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 (11)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호텔의 천장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삐그덕거리는 몸을 움직여 사방을 둘러본 재중은 큰 방에 혼자 외로이 남겨져 있다는 사
실을 깨달았다.
“ 어이구구… ”
전혀 섹시하지 않은 신음을 흘리면서 엉거주춤 일어난 재중은 구르듯 침대에서 내려와
엉금엉금 기어서 욕실로 향했다. 사실 계속 누워있고만 싶은 생각도 굴뚝같았지만
이전에 그렇게 퍼질러 있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윤호 때문에 진땀을 뺐던 기억이 떠올라
그나마 모습은 제대로 갖추고 있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을 한 탓이다.
겨우 기어서 욕실까지 간 재중은 욕실의 손잡이를 붙잡고 겨우 일어나 욕실벽을 짚고 욕조로
겨우 겨우 걸음을 옮겼다. 미끈한 타일의 감각에 손이 미끄러져 자칫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구르진 않았다.
그러나 급히 몸이 흔들린 탓에 가뜩이나 욱씬거리던 곳이 절규를 한다.
“ 헉… ”
자신도 모르게 거친 비명을 내질렀던 재중은 하아하아 하고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나쁜 자식, 나쁜 자식, 나쁜 자식. 아무리 욕을 퍼부어도 속이 안 풀린다. 나쁜 자아아아아아식!!!!!
세면대까지 겨우 도착한 재중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라앉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꼬라지가 말이 아니다.
얼굴은 온통 자주색으로 변해 이만큼 부어있고, 전날 하도 울어대서 두 눈은 팅팅, 몸도 여기저기 구르고 차이느라
멍이 들어있다. 엉덩이 사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이렇게 선명하게 남아있는 구타자국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드나. 입을 이만큼 내밀고 투덜거려도 봤지만
움직일수록 남는 건 고통 뿐이라 결국 포기했다. 겨우 욕조까지 진출한 재중은 안도의 한숨마저 새어나왔다.
이전처럼 커튼을 치고 더운 물 안에 들어가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청소 아줌마들이 들이닥친다.
일찍 들어와 있길 잘 했다. 오늘 같으면 그 때처럼 재빨리 움직이지도 못 할 텐데.
아줌마들은 전날과 같이 이런 저런 수다를 떨며 방을 정리하고는 다시 제꺼덕 나갔다.
뜸을 들여 목욕을 하고 다시 엉금엉금 기어 나왔던 재중은 욕실에 준비되어 있는 가운을 걸친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더 이상 여기저기 돌아다닐 기운이라고는 없다. 좀 쉬었다가 옷을 입든가 말든가 해야지, 하면서
눈을 깜박이던 재중은 문득 달력을 보았다. 아…
벌써 겨울방학이 끝나가는 구나… 개학이 언제더라… 스스로도 급변한 환경 탓에 잊고 있었지만
재중은 아직 학생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대학을 준비해야 할 고 3. 막막하기 그지 없다.
뭔가 건실한 아르바이트자리라도 알아보지 않으면… 언제 이 녀석한테 쫓겨날지 알 수가 없으니…
아마도 이 남자 나를 백수로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사람을 이 꼴로 만들지…
이런 저런 생각을 굴리다보니 동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꽤 오래 못 봤구나.
아직도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느샌가 재중은 낮게 코를 골며 다시 잠들어 버렸다.
누군가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다. 이마에서부터 부드럽게 뒤로 넘겨주는 손길이 기분 좋다.
게다가 아까부터 무언가 향기로운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고 있다. 꿈치고는 정말 화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도 모르게 행복한 한숨을 내쉬어버린 것 같다. 머리 위에서 가득 웃음을 머금은 음성이 들려왔다.
“ 야옹, 해 봐. ”
“ 야옹… ”
잠결에 웅얼거렸던 재중은 순간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윤호가 키득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이제는 턱을 매만진다.
“ 자, 더 울어 봐, ”
이 자식 완전히 변태 아니야… 기가 막혀서… 재중은 입을 꾹 다물고 반항기 섞인 눈으로 윤호를 노려보았다.
윤호는 전혀 화내는 기색 없이 생글거리며 말했다.
“ 이런, 우리 고양이가 화났네. 먹이를 안 줘서 그런가. ”
번쩍. 귀가 뜨인다.
“ 야옹. ”
헉, 이런… 실수했다… 스스로가 이렇게 증오스러울 수가 없었다. 얼굴이 빨갛게 돼서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윤호가 애써 웃음을 참는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 룸서비스를 시켰어. ”
“ 오늘의 유희는 고양이 놀이인가요? ”
자신의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애써 새침하게 말한 재중을 보며 윤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그러나 전날 보았던 무서운 눈으로 재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 누가 너에게 유희라고 말했지? ”
에, 아닌가. 그렇다고 그렇게 무섭게 볼 건 없잖아. 어느새 조성된 공포분위기에 헉하고 입을 다물어버린 재중에게
윤호가 말했다.
“ 아직 벌이 안 끝났어. 자, 넌 고양이야. 바닥에 앉아. ”
“ …… ”
이 자식이 정말… 사람을 뭘로 보고…
생각 같아서는 정말 한 대 후려쳐 버리고 싶었지만 몸의 상태도 상태거니와
사실상 윤호에게 이길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얌전히 시키는 대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쿠션이라도 내어주면 좋겠는데, 윤호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빤히 노려볼 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재중은 어쩔 수 없이 딱딱한 바닥에 조심스레 자세를 잡으며 아직 낫지 않은 상처 때문에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 착하군. ”
착하면 이제 밥을 달란 말이야! 갈망에 젖은 눈으로 올려다보았지만 윤호는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꾸르르르르륵…
비, 빌어먹을. 자는 건 나중에 하고 이 자식 돌아오기 전에 밥이나 실컷 먹어둘 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윤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자식, 넌 많이 먹고 왔구나. 재중은 이를 부드득 갈며 그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 배고파요… ”
재중의 애원에 윤호는 얄밉게도 즉각 말을 받았다.
“ 넌 고양이야. 말을 못 하지. ”
이제야 재중은 윤호가 자신에게 이런 벌을 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요컨대 앞으로는 자신이 ‘
야’ 한마디하면 ‘네 재떨이요’ 내지는 ‘네 신문이요’ 내지는 ‘네 엉덩이요’
라고 한번에 알아듣고 고대로 행동하라 이건가. 그럼 ‘넌 고양이야’ 라고 말했으니 ‘사람으로 돌아와’
라고 할 때까지 난 고양이처럼 행동해야하나. 여기까지 생각을 굴린 재중은 결국 이를 악물고 조그맣게 소리를 냈다.
“ 야옹… ”
“ 배가 그다지 고프지 않은가 보군. ”
“ 야옹 야옹 야옹 야옹 야옹… ”
고집이고 자존심이고 죄다 버리고 정신없이 울어대자 그제야 윤호가 빙긋 웃었다.
“ 그래, 난 똑똑한 아이를 좋아하지. ”
그리고 그는 그제야 손을 움직여 글라스를 들어 입에 가져갔다.
“ 상이다. ”
키스와 함께 건네지는 시큼한 포도주의 향을 맡으면서,
재중은 갈수록 캄캄해지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져들었다.
“ 좀 나갔다 와도 될까요? ”
재중의 말에 윤호는 읽고 있던 신문에서 눈을 떼고 재중을 바라보았다. 체벌이 끝난 것은 이틀 전의 일이다.
그동안 재중은 울며불며 매달려서 겨우 윤호의 횟수를 줄이는데 성공했다. 물론 상처가 나을 때까지의 일이었지만.
“ 다녀오는 건가, 아니면 아예 나가는 건가? ”
담배를 입에 물며 한 그의 말에 재중은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 다녀올 거예요. ”
싫어도 돌아올 곳은 여기뿐이다. 윤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재중에게 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
처음 윤호가 주었던 수표는 주머니에 있다. 오늘은 인찬을 만나러 갈 생각인 것이다.
하나뿐인 동생인데 울고 있지나 않을지 걱정이 된다.
“ 참, 잊은 게 있군. ”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윤호가 재중을 불러 세웠다. 머리를 갸웃하며 다시 윤호에게로 걸어가자
윤호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 건네주었다.
“ 저번에 주신 거 아직 있는데요. ”
무심결에 말했던 재중은 하마터면 자신의 혀를 깨물뻔 했다. 빌어먹을, 돈이란 있을수록 좋은 거야.
줄 때 덜렁 받았어야지! 있다고 그러면 어떻게 하냐! 게다가 지금껏 그렇게 대주고 수표 한 장 받았는데,
억울하지도 않아?!
바보바보 하면서 머리를 바바박 때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데 윤호가 말했다.
“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주면 그냥 받아. ”
짜증스럽게 덧붙인 그의 말에 재중은 서둘러 돈을 받아들었다. 10만원권 짜리 수표 세 장이랑 만원짜리 몇 장.
“ 감사합니다. ”
완벽한 원조교제의 현장이 여기 있구나, 하고 재중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엉덩이 대주고 용돈 타가는 나의 모습이 그거 아니면 도대체 뭐겠냐.
게다가 간간이 변태플레이―고양이가 되어주질 않나 강간을 당하질 않나―까지 해주니
어디 가서 쑥맥이라는 소린 안 듣겠다.갑자기 날카로운 전화벨소리가 들려왔다.
윤호가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는 것을 보고 재중은 작게 소리내어 말했다.
“ 다녀올께요. ”
윤호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 …응? 아, 지영인가. ”
돌아서던 재중은 윤호의 입에서 흘러나온 여자의 이름과 함께 문득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새된 음성에
머리를 갸웃했다.
- 윤호씨, 오늘 나랑 만나기로 한 거 기억하고 있어? 시간을 바꾸고 싶은데…
윤호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 그래. 몇 시로? …좋아. 그럼 웰링턴에서 네 시에 보지. ”
통화는 계속되었다. 머뭇거리던 재중은 결국 발길을 돌려 방에서 나왔다. 무슨 사이일까.
꽤 친밀한 관계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윤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무엇을 하는지, 몇 살인지 조차. 성질드럽고 돈많은 변태라는 건 알겠는데.
재중의 입에서 복잡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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