 에이 쯧쯧… ”
재중은 이를 악물고 등뒤로 문을 닫았다. 거실에서 노심초사하고 있던 인찬이 서둘러 다가온다.
“ 형, 얘기 다 끝났어? 응? ”
재중은 다시금 허리에 매달리는 동생을 어렵게 떼어내고 겨우 입을 열었다.
“ 인찬아, 형 화장실 다녀올게. 잠깐 여기 있어… ”
서둘러 걸음을 옮겨 화장실에 들어간 재중은 그제야 더운 눈물을 벌컥 쏟아내었다.
제기랄. 흐느낌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변기의 물을 내리고 작게 소리 죽여 울었다.
나 역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니야. 이렇게 버릴 거였다면, 어째서 낳아 길렀을까.
재중은 그의 부모가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할머니의 차가운 얼굴도, 날이 선 음성도,
모두 너무 속이 상해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한참만에 붉어진 눈으로 화장실에서 나온 재중은 인찬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 인찬이 제가 데리고 나가서 밥 먹일께요. ”
때마침 이른 저녁을 준비하고 있던 아주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 아예 나가는 건가? 인찬이 짐 챙겨 줘? ”
재중은 욱, 하고 올라오려는 화를 다시금 눌러참고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 할머니한테 말씀드렸어요. 인찬이 밥 먹이고 좀 함께 있다가 집앞에 바래다주고 갈께요. ”
아주머니는 못마땅한 얼굴로 재중을 훑어보더니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인찬의 손을 꼭 잡아주자 인찬이 고개를 들었다.
“ 형이랑 밥 먹으러 가자. 인찬이 뭐 먹고 싶어? ”
다시 고개를 숙이는 인찬의 손을 잡아끌고 재중은 서둘러 거대한 한옥집을 나왔다.
“ 4시 정각이네. 정말 칼같다니까. ”
윤호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하는 여자의 맞은 편에 앉았다.
“ 현관에서 보고 없으면 가려고 했어. ”
“ 내가 언제나 창가에 앉는 걸 알면서. ”
새침하게 입술을 움직여 보인 그녀는 빙긋 웃으며 턱을 괴고 말했다.
“ 어쩌면 만날 때마다 더 멋있어질까? ”
“ 아이스 블루 마운틴. ”
여자의 말을 무시하고 다가온 웨이터에게 간단히 주문을 한 윤호에게 지영은 눈쌀을 찌푸렸다.
“ 어머나, 여자의 칭찬을 그렇게 무시하다니. ”
“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지겨우니까. ”
윤호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지영은 꼬았던 다리를 풀고 반대편 다리를 꼬며 말했다.
“ 이렇게 무뚝뚝한 남자를 평생 모시고 살려니 벌써부터 무섭네. ”
“ 파혼하든가. ”
윤호의 무심한 말에 지영은 과장되게 눈을 크게 뜨고 탄성을 질렀다.
“ 어머, 설마 그런 일을. 얼마나 어렵게 한 약혼인데. ”
지영은 얼굴 가득히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 그러고 보니까 새로운 애가 생겼다며? 어때? ”
깊숙이 들이마셨던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윤호가 대답했다.
“ 별로야. 잘 못해. ”
지영이 키득거리며 역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 유감이네. 내 상대는 아주 능숙한데. ”
테이블에 놓여진 윤호의 라이터를 집어 불을 붙이며 지영이 말을 이었다.
“ 그런데 웬일이야? 언제나 잘 하는 상대만 고르더니. 새로운 재미라도 발견한 모양이지? ”
“ 내 취향에 맞게 가르치는 것도 괜찮겠지. ”
담배의 재를 털어내는 윤호를 유심히 바라보던 지영이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로 나직히 말했다.
“ 혹시 사랑에라도 빠진 게 아닐까 내심 걱정했지 뭐야. 의외의 상대라니까 말이지.
하긴, 당신의 차가운 하트를 차지할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
윤호는 천천히 담배를 입에 가져가며 지영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 죽어도 좋다면 너를 사랑하도록 노력해 보지. ”
“ 농담도 잘 해. ”
담배연기를 허공에 뱉어내며 한 지영의 말에 윤호가 어두운 미소를 지었다.
“ 글세, 농담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